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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하 나루터에 선 재중 소설가 겸 역사학자 류연산씨. 이곳은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이 항일전선으로 가기 위해 도하했던 곳이다.
ⓒ 류연산씨 제공

'193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해 박 전 대통령은 만주행을 감행했고, 이듬해(1940년)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 편입을 거쳐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결국 만주행은 그를 교사에서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문경보통학교에서 평범한 교사생활을 하던 박 전 대통령이 왜 갑자기 만주로 떠났을까? 일각에서는 그가 어려서부터 군국주의의 권력집단인 군인을 동경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긴 칼 차고 싶어 만주에 갔다"는 것이다. 또 신경육군군관학교가 사실상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만주분교였다는 점에서 그의 만주행을 '자발적 친일'의 전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39년 항일연군 토벌 참가경력으로 군관학교 시험 치러"

지난 2004년 <일송전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란 책을 통해 재만주 조선인의 친일행적을 고발했던 류연산씨(재중 소설가이자 역사학자)는 <오마이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만주행은 친일과 직결되어 있다"며 "이러한 만주행적을 신사참배 했거나 일본군에 강제징병된 것과 동등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는 대구에서 선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며 "하지만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군관학교에 가서 일본군 군관이 되어 항일군 토벌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류씨는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부대 근무설'을 제기해 '박정희 친일논쟁'에 불을 지폈다. 박 전 대통령이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설립된 간도특설부대에 근무한 것이 사실이라면 '친일논란'은 한껏 명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주재덕 선생 등의 증언을 토대로 "박정희는 1939년 항일연군 토벌에 참가한 경력으로 추천을 받아서 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며 "졸업을 앞두고 한동안 특설부대에 있으면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주 신경육군군관학교의 입학자격(만주국 국민-미혼자-만 20세 이하)이 상당히 엄격했다는 점을 들어 "당시(1939년) 그가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류씨는 '박정희는 보병8단 단장부관으로 내근을 했기 때문에 독립군 토벌설은 다소 과장됐다'는 일부의 견해에 대해 "박정희 생전에 발간된 책들을 보면 박정희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가 되어 열하에서 108차 팔로군 토벌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고 있다"며 "무슨 근거로 '내근'을 했다고 하는지 반문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1945년 광복되기 전에 박정희는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한다"며 "(팔로군 토벌 등)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급할 수 있는가"라고 덧붙였다.

또한 류씨는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이 제기한 사자(死者)명예훼손 소송과 관련 "소송의 목적은 만주시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미화하려는 데 있다"며 "박정희의 친일문제는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후의 행적에 의해 규정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령 이사장은 일부 연변인사들에게 만주시기 박정희가 친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해 달라고 주문했다"며 "이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나서 사실을 위조하고 날조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그는 "만주시기 박정희는 친일이라는 관점은 내 관점이라기보다 중국 조선족 역사학계의 공인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박정희 평가는 사적관계를 떠나 학술계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류연산씨와의 이메일 인터뷰 전문이다.

▲ 현재 길림성 안도현성 시장건물. 광복 전 이곳에는 간도조선인특설부대가 있었다.
ⓒ 류연산씨 제공

"박정희의 만주행은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

-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의 '만주 행적'이 '친일'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행은 친일과 직결되어 있다. 자각적으로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고 또한 모범생이었으며 졸업 후에는 열하에서 중국 항일부대인 제팔로군 토벌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이러한 만주행적을 당시 한국인으로서 신사참배를 했거나 일본군 강제징병에 나간 것과 동등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부득이한 경위에 그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는 생존이 아닌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는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문제이다.

나는 친일을 네 가지 경우로 본다. 첫째, 이완용과 같은 나라의 대표자이다. 그는 이완용이기 전에 한국의 대표자이다. 이완용한테는 개인의 생존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한테는 친일을 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친일파의 길과 항일하는 길밖에 없다.

둘째, 어떤 단체장이나 조직의 대표이다. 그들의 친일행위는 전체 단체나 조직을 친일로 몰아간다. 그로 인하여 단체와 조직의 성원들이 본의 아니게 친일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름이 있는 문인 및 학자 등이다. 그들의 언론은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준다. 최남선, 이광수가 친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넷째, 자각적인 행위자들로서 그들의 행위가 타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 경우다. 박정희와 같은 경우다. 그는 대구에서 선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갔고 일본군 군관이 되어 항일군 토벌에 참가한 것이다."

