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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탐방 안내도
ⓒ 이수철
남북 분단의 아픔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겪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내가 어릴 때는 반공 방첩이라는 표어를 눈만 뜨면 볼 수 있을 정도로 반공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가 나타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 사건 중 하나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나타나 이곳 북악산에서 우리 군경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은 당연한 현실이었고, 그 이후 서울 성곽의 민간인 출입은 보안상의 이유로 전면 통제되었다. 40여년 지난 최근에 와서 1차로 숙정문에서 촛대바위까지 열렸고, 이제 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전면 개방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였고, 태조 4년(1395년) 한양에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도성건립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18.2km의 성곽을 만들었다.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고, 27년 후 세종이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을 함으로써 지금의 서울성곽으로 골격을 이루었다.

이후 260년간 숙종 30년(1704)까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원래 방어목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 구실을 못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하면서 서울 성곽에서는 큰 전투가 없었고 그래서 서울성곽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존되어 오던 서울 성곽은 1899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성곽 일부가 헐려나갔고, 일제강정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東小門)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총길이 18.2km 중 산지의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 성북동에서 와룡공원으로 들어오는 석문
ⓒ 이수철
오늘은 혜화문으로 오를까 생각도 했으나 같이 가는 일행도 있고 해서 지하철 혜화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하는 08번 마을버스를 타고(약 10분소요) 명륜동 종점에 내려서 와룡공원으로 올랐다. 종점에서 약 100여m 정도 오르니 공원입구가 나왔고, 인근 주민인 듯한 할머니들이 정자에서 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불과 100여 미터인데 세상은 달랐다. 시원한 바람과 풀내음이 순식간에 도심속의 복잡함을 떨쳐내고 내 온몸을 감싸주었으며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순간 느낄 수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름길 우측은 성북동 쪽에서 와룡공원으로 들어오는 석문이 있고, 아래쪽은 혜화문 쪽에서 성벽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 말바위 쉼터 이곳에서 본인 확인 후 입장이 가능하다.
ⓒ 이수철
와룡공원길을 따라 말바위 쉼터로 향하는 길가에는 때 아닌 명자꽃이 피어있었다. 명자나무 속을 헤집고 들여다보니 명자나무 열매가 큼직하게 달려 있어 꽃과 열매를 같이 감상할 수 있었다. 성벽을 따라 20여분 가니 말바위 쉼터가 나왔다. 여기서 신분증 제출하여 본인 확인을 하고 입장을 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서울성곽 방문은 하루에 6회로 나누어 입장을 하는데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이며, 1회차에 인터넷 접수 50명, 현장 선착순 접수 100명까지이다. 말바위 쉼터라고 해서 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그런 바위는 보이지 않았고, 말의 안장처럼 생겨서 말바위 쉼터라고 한다는 말을 동행한 사람들로부터 들었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 촛대바위 쪽 성곽위에 본 숙정문
ⓒ 이수철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북 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고 하며, 1396년(태조 5년) 처음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이곳으로 옮겼으며, 원래 숙정문은 사람들의 출입을 목적으로 지어진 문이 아니고, 서울성곽의 동서남북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처녀가 이곳을 3번만 찾아오면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의 기가 강하다고 하며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곳이라고 한다.

▲ 삼청각과 성북동 일대
ⓒ 이수철
숙정문에서 촛대바위로 향하는 길에서 우측 석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수 년 전만 해도 특별한 사람들만 출입 했었던 그 유명한 삼청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누구라도 출입이 자유롭지만 십수 년 전에만 해도 나 같은 민초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곳이다. 자연생태계 훼손이 거의 없는 성곽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촛대바위다.

▲ 촛대바위
ⓒ 이수철
촛대바위는 북악산 정상에서 보면 확실하게 촛대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윗부분만 볼 수 있다. 촛대바위의 높이는 약 13m에 달하며 바위 위에 지석은 1920년대 일제강정기때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쇠말뚝을 박았던 곳이다. 촛대바위 옆에는 전망대가 있어 서울시가지 전망하기에 아주 좋았다.

▲ 서울 성곽의 모습
ⓒ 이수철
서울성곽 답사는 현재 안내원의 인솔 하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요소요소마다 안내원의 자세한 설명으로 답사 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촛대바위를 지나 행렬은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곡장은 지나가고 있었다. 대열을 따르자는 생각에 후미를 따르니 성북동에서 와룡공원으로 들어오는 석문과 같은 문이 나왔고 이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성벽을 바라보며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안내원 바로 뒤에 작은 돌들로서 축조된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고 큰 사각형의 돌로 쌓은 것은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된 모습이라고 한다. 여기서 성벽을 따라 조금가다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섰다. 성곽을 넘어 들어서니 청운대였다. 청운대에서 잠시 휴식하며 간식을 먹고 주변을 조망했다. 백악마루(북악산의 정상) 봉우리와 멀리 삼각산(북한산)의 보현봉 봉우리와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 1.21사태 소나무
ⓒ 이수철
잠시 휴식 후 다시 성벽을 따라가는데 돌에 글을 새겨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는 공사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자 이름, 축조한 날자 등을 적은 것이었고, 이때도 공사 실명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성곽공사를 위해 조선 팔도의 각 지역의 사람들은 동원하였음을 돌에 새긴 글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 가다보니 길가에 상처 입은 소나무를 볼 수가 있는데, 이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의 무장공비 김신조(외 30명)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던 흔적이라고 했다.

이때 수령 200년이던 이 소나무는 15발의 총탄을 받았으며, 그때의 자국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상처가 남아 있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백악산(북악산의 정상)
ⓒ 이수철
청운대에서 백악산(북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울성곽 주변에는 으아리, 엉겅퀴, 금마타리, 바위채송화 등의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은 등줄기에 흐른 땀을 훔쳐 주어 산행 길에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었다. 북악산 정상에 오르니 표지석에는 백악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으로 일명 백악, 면악, 공극산이라 했으며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고 남산과 대치하여 북쪽에 있다하여 북악산이라 한다. 북악산 정상에서 조망은 인왕산, 삼각산(북한산) 등 사방이 막힘이 없다.

북악산의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길이어서 조심해서 내려가야 했고, 노약자는 창의문에서 출발하여 올라오면 오름길이 힘들기 때문에 홍련사 또는 말바위 쉼터쪽에서 탐방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벽 넘어 잦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큼직한 잦이 탐스럽게 열린 것도 볼 수 있었다.

▲ 사소문 중의 하나인 창의문
ⓒ 이수철
이렇게 해서 마지막 탐방지인 창의문에 도착했다. 서울 성곽에는 4대문이 있었고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彰義門)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는 북소문으로 '올바르게 하는 것을 들어나게 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북소문으로 불러오지는 않았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위치는 서울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이며,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만 했었고, 서울의 4소문 중에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태그:#와룡공원, #말바위 쉼터, #숙정문, #청운대, #백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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