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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시속에는 나의 삶이 배어 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가운데가 정규화 시인
ⓒ 이종찬
개나 돼지라도 와서
문을 열었으면 열었으면 하고
눈이 빠지도록
쳐다본 출입문

햇볕이란 놈이 살금살금 왔다가
그냥 가버렸다
잡아서 묶어 놓을 새도 없이
가버렸다

뒤를 이어 어둠이 어둠이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나를 흠뻑 적신 어둠이
이밤만이라도
서로 동무 삼자고 했다 - 정규화 '동무' 모두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부터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피를 세 번씩 투석하지 않으면 생명의 끈을 이어갈 수 없는 천형 아닌 천형을 지고 살아온 민족시인 정규화. 그가 이승을 떠났다. 향년 58세.

11일(월) 아침, 정규화 시인이 마지막 숨을 놓던 그 순간, 시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은 이승에서 마지막 가는 그 길을 마치 노숙자처럼 홀로 쓸쓸하게 보냈다. 언젠가 시인이 글쓴이에게 내뱉은 말 "간밤에 자다가 내가 죽어버려도 보름 정도 동안은 아무도 모를 것"이란 그 슬픈 한 마디가 유언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시인의 죽음을 그리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이날 아침 정 시인은 병원에 투석을 받으러 가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그날 오후 3시 30분께 평소 정규화 시인을 존경하고 잘 따랐던 이규석, 이상호 시인이 정시인의 사무실을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문은 평소와는 달리 굳게 잠겨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두 시인은 사무실 문을 억지로 따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정 시인의 몸이 싸늘하게 굳은 뒤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두 시인이 고인의 사무실을 찾지 않았더라면 뛰어난 한 민족시인의 죽음은 TV에 가끔 나오는 버림 받은 노인의 주검처럼 한동안 그렇게 잊혀질 뻔했다.

그래. 어쩌면 이날 아침에도 시인 곁에 "햇볕이란 놈이 살금살금 왔다가/ 그냥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잡아서 묶어 놓을 새도 없이"그렇게. 그리고 "뒤를 이어 어둠이 어둠이/ 강물처럼 밀려들었"는 지도 모른다.

그 어둠, "나를 흠뻑 적신 어둠이/ 이 밤만이라도/ 서로 동무 삼자고" 하기에 시인은 그대로 동무가 되어 어둠 속으로 떠나버렸는지도 모른다.

▲ 11번째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 이종찬
찔레꽃 찔레꽃 고향의 찔레꽃
동무들아 잊었는가
그 꽃을 잊었는가
지는 잎 애처로운 언덕에
가는 봄날 - '고향의 찔레꽃' 모두


고 정규화 시인. 시인은 1981년 문학사관학교라는 <창비>로 등단했다. 그때부터 시인은 <시와경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농민의 아들> 등 뛰어난 민중시를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는 폭압정권의 무기는 될 수 있었지만 돈은 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시인은 늘상 가난에 쪼들렸다.

80년대 중반, 마침내 시인은 서울에서 경남 마산으로 낙향한다. 이어 경남 진주에 있는 지방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를 맡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인은 최소한 식의주의 걱정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근데, 그런 시인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전증이라는 무서운 병마가 날아들었다.

병마 때문에 신문사에 사표를 쓴 그때부터 시인의 몸은 형편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마는 가정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방이/ 무너지는 소리로/ 가득"(무너지고 있다)했다. 밤낮이 바뀐 것으로만 여기며/ 밤새워 시를 쓰고/ 낮에 잠"(희망을 위하여)을 자는 일만이 되풀이 되었다.

피는 잎 보며 자랐는데
시드는 잎 보며 늙는구나
피면서 없던 말을
시든다고 하겠는가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내가 느낄 뿐이다
이미 쇠뜨기는 알고 있었다,
오는 것이 세월이더니
가는 것 역시 세월이라는 것을 - '쇠뜨기.1' 모두


그렇게 신부전증과 처절하게 싸우면서도 늘상 시의 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시를 들고 이 세상과 철저하게 싸웠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이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힐 때면 시를 썼고, 그 시를, 그 시를 쓴 시인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욕지거리로 맞받아쳤다.

▲ 고 정규화 시인
ⓒ 이종찬
"나의 시속에는 나의 삶이 배어 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선택한 방법이며 길이기에 서툴지만 확실하게 가고 있다"던 시인. 아직도 이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고,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그가 이렇게 홀연히 이 세상을 훌쩍 내던져버리다니.

시인 정규화는 1949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81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신작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에 '풀잎 1' '고향에서' '술노래' '한국돈'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농민의 아들> <스스로 떠나는 길> <지리산 수첩> <지리산과 인공신장실과 시> <다시 부르는 그리운 노래>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 <슬픔의 내력> <나무와 바람과 세월> <고향의 찔레꽃> <머슴새는 울었다> 등이 있다.

'경남작가회의' 초대 회장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제1회 '근로문학상', 제1회 농사랑 시사랑 아름다운 농촌시에 '피사리'가 뽑혀 '농림부 장관상'을 받았다.

문학평론가 김경복은 "그에게 시는 치명적 진실의 증언이자 자신의 불안을 달래고 죽음의 표지인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라며 "이제 시는 그에게 불이 되고, 칼이 되고, 약이 된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강희근 경상대 국문과 교수는 "시는 언제나 내포와 형식이 한가로울 때는 논의의 초점이 되지만 다급할 때는 논의의 표적에서 벗어나 있게 됨을, 정규화 시인은 몸으로 쓰는 시로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며 "몸은 그것이 실존으로 돌아올 때 몸 이상도 몸 이하도 될 수 없는 것임을 아울러 깨우쳐 주고 있는 정규화 시인의 시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진경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눈물"이라고 평했다.

▲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문인들
ⓒ 이종찬
우무석(48) 시인은 "고인의 장례를 민족문학인장 혹은 시인장으로 하고 싶다는 게 문단의 바람이지만 고인의 가족들이 가족장을 원한다"며 "그래도 장례식날 추모시와 시인의 대표시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덧붙였다.

고 정규화 시인의 장례식장은 동마산병원 영안실이며, 발인은 13일 오전 경남 하동 선영. 유족으로는 고 정규화 시인의 부인 최명순과 두 아들 연부, 연효, 딸 연호, 사위 최규환씨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동마산병원 영안실 : 055-290-5044


태그:#정규화, #사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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