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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숙(가운데) 대한체육회 부회장은 지난 11일 “여성이라서 감독 선발에서 탈락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왼쪽)과 유승희 열린우리당 의원도 동참했다.
ⓒ 여성신문
[권지희 기자] 농구계의 '대모'로 불리는 박찬숙(48)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본지를 통해 여성선수들을 상대로 한 스포츠계 남성감독들의 성범죄 실태를 고발했다.

박 부회장은 지난 11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남성감독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뒤 반강제로 퇴출당하거나 성폭행의 충격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선수들도 있다"고 폭로했다.

그는 "어느 팀이라 말할 것도 없이 비일비재한 일"이라면서 "만약 남성감독들의 성범죄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여성선수의 죽음은 시간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은행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박 부회장의 이번 폭로는 최근 박명수(45) 춘천 우리은행 한새여자프로농구단 전임 감독이 소속팀 여성선수인 A(21)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된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남성감독이 소속팀 여성선수를 성폭행하는 것은 스포츠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몇년 전에도 농구 이외 종목에서 이름이 알려진 한 남성감독이 여성선수를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지만 '없던 일'로 덮어졌다. 가해자 감독이 "그래도 아이 운동은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선수의 장래를 인질 삼아 고소를 무마시켰기 때문이다.

이렇듯 범죄를 저질러도 덮고 가는 분위기이다 보니 감독들 사이에서 "애들한테 운동만 가르치느냐, 밤일도 가르쳐야지"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가 오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게 박 부회장의 전언이다.

박 부회장은 "아무리 억울해도 운동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 선수들의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이번에 피해를 당한 후배가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 역시 그대로 은폐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논란이 불거지자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지난 5월28일 신고전화 'WKBL HOT LINE'(080-077-0909)을 개설했다.

선수들이 감독이나 코치, 동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사생활을 침해당했을 경우 신고하면 해결해주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시민단체인 문화연대는 지난 1일 성명서를 내고 "그간 체육계 내의 폭력사건이 폭로되면서 핫라인이 설치됐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성폭행을 근절시키려면 가해자 영구 제명이나 구단 퇴출 등 협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이번 사건은 성폭력이 권력관계를 이용해 발생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며 "구단별로 감독과 코치 등 남성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등 의식전환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박 부회장은 "만약 여성감독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남성감독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겠느냐"며 여성지도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음은 박찬숙 부회장과의 일문일답.

- 성추행 사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21살의 나이 어린 선수가 용기를 가지고 고발했다. 내 딸이 22살이다. 농구계의 대선배로서, 또 엄마의 입장에서 나도 용기를 낸 것이다. 물론 고민을 많이 했다. 농구계에서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왜 없었겠나. 하지만 후배가 희생되는 것을 보고도 '안됐다'며 뒷짐만 지고 있는 것은 선배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특히 농구계에서는 험한 소리도 나왔을 법한데.
"구단측에서는 내가 감독 선발에 떨어져서 보복행위로 진정을 낸 것 아니냐고 말하더라. 또 나 때문에 우리은행 여성프로농구팀이 해체되면 책임질 거냐고 겁을 주기도 했다. 후배들도 내 편을 들면 자기 팀이 정말 해체될까봐 말도 못 꺼내고 있는 상황이다. 깡패집단이나 할 수 있는 협박 아닌가."

- 지난 3월과 5월 두 곳에서 감독 면접을 봤고 탈락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떨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감독 선발은 공개모집이 아니다. 인맥과 학연으로 알음알음 '감독 자리 비었는데 너 한번 넣어볼래' 이런 식이다. 남성끼리만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지원하고 선발되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다가 지난 3월 금호생명 측에서 감독 면접을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여성을 후보에 포함시킨 것은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탈락했다. 우리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는 '박찬숙 0순위', '드디어 여성감독 나오나' 이런 식의 보도를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남성 내정자가 있었더라. 구단에서 박찬숙의 여성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우리는 여성에게 감독을 제안하고 면접도 봤다'고 변명하고 구색을 맞추려고 말이다."

