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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 신드롬이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다.

신정아로부터 시작한 학력위조논란이 KBS <굿모닝팝스>를 진행하던 이지영의 퇴진과 만화가 이현세의 고백으로 이어졌다. 물론 논란의 당사자들은 잠적하거나 프로그램 중도하차 등 현실적 불이익을 받고 있다. 남을 속인 대가로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남을 속였더라도 현실적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들의 이른바 '방송나이'가 그것이다. 가능하면 어려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연예계 특성에 근거한 것이기에 연예프로그램의 소비자인 국민들도 대체로 너그러운 듯하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나이를 속이는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반면, 학력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징계의 칼날을 들이댄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부도덕성에 왜 사람들은 차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시민은 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거짓말쟁이들의 부도덕성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의 시민은 감싸기도 한다. 거짓말한 그들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래서 찬반이 교차된다.

명백한 부도덕성에 찬반이 교차하는 시민은 외견상 가치관 혼란의 주범이다. 명백한 부도덕성에 물 타기 하는 부도덕한 존재다. 그러나 시민은 시민사회의 주인이다. 그들의 척도는 만물의 척도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서 이번 사건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학력을 속인 것 자체에 대한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비난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은 누가 뭐라 해도 학력위주의 한국사회다. 굳이 이들 학력위조사건의 범인을 가려내자면 한국사회가 '주범'이고 이들 개인은 '종범'에 해당한다.

인간이 속한 그 상황에 근본적인 하자가 있다면 그 상황 속의 인간들은 누구나 하자있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명도를 가지고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부터 그 하자가 들춰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학력사회 한국은 조광조의 현량과를 상기해야

조선 중종시대 개혁정치가 조광조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는 쇠퇴해 가고 있던 조선을 '다이내믹 조선'으로 재무장시키고자 개혁을 추구했다. 그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맞서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재등용의 틀을 바꾸는 것이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들어온 인재들은 당시 훈구파들의 위장된 낙하산부대였다. 매관매직이 판치는 사회에서 관료들은 훈구파들에 줄서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패의 산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요즘 강남8학군 현상과 같이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아니면 과거제도를 통과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구조는 기득권에 의한 기득권 대물림과 더불어 사회의 역동성 저하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광조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인재등용의 방법으로 현량과를 제안하고 중종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일종의 엽관제다. 조광조가 개혁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지들을 조정에 들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니 당연히 조광조파가 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낡고 시든 기득권체제가 아니라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신흥세력이란 점에서 개혁성을 가졌다.

그러나 개혁의 역사는 기묘사화와 조광조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할 유기체 '국가'가 신진대사의 때를 놓쳐 버렸다. 선진 조선으로 나가야 할 시점에 개혁좌초로 걸려 넘어졌다.

조광조의 개혁실패에는 '조급한 개혁추진'이란 현상보다(사실 이 표현은 기득권자들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개혁을 거부하는 기득권적 학벌체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많이 배운 자들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기득권적 발상이 완연한 중기 조선사회에 조광조와 신흥사림파들의 개혁기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 내에서 배운 자들이 기득권자들의 세상을 확대재생산하는 사회가 역동성을 잃고 황폐해진다는 것은 인류역사의 철칙이다.

인재등용의 시스템이 낡아서 병들었을 때에는 이를 바꿔주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 개혁이다. 과거제도나 고시제도, 그리고 학력제도는 그 자체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낙하산식 인사제도나 정실인사와 같이 엽관제의 폐해가 드러났을 때 이들 제도는 개혁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시험과 같은 학력제도가 더 이상 사회개혁을 추동하지 못하고 수구와 구태체제를 연장할 때에는 조광조의 현량과와 같은 엽관제도 개혁적인 제도가 된다. 아직도 미국에서 그 저력을 자랑하며 생생히 살아 있는 '추천장제도'가 그것이다.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대위를 구명한 까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그 희생양으로 찾은 드레퓌스 대위. 유태인 출신 드레퓌스 대위가 유태계 독일인과의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는 프랑스 군부의 책임회피성 희생양 만들기는 드레퓌스를 종신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에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는 신문기고문을 통해 프랑스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희생양은 프랑스 혁명정신이 추구한 개인의 자유와 거리가 먼 행태라고 본 졸라의 투쟁으로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구명되지만, 정작 졸라는 의문의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졸라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했다. 국가와 같은 거대 권력을 위해 한 개인이 희생당하는 것은 근대정신에 반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는 개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이지영의 컴백은 한국사회가 진보하는 길

