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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여성 팝 아티스트 하면 단연 '마돈나'를 떠올릴 것이다. 80년대 초 혜성처럼 등장해 신디 로퍼와 대결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해 90년대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 등 가창력 좋은 가수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둬내며, 2000년대 들어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녀.

국내 네티즌들은 그의 화려한 경력에 '마여사님!'이라 애칭을 붙이며 그녀가 걸어온 화려한 길에 존경을 바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83년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의 팝계를 휘어잡은 위력을 보면 그저 엔터테이너가 아닌 진정한 아티스트가 아닐까?

엔터테이너로서 반짝 스타 마돈나?

하지만 그녀는 대중에게 나타난 그 당시 길게는 5년, 짧게는 6개월의 생명을 지닌 그저 그런 아이돌 스타였고 반짝 스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시대에 등장한 신디 로퍼의 음악성에 밀려 그녀의 음악들은 대중성에서만 인정받았으며, 평단의 혹평을 받은 여가수였을 뿐이다.

그리고 첫 앨범 < Madonna >는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다만 클럽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2집 < Like a Virgin >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스타로서 군림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에 등장한 신디 로퍼의 음악성이 워낙 탁월하다보니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부분도 없지 않다. 또한 그다지 놀라운 가창력을 자랑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사실 마돈나는 학창시절 치어리더 발레 등을 하며 끼를 인정받았으나, 노래에서 만큼은 인정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가 도너츠가게 카운터에서 일을 하면서 'Alvin Ailey & Martha Graham'이라는 무용단에 들어가 춤을 추던 중 노래로 방향을 전환. 클럽의 인디 밴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면서 자신만의 곡을 만들기 시작한다.

클럽에서도 마돈나의 특이한 음색과 펑키하면서도 과격한 춤 실력을 주목 받아 마침내 1982년 Dj Mark Kamin에 픽업되어 'Everybody'라는 노래로 클럽에서부터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그 이후 가수로서 대중에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신디 로퍼와 세기의 대결 'True 전쟁'을 통해 라이벌을 숙청하고 독주하기 시작했다. 즉 평론가들이 말한 그녀의 운명을 역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엔터테이너로서 확실한 자리 매김을 했다.

그럼에도 역시나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며 여전히 아티스트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엔터테이너로서 성공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녀의 명석한 두뇌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주체적인 성과 뮤직비디오의 적극적인 활용

사실 그녀는 페미니스트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고 노래 'Like a Virgin'에서 '마음만 처녀 같으면 되는 것이지 몸까지 처녀일 필요가 없다'라는 노랫말로 여성들의 성적 해방을 선언하며, 페미니스트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이후 콘서트에서 그녀는 여전히 페미니스트로서 성적 해방과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을 백댄서들과 함께 몸소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누드집을 발간하며 자신의 섹스어필을 주도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을 내세워 여성과 남성들 모두를 만족시켜 주었다. 이것이 마돈나의 성공의 단초였다.

사실 1980년대 미국 문화는 70년대를 거쳐 조금씩 페미니즘이 태동하던 시기로 여성들의 해방과 하위문화가 대중들에게 추앙받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 코드를 마돈나는 잘 활용한 덕분에 성공을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마돈나 성공의 또 다른 원동력으로 뮤직비디오를 꼽을 수 있다. 1980년대 미국에선 MTV 개국으로 듣는 음악에서 탈피, 보고, 듣는 음악으로 바뀌었고, 이를 가장 잘 활용한 가수가 마돈나이다. 물론 마이클 잭슨도 뮤직비디오의 붐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뮤직비디오에서 노래뿐 아니라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그래서 어느 가수보다도 뮤직비디오를 이용한 가수가 마돈나라 할 수 있다. 가령 팝과 락, 댄스를 포함한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인 < Like A Prayer >에서 슬립 차림의 마돈나가 불타는 십자가 앞에서 흑인성직자와 키스를 하는 파격적인 화면이 그러하다.

즉 이제까지 남성중심과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 언제나 성적 수단이 되던 '여성'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페미니즘 성향을 내세우며 여성들을 만족시켰고, 더불어 스스로 자신의 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남성들을 만족시킨 셈이다.

그것은 뜨거운 감자로 논란이 되었고, 찬반양론을 떠나 마돈나가 대중들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돈나는 1980년대 새롭게 변화하는 미국의 문화에 편승해 그것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독자적으로 이끌어 신디 로퍼를 이기고 최후의 승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꾸준한 음악적 변신으로 거듭난 아티스트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엔터테이너로서의 모습이다. 즉, 그녀의 음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시기였으며, 그녀 스스로 음악의 깊이 보다는 부차적인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시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90년대 들어서 그녀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그녀의 파워는 여전했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가창력 있는 가수들의 등장은 그녀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 그녀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자 정면승부를 펼쳤다. 바로 음악적인 변화를 꾀했다. 결렬한 춤을 추던 그녀가 발라드와 R&B 장르에 도전한 것이다. 물론 그 사이 그녀는 발라드 노래를 수록했지만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1992년 영화 < League of their Own >의 주제가로 사용되기도 한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라는 히트곡을 내놓고 1993년에 발표된 < Erotica >와 1995년에 발표된 < Bedtime Stories >을 내놓으면서 일곱 번째 멀티 플레티넘을 기록하게 된다. 그리고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란 예상을 깨고 마돈나도 발라드와 R&B를 할 수 있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적 성숙은 무엇보다도 1998년에 일어났다. 영국의 테크노를 접목한 트랜스적인 요소가 강한 < Ray Of Light >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전 세계적으로 1500만장을 팔아치우며, 그를 평가 절하하던 평론가들도 걸작이라 말했다.

사실 첫 싱글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FROZEN'은 테크노에서는 드물게 발라드 곡이며, 테크노 음악인데 클래시컬하며 동양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또한 이 곡으로 유럽 전역에 1위로 오르며, 15년 동안 바라던 제 41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팝 앨범상, 최고 댄스 레코딩상, 단편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드디어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마돈나였다. 그 이후 2000년대 들어서 < MUSIC >을 내놓았고, 이 음반은 테크노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최고의 성공을 거둔 첫 싱글이란 타이틀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녀는 자신의 데뷔 초기로 돌아가 1980년대 디스코를 찬양하는 앨범 < Confessions On A Dance Floor >을 내며 전 세계 음반 시장이 불황임에도 10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리고 디스코와 테크노 결합을 시킨 첫 싱글 'HUNG UP' 은 그 상황에서 싱글이 500만장 이상 팔리며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며 20년간 팝계를 호령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80년대 데뷔부터 그녀는 줄곧 스스로를 변화시켰고, 선도해 나갔다. 아마도 그녀의 최대 라이벌은 그녀 자신이 아닐까. 앞으로 어떠한 앨범을 가지도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할지 기대해 볼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마돈나, #신디 로퍼, #뮤직비디오,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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