- 구단마다 원하는 감독의 기준이 있을 텐데, 자격 미달일 수도 있지 않겠나. 무조건 여성이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어느 구단에도 감독을 선정하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최소한 연대·고대는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것은 여성을 안 뽑겠다는 말과 똑같다. 현역시절 대학에 여성농구팀은 없었다.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만 감독을 시킨다면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이 될 리 만무하다. 학력이나 지도자 경험 등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난 1년간 열심히 공부했고 면접 당시 '팀 개편 제안서', '프로구단 코칭스태프의 역할구분' 등 연구자료를 제출했다. 하지만 달랑 이력서 한 장만 낸 남성 감독이 뽑혔다. 구단에 내가 탈락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놀림을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 여성감독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추행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성감독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여성감독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남성감독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가 없을 것이다. 여성선수들도 구단은 달라도 곤란한 일을 겪었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의논할 상대가 생기게 된다. 나도 선수시절 경기나 남자친구와의 관계 등등 말 못할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남성감독뿐이어서 얘기도 못하고 혼자 속병을 많이 했다. 지금이라도 여성감독이 탄생한다면 많은 여성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하며 능률적이고 확률적인 농구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님'끼리 스포츠계 말아먹는다
여성 지도자 '차단'... 남성 중심 로비문화가 '장벽'

지난 11일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박찬숙씨가 프로농구팀 감독 선임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에 제출했다. 이를 계기로 스포츠계의 여성지도자 부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동안 국내외 크고 작은 경기에서 여성 스포츠인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어도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밀실에서 모든 것이 이뤄지는 남성 위주의 '형님' 문화가 여성을 감독 자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시키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프로팀 중 여성지도자 코치 1명

실제로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지도자를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여성 프로팀이 있는 종목은 농구(6팀)와 배구(5팀) 2개 종목에 불과하다. 또 이들 팀을 이끄는 감독과 코치 22명 중 여성은 단 한명(우리은행 농구팀 조혜진 코치)이다.

실업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농구(5팀), 핸드볼(5팀), 축구(5팀), 하키(5팀), 소프트볼(2팀) 등 주요 종목의 여성감독은 국일정공 농구팀의 장현주 감독과 부산시 체육회 소프트볼팀의 김윤영 감독 2명뿐이다.

이 외에 44개 종목에 걸쳐 1859개의 여성 실업팀이 있지만 대한체육회는 이들 팀의 여성지도자 수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비인기 종목인 것을 감안해 여성지도자 수가 훨씬 적을 것이라는 예측만 할 뿐이다.

이에 대해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가운데 유독 스포츠 분야에서 남성지도자 독점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며 "스포츠 분야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여성지도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최근 우리은행 여자농구팀 박명수 감독이 성추행 혐의로 구속된 사건도 여성지도자의 부재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김성은 KT 여성하키팀 코치도 여성지도자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보다 체력적으로 다소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감독직을 못해낼 만큼은 아니다"라며 "같은 능력이라면 여성의 특수성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생리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여성지도자가 제격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스타에겐 감독직 안줘

지금까지 우리나라 스포츠팀의 감독직은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이들이 주로 맡아왔다. 선수로서의 자질과 감독으로서의 자질은 따로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 일반론이지만 우리나라는 그래 왔다. 차범근, 선동열, 허재가 대표적이고, 이밖에 수많은 프로·실업팀의 감독들이 스타 운동선수 출신이다.

하지만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여성 스포츠 스타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농구선수 박신자씨가 신용보증기금 농구팀의 감독직을 맡은 적이 있지만 잠시였다. 현재 탁구스타 현정화씨가 대표팀의 감독을 맡고 있지만,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실업팀의 감독직은 내주질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전문가들은 구단과 협회측 인사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돼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지도자로 발탁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고 입을 모은다. 소위 밥그릇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여성에게 틈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 선임이 되더라도 밀실에서 이뤄지는 '형님' 문화에 여성이 적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산시체육회 소프트볼팀의 김윤영 감독은 "한국 스포츠계에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수들을 지도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 필요하다"며 "선수 스카우트 문제나 훈련장소 섭외 등 거의 모든 사안들이 술자리 친분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미 탄탄하게 형성돼 있는 남성들의 관계 속에 극소수 여성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남성 중심의 스포츠계가 여성에게 틈을 내주지 않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정희준 동아대(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여성은 남성보다 약하고 지도자로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감독 선발에서 배제되고 있다"면서 "가령 코치가 된다 하더라도 여성코치는 선수들의 뒷바라지만 할 뿐,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성 팀의 감독 대다수는 선수 시절 B급에 속한 경우가 많다"며 실력 때문에 남성을 채용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여성지도자 기용 쿼터제로

전문가들은 외국처럼 쿼터제를 도입해서라도 여성지도자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윤영 부산시체육회 소프트볼팀 감독은 "남성 위주의 보수적인 스포츠계에서 여성이 지도자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부문에서 뒷받침이 필요하다"며 "스포츠계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법적·제도적 지원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희준 교수 또한 "미국 여자농구의 경우, 여성코치(80%)와 여성감독(30%)을 할당제로 정하고 있다"며 "초·중·고와 대학팀부터라도 쿼터제를 시행해 여성지도자에 대한 편견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평소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덕분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과 김원길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 등 몇몇 인사들은 이번 박찬숙씨의 감독 심사 탈락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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