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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길사
독일의 비밀병기, 하버마스를 넘어설 차세대 대표주자인 니클라스 루만(1927∼1998). 그의 대표저서가 출간되었다. 박여성이 번역하여 한길사에서 펴낸 <사회체계이론>(사회적 체계들: 일반이론의 개요)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 학자지만, 루만은 하버마스와 함께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이론가다. 루만은 하버마스와 커다란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유럽지식사회의 대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루만과의 논쟁으로 인해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기도 했다.

현재 하버마스가 그의 이론에 내재한 '전체성의 폭력' 내지는 '동일성 철학의 망령'으로 인해 예전에 비해 관심의 정도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면, 루만은 전혀 새로운 개념들과 그로 인한 새로운 관점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버마스의 이론을 소홀히 대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현재 독일에서는 루만의 체계이론이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의 저서가 계속 읽히는 것은 물론 그의 체계이론을 발전시킨 연구들, 체계이론을 소개하는 입문서들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도 그의 대표저서인 <사회체계이론>이 번역 출간됨으로써 루만의 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체계이론, 전혀 새롭고 놀라운 사회학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은 전혀 새롭고 놀라운 사회학이다. 먼저 루만 이론의 근원이 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오히려 자체를 관찰하는 '체계'가 그의 이론의 근원이 된다. 이는 분명 과거의 전통 이론과 커다란 차이점이다.

과거의 이론들은 모두 관찰과 인식의 전제로 관찰하는 주체를 설정했다. 그러나 루만 사회학은 주체를 설정하지 않고도 매우 체계적인 사회학을 구축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전통 이론을 전복하고 전혀 새로운 사회학을 보여준다. 기존 사회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건 매우 혁명적인 설정이다.

하버마스는 근대적인 주체를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에 대해 커다란 관심이 있었고, 반면 푸코는 더이상 근대적 주체의 수정에 매달리지 않고 근대적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럼으로써 근대적 주체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에 비해 루만은 이론적으로 근대적 주체를 분석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차원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의 새로운 개념들은 주체에서 해방을 꿈꾸는 매우 포스트모던한 개념을 제공해준다.

나아가 루만 사회학의 기반이 동일성이 아닌 '차이'에 있다는 점이나, 관찰에는 사각지대가 존재하며 커뮤니케이션은 불확실하다는 점, 기능적 분화가 사회를 해체시켜가고 있다는 점 등은 현대 철학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들이 이미 사회학적으로 구현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데리다나 들뢰즈의 철학을 연상하게 되며, 특히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 사회학으로 구현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실제로 루만의 사회학에는 근대 철학의 가정을 뒤엎는 발상들이 매우 많다.

루만의 이론은 근대적 주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이론이고, 동일성이 아닌 차이에 기반한 이론이며, 해체 철학의 사회학적 구현이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이론은 기존 사회학에서 볼 수 없었던 현대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열어준다. 이것이 루만 사회학의 혁신적인 점이며 또한 커다란 매력이기도 하다.

'뜨거운' 하버마스 VS '쿨'한 루만

루만 사회학을 이해함에 있어 하버마스와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고도 썩 괜찮은 접근법이다.

하버마스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지속함으로써 사회가 지향할 합리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에 반해 루만은 사회를 계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단지 우리는 사회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뿐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하버마스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사회를 계몽하는 도덕적인 책무를 사회학에 부여하지만, 루만은 현대사회를 알기 전에 도덕적인 판단이나 비판을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 나은 사회를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사회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개체가 합리적 이성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해지향적 행위로 간주하는데 반해, 루만은 사회체계를 성립시키는 요건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주장한다.

또 하버마스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할 합리성의 주체를 설정하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는 것은 주체가 아닌 사회체계이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완벽한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반면, 루만의 커뮤니케이션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하버마스는 '동일성'을 추구하지만 루만은 '차이'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버마스가 근대 프로젝트의 수정을 위해 노력한다면, 루만은 탈근대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버마스의 사회학이 '뜨겁다'면 루만의 사회학은 '쿨'하다. 그러나 뜨거운 관심은 새로운 구속의 올가미가 되는 반면, 쿨한 특성 아래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모색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에서 루만에 대한 논의의 계기가 되길 기대해

루만의 이론은 어떻게 현대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 커다란 매력이 있다. 그런데 현재 루만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이론이 보수적이라는 오해이다. 특히 하버마스는 루만의 이론을 보수적이라고 비판했고, 이것이 루만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의 사회학은 동일성의 폭력을 내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단히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양보하더라도, 그의 이론은 진보적으로도 보수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즉 얼마든지 진보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떠야 한다.

그의 이론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통합되어 위태로운 근대 사회를 벗어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모색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비로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루만의 '쿨'한 사회학은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뜨거운'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루만의 대표저서인 <사회체계이론>의 출간으로 인해 한국에서 루만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루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기대해 본다.

루만 체계이론의 기본시각

사실 루만의 이론은 어렵기로 악명 높다. 우선 그의 새로운 개념부터가 생소하고 난해하다. 그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끔찍할 정도'의 인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솔직히 그 난해함에서 있어서는 하버마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다.

루만의 대표저서인 <사회체계이론>의 전체 내용을 '상큼하게' 한 페이지로 요약 정리하는 일은 아직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독자의 이해를 위해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루만 체계이론의 가장 기본시각은 세계를 '체계'와 '환경'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의 체계는 자신의 환경과 단절된, 즉 환경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이다. 그는 체계를 크게 생물체계, 사회체계, 심리체계로 구분한다. 인간의 몸은 생물체계이고, 인간의 의식은 심리체계이며, 사회체계들은 회사, 매스미디어, 기자협회, 가족, 동창회 등을 포괄한다.

하나의 체계는 환경을 복합성으로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체계는 환경에 일어난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복합성의 환원 압력을 받게 된다. 즉 선택을 해야 하는 필연성에 놓인다. 그럼으로써 체계는 환경의 복합성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체계를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때 체계는 환경의 복합성을 감소하기 위해 자기준거적으로 행동한다. 이것이 체계의 전제조건이고, 나아가 이는 루만 체계이론의 기본가정이다.

또 환경이 복합성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비필연성(우연성, 우발성)이 발생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체계의 복합성이 증가할수록 체계의 비필연성도 증가하게 된다. 나아가 루만은 일생이란 비필연성의 집합체와 다름없다고 본다.

유기체가 세포를 생산하듯이, 사회체계는 커뮤니케이션을 생산한다. 루만은 사회체계의 최소단위를 커뮤니케이션으로 본다. 사회는 주체들의 집합도 아니고 행위의 집합도 아닌 것이다. 또 그의 사회학에는 주체가 설정되거나 주체들의 상호주관성이 창출된다는 설정이 없다. 루만에게 상호주관성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창출되는 것이지 주체를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그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완벽한 이해는 없을뿐더러 오히려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설정이다. 또 모두가 합의에 이르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루만은 근대 사회가 지나치게 통합되어 위태롭게 되었다고 본다. 또는 지나치게 통합으로 이끌어가려고 해서 위태롭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오히려 그는 서로 합의할 수 없음을 합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현대 사회에서는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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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니클라스 루만, #사회체계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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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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