그래서 우리는 이지영씨의 경우를 좀 특별하게 봐줄 필요가 있다. 이지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건강한 앞날을 위해서다. 물론 신정아와 이현세도 이지영과 별반 차이 없지만 신정아의 경우 아직도 학력위조여부를 다투고 있는 진행형이고 이현세는 스스로 고백한 경우다.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아직은 부적절하거나 징계의 대상이 모호한 경우다.

이지영의 구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녀가 단지 학력사회의 희생양이라거나 피해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녀가 학력을 속임으로써 다른 경쟁자의 희생 위에 자신이 기득권을 누렸다는 점과 선량한 국민 일반을 속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복권은 그녀를 응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와 이익을 사회에 준다. 그녀 개인의 이익에 앞서 한국사회가 학력주의 적폐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쟁과정이요 상징투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섹스비디오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은 가수 백지영이 공중파 방송에 성공적으로 복귀함으로써 여성의 섹스 행위가 공갈과 협박의 대상으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있다. 강간이든 화간이든 잠자리 자체가 여성에게 흠결이 되는 전근대적 사회의식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백지영의 방송복귀로 인해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란 일부 보수적 관점이 근거 없다는 점을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그 대신 백지영의 방송복귀가 불합리한 성적 차별을 개선시키는 훌륭한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추상적인 실보다 구체적인 득이 더 많은 경우다.

이지영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학력을 속인 사실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기회를 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학력을 정직하게 기록하게 하는 경계의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퇴진은 학력사회를 전제로 한 사회관계와 인간관계를 그대로 연장시킬 뿐이다. '대학도 못나온 주제에'라는 사회의식과 기회불균등의 전제가 확대재생산 된다. 그래서 제2, 제3의 신정아와 이지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드레퓌스 대위도 개인윤리차원에서 지고지순했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도 엄연히 간첩혐의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 혐의가 법률적 사실로 인정되는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기제가 작동했다는 판단이 에밀 졸라에게 있었고 간첩혐의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가치인 인간주의와 자유를 위해 혐의자를 옹호했다. 그리고 마침내 석방시켰다. 그 결과는 국가주의에서 자유로운 한 인간형을 만들어냈으며 그만큼 인류역사는 진보했다.

우리도 이지영을 복귀시킴으로써 실력과 무관하게 '간판'을 따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시간, 열정과 돈을 낭비시키는 학력주의 풍토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고졸이라도 방송프로그램을 훌륭히 진행할 수 있으며 최고 수준의 만화가도 될 수 있다는 구체적 사례들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부유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 과외를 통해 기득권진영으로 편입할 수 있는 명문대 입시제도와 오늘날의 과거제도인 고시제도를 넘어 실력으로 말하는 선진한국으로 우리가 갈 수 있다.

그런 사회로 가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 이지영의 <굿모닝팝스> 복귀라고 한다면 생각보다 매우 저렴한 비용이 아닐까 한다. 이런 정도의 비용이라면 종범의 죄를 다소 가벼히 하더라도 주범을 잡을 수 있는 '플리바게닝'(수사협조에 대해 죄를 감면해주는 미국식 제도)으로 여기는 실사구시적 관점도 필요한 일이라 본다.

태그:#이지영, #굿모닝팝스, #신정아, #이현세, #학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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