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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용사 기념물에 바쳐진 화환
ⓒ 김상민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p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알지도 못하는
어떤 나라와
만나본 적도 없는
어떤 민족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우리나라는 경의를 표합니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물(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의 정면 바닥에 각인되어 있는 글이다.

▲ 헌사
ⓒ 김상민
이 기념물은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물이 완공된 직후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건립이 발의되어, 휴전협정 42주년인 1995년 7월 27일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함께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 헌납한 것이다.

19명의 군인 조각상, 50미터에 달하는 대리석 벽화, 한반도를 상징하는 둥근 연못 등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기념물은 워싱턴 기념비와 링컨 기념관 사이에 있어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들리는 곳이다.

육이오를 맞아 들러본 이 기념물 앞에서, 비록 육이오를 기념한 화환들이 걸려 있었지만, 정작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이 날을 알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육이오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외국인들에게 그저 한국전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참전용사들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한국전쟁이란 혹독하고 무자비한 전쟁이며, 그들의 기억 속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은 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가능케한 것이다. '육이오'가 우리에게 비극의 시작이라면, '한국전쟁'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희생을 통한 자유와 번영의 제공이리라.

육이오가 아니라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이 기념물 앞에서, 정체모를 비애감과 낯선 자의식이 뒤섞이는 경험을 하였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민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57년 전 미국과 유엔의 참전 군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이 제단에서, 나에게는 희생자들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인간적인 느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 화강암 벽화 - 컴퓨터로 세밀하게 음각된 사진들과 벽면에 반사된 군인상들이 겹쳐 보이게 된다.
ⓒ 김상민

오히려 워싱턴을 처음 와 보신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들렀던 지난 겨울, 어머니의 순진한 고백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퍼뜩 가자. 미안스러워서 못 있겠다. 사람들이 다 우리를 쳐다보는 거 같다. 꼭 내가 죄인이 된 거 같아서…."

어머니는 구경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발걸음을 돌리기에 바쁘셨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숭고한 전쟁을 치르다 산화한 유엔군과 미군들에게, 부모님 세대가 지고 있는 무의식의 채무감이 이렇게 갑자기 이국땅에서 환기된 것이다. 육이오 시절, 꼭 지금의 내 딸만 하였을 어머니가 동생들 손을 붙잡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미군과 유엔군 전사자, 포로, 부상자, 실종자의 통계치가 기록된 화강암 맞은편에 커다랗게 각인된 네 단어를 보면서, 어머니의 죄의식과 부채감(사상가 니체는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Freedom is not free"
ⓒ 김상민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댓가를 치르고서야 얻을 수 있는 숭고한 가치라는 말이다. 인류 보편적인 말이면서도, 아주 미국적인 말이다. 그들에 의해 지켜져야만 했던 민족, 그들에 의해 겨우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그 민족의 후손에게는, 오늘따라 어깨를 짓누르는 말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니까 그 댓가를 지불하라는 빚쟁이의 엄포처럼 들린다.

▲ 군인 조각상들
ⓒ 김상민

몇 십년이 지나 이라크전 참전용사 기념물이 세워질 때에도 미국은 여전히 이라크인들의 자유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했음을 기념물을 세워 영원히 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그 기념물에 참전국으로 새겨질 '코리아'가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느껴질 것이 두렵다. 이 끈질긴 자유에 대한 부채의 역사.

태그:#육이오, #625, #한국전, #한국전쟁, #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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