- 박정희의 만주행적이 왜 중요한가?
"당시 만주는 일본의 식민지국가였다. 일본은 만주국에서 이른바 '5족협화 낙토만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서 조선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그리고 박정희가 만주행을 한 그 해(1939년)는 만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세력과 공산당의 항일부대의 활동도 거의 사라져 가는 때였다. 그러나 이미 중일전쟁이 한창인 때이고 개인적인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는 활동무대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와 일본군에 참가한 것은 항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당시 항일을 하는 길은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만주를 경유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관내로 들어가 한국임시정부 산하의 조직에 참가하기도 하고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에 참가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독립운동이 목적이 아니었다."

- 어떻게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쫓게 됐나?
"1995년 5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나는 <서울신문>에 '두만강 천리', '압록강 2천리', '송화강 5천리', '흑룡강 7천리' 등 제목의 르포를 연재했다. 박정희와 관련해서는 두만강과 압록강 답사 길에서 인터뷰한 사실이 있다. 1995년 봄에 두만강 답사 길에 현재의 용정시 백금에서 박정희의 친척 되는 분을 만났고, 그해 7월 말 압록강 답사 길에 요녕성 심양에서 박정희하고 함께 군에 있었던 주재덕 선생을 만났다.

당시 조선족역사학계에서는 박정희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지금도 여전하다)이었다. 안도현조선족발자취 총서 <겨레의 발자취>(1987년 출판)에 쓴 차상훈(역사학자. 안도현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편집위원회 주임) 선생의 '주구무장대의 시말'이라는 글에 박정희는 특설부대 중대장급 군관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다시 이 글은 조선족 학계의 공인을 받아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결전(4)>(1991년 출판)에도 수록되었다.

나는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고 답사 길에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기초로 벌써 1995년에 글을 썼고 <서울신문>에 보냈다. 그런데 그때 <서울신문>에 채납(採納)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9년에 <혈연의 강들>(연변인민출판사 출판)에 처음 발표했고, 7년 후인 2002년 12월 월간 <말>지에 발표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부언하지만 내가 쓴 글에 나타난 박정희에 대한 관점은 나 개인의 관점이라기보다 이미 학계의 관점이라는 사실이다."

"간도특설대 생존자들이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 증언해"

▲ 문경소학교 교사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그는 1939년 만주행을 선택함으로써 '교사'에서 '군인'을 변신했다.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 간도특설대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은 어떤 것인가?
"1995년 7월에 만난 주재덕 선생의 증언을 개괄하면 이렇다. 그는 1943년에 특설부대에 자원입대했고 이듬해 부대를 따라 열하에 가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특설부대에서는 박정희가 특설부대 출신이며 1939년에 항일연군토벌에 참가한 그 경력으로 추천을 받아서 신경육군군관학교로 시험을 쳐서 갔다고 했다.

그리고 열하에 있을 때 박정희는 졸업을 앞두고 한동안 특설부대에 있었고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여 팔로군 선전원과 부상을 입고 백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구장(區長)을 체포하여 정보반에 넘겼다고 했다. 그리고 특설부대가 팔로군에 기의를 하려고 모의했을 때 그도 동감했다고 했다.

조선족의 저명한 시인 조룡남의 형님 조룡학(趙龍學)은 연변의 훈춘에서 특설부대에 참군했고, 문화대혁명 때 투쟁을 맞고 사망했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동생인 조룡남의 집에 와서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도 열하에서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광복 후 집으로 오지 말고 한국으로 갔더라면 이런 투쟁은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있었다는 증언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가?
"박정희 특설부대설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은 결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2001년 나는 길림성 반석시에서 만난 방석도(方錫渡) 선생을 만났고 박정희가 특설부대 출신이라는 증언을 했다. 그는 길림성 연변의 안도현 사람이며 자기 마을에 특설부대 출신이 있었는데 광복 후 청산을 받아 총살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을 심판할 때 박정희도 특설부대 출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차상훈 선생 역시 1980년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면서 자료발굴을 하던 시절에 안도현의 어른들한테서 박정희가 특설부대였고 술집에서 일본군하고 특설부대원간에 쟁론이 붙었을 때 박정희가 어떻게 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하더라고 했다.

