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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피해자 유족인 송재문(64)씨가 공주시 왕촌 말머리재에서 위령제가 거행된 날 오열하고 있다.
ⓒ 송성영

7월 1일. 금강을 옆에 끼고 있는 충남 공주시 왕촌리 말머리재에 사람들이 모였다. 잡목 무성한 야산을 둘러본 60여명이 위령제단 앞에 모였다. 임시로 마련된 제단 앞에서 유족들은 오열했다. 속울음을 울고 소리 내어 울었다. 박옥희(74) 할머니는 제단 앞에 엎드려 일어서지 못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절을 하고 또 절을 했다.

지난 2001년 이곳 말머리재에서 탄피와 함께 일부 유골이 발굴됐다. 유골들은 30cm도 채 안 되는 깊이에 묻혀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종군기자가 쓴 학살 보도 자료를 근거로 수소문해 세상에 알린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와 더불어 공주 민주시민단체 사람들은 발굴 작업을 멈추고 다시 그 자리에 묻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머리재에는 한국전쟁 당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과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들이(700~1000명 추정) 무자비하게 집단 학살돼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령제에 모인 사람들은 그 유골들 위에 서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묻혀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위령제만 올리고 있을 뿐, 국가 차원의 발굴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마이뉴스> 보도가 나간 2001년 이후부터 공주지역민주시민협의회 사람들과 제노사이드 연구회에 의해 누가, 언제, 어떻게 학살을 당했는지 조사하는 작업이 조금씩 진행돼 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초순(인민군이 공주를 점령하기 직전)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이 말머리재에서 학살당했다는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피해자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 등을 근거로 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6월 30일과 7월 1일, 이틀에 걸쳐 '한국전쟁 전후 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주제로 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2007년 하계워크숍이 공주대에서 열렸다.

▲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7월 1일 아침 말머리재 기슭에 임시 제단을 만들어 위령제를 지냈다.
ⓒ 송성영

이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는 7월 중순부터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전국적인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본격적인 조사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 작업의 목적은 한국전쟁 전후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피해가 발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사건이 일어났는지 규명하는 것이다. 이번 사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확대 조사 작업의 토대가 될 것이다. 유족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실시하는 이번 조사 사업은 연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충남 공주시를 비롯해 경남 김해시, 경북 예천군, 전남 구례군과 영암군, 전북 고창군, 충북 청원군, 경기 화성군 등 민간인 집단학살지로 밝혀진 8개 지역을 선정, 한 지역에 5명씩 각각 조사팀을 구성했다.

▲ 6월 30일 '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주제로 열린 2007 제노사이드연구회 워크숍.
ⓒ 송성영

한국전쟁 전후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날 워크숍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학살됐는지 규명하는 다양한 논문과 증언 기록이 발표됐다.

지수걸 공주대 교수는 '해방 전후 시기 공주 지역 사회운동사'에서 말머리재에서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좌익수들과 보도연맹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일제시기에 발행됐던 신문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공주 지역에서는 1920년대 중반쯤부터 청년운동 내부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그때부터 새로운 청년조직이 결성됐고 그들이 지역사회 운동, 혹은 민족민중운동을 주도했다."

지 교수가 내놓은 1920년대 초기부터 해방 전까지 자료에 따르면 공주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야학 등을 통해 농민계몽 운동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각성과 애국애족심을 불러일으키는 연극단을 만들어 광주, 목포까지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의해 사상범으로 투옥된 이들은 해방 후 다시 공주 지역의 좌익운동을 이끌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이들이 한국전쟁 전후 좌익사범이나 보도연맹원이 돼 집단 학살됐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집단 학살당한 사람들의 사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정기 전남대 교수 역시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형무소 실태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일제 치하에 이어 다시 사상범이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일제하의 사상범은 그 이념에 관계없이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장악한 사람은 대부분 일제하의 사상범 출신이었다."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사람들 중에는 좌익 성향의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공주향토사학회원인 이걸재씨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보도연맹원 중에는 좌익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사회운동과는 무관한 일반인도 많이 섞여 있었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사람들 중에 좌익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시 면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보도연맹원을 좀 더 많이 가입시켜야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몇 명씩 가입시켜야 하는 식의 할당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좌익과 전혀 상관없는 가까운 친구의 이름까지 보도연맹 명단에 올렸다고 한다."