안도현 이룡득(민간전설 수집가. 안도현 문화관장) 선생은 1987년에 안도현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책임편집을 담당했었는데 그때 차상훈 선생이 쓴 박정희문제를 심중(深重)히 하여 특설부대 출신들하고 안도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조직하고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안도현에서 나서 자란 함형도, 함창도 형제는 그들의 부친이 광복 전에 안도현성에서 사진사였고 박정희하고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함형도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의 외삼촌이 경영하는 명월진 냉면옥에 박정희가 다녔고 돈도 주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 출신들의 단체인 명월회가 있다. 1997년 이 명월회장 송석하(육군소장 예편. 작고)는 "가끔 박정희가 명월구로 놀러와 술을 먹고 간 적이 있다"(<실록 군인 박정희>, 정운현)고 증언한 바 있다. 언제 어느 시절에 명월구로 자주 다녔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명월구에서 신경의 거리는 500km로, 지금도 기차로 9시간 여행길이다. 교통이 대단히 불편했던 당시 신경에서 명월구로 가끔 다니면서 술을 먹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술을 먹으러 두 곳 사이로 다니는 사람은 없다.

또한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 후에는 열하에 가 있었다. 언제 명월구로 다녔을까? 아마 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 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특설부대를 통해 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갔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외에도 1980년대 역사자료발굴을 위하여 연변 각지를 다녔던 역사학자들도 박정희의 특설부대설을 심심찮게 들었다고 했다."

▲ 일본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 전까지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 박정희 인터넷기념관

"엄격한 만주군관학교 입학자격을 어떻게 얻었을까?"

- 간도특설대 근무가 친일의 '직접 근거'가 되는 것인가?
"간도특설부대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는 친일근거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부대 내에서의 역할 여하에 달렸다. 광복 후 연변에는 특설부대 출신들이 많았고 그들은 친일파청산을 하던 당시에 심사를 받았다. 그리고 죄의 경중을 가려서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하고 지방 감시를 받기도 했다.

주재덕은 팔로군을 직접 죽인 것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후에 무기형으로 되었고 조룡학은 농촌에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당시에 경중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당했다."

- 다수의 학자들은 증명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근무는 '설'로만 취급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간도특설부대에 대한 일제의 자료가 전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일제가 망하면서 소각했을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소부분이다. 특설부대는 정원이 800여명에 육박하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람 수는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 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박정희 특설부대설이 민간에 충만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또한 여러 가지 기록들을 미루어서 사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주재덕 선생은 박정희가 이미 1939년 간도특설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주장하는데 설득력이 약한 것 같다. 그 해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만주를 잠깐 방문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신경육군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학 경로와 관련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에서 발간된 박정희 관련 글을 보면 박정희는 1939년 3월에 교단을 떠났고 이듬해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법정에 제기한 박근령(육영재단 이사장)의 고소자료에서도 1939년을 문경소학교에 있었다는 증거가 서지 않는다. 동시에 당시 박정희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몇몇 증인들도 이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만주를 잠깐 방문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문경소학교 교사로서 주로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만주신경육군군관학교 입학생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첫째, 오직 만주국 국민이어야 한다. 둘째, 반드시 미혼자여야 한다. 셋째, 연령은 만 20세까지이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이 구비한 자로서 신체가 건강하고 시험에 합격된 자라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 세 가지 조건에서 모두가 불합격이다.

그가 문경소학교 교사로 계속 근무했다고 하면 만주국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이나 그때나 국적을 '잠깐 방문' 하면서도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시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는 이미 22세이고 기혼 남성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어떻게 입학할 수 있었는가? 정상통로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 교관이었던 일본군 아리카와 대령의 소개로 시험자격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아리카와는 신경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러시아와 만주국의 접경지대인 목단강 변방에 있었고 겨우 연대장에 불과했다. 그가 시험자격을 무시하고 박정희를 시험치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박정희가 <만선일보>에 천황폐하에 대한 멸사봉공(滅私奉公)을 맹세하는 혈서를 발표하였고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강재호라는 사람이 박정희를 시험을 치게 했다고 한다. 강재호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엄청난 불법을 합법화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심을 해볼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제기한 류연산씨의 저서.
ⓒ 오마이뉴스
강재호라는 인물을 파악하고 보면 박정희 만주행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강재호는 특설부대 중위이고 시험관이었다. 1939년 9월경에 목단강에서 만주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는데 강재호가 박정희를 데리고 시험장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1998년 2월 13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이재기(박정희와 함께 만주육군군관학교 동창임)의 회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박정희는 특설부대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시험에는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서 군관을 배양할 수요로부터 국적, 연령, 결혼여부를 가리지 않고 부대 내에서 16명을 특별 추천하여 시험자격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미루어서 박정희는 시험 전에 특설부대에 참가했고 특설부대원의 자격으로 시험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바 있지만 주재덕 선생의 증언이 결코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단서로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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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