▲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와 보도연맹원들의 집단 학살지로 추정되는 말머리재. 2001년 이곳에서 탄피와 일부 유골을 발굴했다가 다시 묻어놓았다.
ⓒ 송성영

보도연맹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강성현 연구원은 '대전·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학살의 진상'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도연맹 가입 대상은 자수자였다. 즉 국가보안법 1조에서 규정하는 불법단체 즉 남로당, 민전, 전평, 전농, 민애청, 민학련 등에 가입된 사람들은 모두 자수 대상자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4조는 '그 정을 알고서 기타의 방법으로 방조한 자'까지 적용 대상을 무제한 확대해 거의 모든 사람이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중략) 그 무렵 지역지인 <동방신문>을 보면 '자수하면 포섭', '전향하면 관대히 용서', '자수하면 죄과는 백지' 등과 같은 온정적인 어투의 선전부터 '완전 개과천선을 요망', '미자수자는 적발, 단호 처단' 같은 위협적인 선전에 이르기까지 신분 보장 선전과 선무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 손주와 함께 위령제에 참가한 시민
ⓒ 송성영
"보도연맹이라는 이승만 정치권력의 기획 목적은 탈맹을 거친 충성스러운 반공국민의 육성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6·25 발발은 보도연맹의 최종 단계를 탈맹이 아닌 죽음으로 동원하는 양상으로 바꿔놓았다.

전쟁 발발이라는 외부 요인은 보도연맹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던 경찰의 보도연맹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보도연맹의 역작용을 우려했던 검경과 군 내부의 일부 강경인사의 입지를 강화했다.

보도연맹원은 더 이상 충성스러운 반공국민이 아니라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지하의 '빨갱이'들에 부화뇌동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됐다. 그 결과는 군경의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예비검속에 이은 대량학살이었다."

최정기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형무소 실태 연구'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이 전쟁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해방 이후의 정황들을 보면 정권 차원에서 이미 학살의 씨앗을 키워왔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최 교수는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된 좌익수들이 포로수용소나 다름없는 열악한 형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 탈옥과 폭동이 잦았는데, 당시 좌우갈등을 전쟁 상태라고 한다면 형무소는 포로수용소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한강 이남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수형자 학살이 이뤄졌다. (그러나) 어떠한 절차를 거쳐 학살이 진행됐는지, 명령권자가 누구인지, 특별한 지침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아직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이 없다."

이에 대해 강성현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대전형무소 학살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역시 군 쪽에서는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서) 송요찬 헌병사령관 소속 헌병대로 이어지는 명령 계통이 있었고, 경찰 쪽에서는 (백성운 내무부장관에서) 이순구 충남 경찰비상경비사령, 전봉수 공주경찰서장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이 학살을 기획, 예비검속, 수행했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공주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됐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날 워크숍에 참가한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가 이규성씨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당시 총살해 구덩이에 파묻은 사람이 15트럭이라는 얘기를 후에 전해 들었다. (중략) 트럭당 50~60명씩 실어 날랐다고 하니 적어도 700~900명쯤은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다."(<오마이뉴스> 2001. 6. 6.)

강성현 연구원은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이 펴낸 '조선인민은 도살자 미제와 리승만 역도들의 야수적 만행에 복쑤하라'를 인용하고 있다.

"살인 흡혈귀 미국 침략군대와 리승만의 살인군경들은 지난 7월 7, 8, 9일 3일 간 공주에서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했다. (중략) 이렇게 공주 일대에서 1천여 명의 애국자와 무고한 인민을 학살…."

조선인민군 전선사령부 문화훈련국에서 밝힌 집단학살 날짜는 강성현 교수와 공주지역민주시민협의회 사람들이 공주 지역 피해자들을 조사해 확인한 날짜와 크게 다르지 않다(7월 7일~9일 사이는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미군이 금강철교를 폭파한 13일 바로 직전이다).

▲ 피해자 유족인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 유찬종(72) 할아버지와 박옥희(74) 할머니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송성영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미군도 있었다

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는 당시 사진자료를 통해 미군이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에 개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에 미군들이 단순 개입했는지 아니면 조직적으로 개입했는지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노사이드연구회 워크숍 다음날인 7월 1일, 말머리재 집단학살지에서 위령제를 마치고 유족들과 함께 현장 답사를 떠났다. 현장에 도착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유족들의 눈물처럼 내렸다.

피해자들이 공주형무소로 끌려가기 전에 갇혀 있었다는 공주시 의당면 율정리와 또 다른 학살지로 추정되고 있는 여찬리 등을 답사하면서 피해자 유족인 유찬종(72) 할아버지와 박옥희 할머니의 증언을 들었다. 이곳 율정리 마을에서만 무려 19~23명에 이르는 학살 피해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트럭에 실려 가는 걸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여태 어디로 끌려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피해자 유족들은 57년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알고 싶다. 어떤 죄를 지어서 어디로 끌려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

57년, 반세기가 넘도록 골수에 사무쳐 있던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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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