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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에서 부터 4·13 호헌조치로 역동적인 한국의 민주역사를 눈으로 보았다. 5·18광주민주항쟁 7주년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했던 나는 바로 민중항쟁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눈물로 미사를 보면서 느낀 심정이었다.

우연히도 서울대와 감사원에서 내가 모셨던 이한기 원장(95년 작고)이 민심수습을 위한 총리에 지상 발령을 받고 있을 때 파견근무를 하면서 총리를 보좌했었다. 박 군 고문치사은폐로 부도덕한 정권에 총리를 보좌하던 나는 명동성당 농성과 군출동설과 6·29 진실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유신으로 주권을 뺏겼던 15년의 권력에 분연히 일어선 학생과 국민과 재야의 세력들이 똘똘 뭉친 6월항쟁은 필연코 국민 앞에 진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주권찾기 헌법개정이고, 민주화의 요구였다. 어쩌면 군부독재정권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거기에 박총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불꽃같은 죽음이 있었고 5공정권의 군대식 발상을 저지했다. 그것은 6·29선언에 적시한 바와 같이 국민에 대한 항복선언이었다. 6·29선언의 이면에는 재집권을 위한 두 가지의 복안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다.

4·19와 같이 혁명으로 가느냐 아니면 국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느냐 하는 양길에서 혁명이면 군부세력의 피해가 크고, 항복선언은 어쩌면 다시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택했다. 그리고 그 길을 안기부에서 언론의 여론몰이를 통해서 해냈다.

그러기에 알 만한 사람은 6·29가 아니고 '속이구'라는 평들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상세한 6월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1987년 6월을 생각하며 수필적으로 쓴 글을 다음에 붙인다.

1987년은 근현대사에서 민주화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대한 기점의 해이기도 했다. 15년 만에 대통령을 내 손으로 선출하겠다는 개헌요구와 내각제개헌 시도에 두 대학생의 죽음에 분노한 국민들의 항복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기로에 썼던 한 해였다.

그 해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 군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명수배자인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 당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당초 경찰의 발표는 의사의 양심증언으로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화장해 강물에 띄우며 "종철아! 잘가 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했다. 학생들은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항의데모를 계속 벌였다.

정국은 지난해부터 개헌문제로 여야가 대립 각을 세웠다. 국민들과 학생들은 직선제 개헌을 원했다. 그러나 5공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의 폐단을 이유로 내각제 개헌을 위해, 야당 총재와 의원들을 회유하며 포섭하고 있었다.

부도덕한 정부는 박 군의 고문치사에 반성은커녕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그러자 재야와 학생들은 전국 곳곳에서 박 군 추모와 개헌을 요구하며 정권을 규탄했다.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이 되던 날, 사제단은 명동대성당에서 추기경의 집전으로 미사를 올린다.

명동에 근무하던 나는 그간 추모집회와 개헌모임에 참여했다. 이날도 신자로 미사에 참석하여 추기경의 강론을 들으면서 지난 7년 전 광주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영령들의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미사가 끝나고 김승훈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당초 박 군의 고문치사에 관여했다는 두 경관은 주범이 아니고 3명의 경관이 따로 있다. 두 경관 가족에게 거금의 예금통장을 건네며 은폐를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진실을 밝힌 양심고백으로 사제단은 정의 앞에 사실을 발표한다."

이에 경찰은 사실을 부인했으나 3일 후에 3명의 경관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정부는 민심수습을 위한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하였다. 26일 총리에 지명된 이 총리는 "정치도 모르고 지병도 있다"며 거절했는데, 지상발령이 났다며 내게 전화를 해 댁으로 갔다. 그날 일정은 오후 3시에 임명장을 받고 6시에 이 취임식을, 7시에는 대국민 취임소감을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반기문 의전비서관이 잠시 부재 중으로 내가 대신 총리를 보좌했다. 총리는 "우선 박 군의 죽음에 대해 국민께 사죄하고 고문치사에 대한 진실을 밝혀 신뢰받는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 한다"고 했다.

민심수습을 위한 개각이었으나 정국은 '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6월항쟁에 들어가고 있었다. 6월 9일에는 연대 학생들이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중 이한열 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피에 맞아 중태로 응급실에서 산소마스크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정국은 박 군 죽음과 4·13 호헌조치와 은폐조작사건에 이어 이한열 군의 혼수상태로 인해 항의 데모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6·10항쟁이 시작된 명동성당은 민주화 메카로 농성에 참여한 시민과 학생들로 붐볐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과 퇴근 후에 '넥타이시위대'로 항쟁에 동참했다. 명동농성단은 '해방구'를 설정하여 대통령이 총리에게 해산을 명령했으나, 총리는 공권력 보다 성당과 농성대표와의 대화로 3회에 걸친 표결로 농성을 풀었다.

이어서 계속되는 시위에 밀린 경찰은 파출소와 경찰 차량도 불타고 있어 군의출동 당위성을 제기했다. 임박한 계엄령에 총리는 고뇌했다. 반보좌관과 나는 총리공관에서 혼미정국의 타개책을 총리께 건의하면서 군 출동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만약 군이 출동하면 88년 올림픽 개최가 어렵고 군과 국민이 반대할 것이다.

나는 군 출동에 긴장한 총리에게 만약 계엄선포에 따른 국무회의가 있다면 빨리 입원하시고 임원실로 서명 받으러 와도 절대 거절하라고 건의했다. 심지어는 계엄서명은 제2의 이완용처럼 역사에 오욕으로 남는다고 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타개는 직선제 개헌을 단행하고 민주화의 길로 규제와 양심수를 풀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 등, 노 대표와 협의하여 대통령에 건의토록 했다.

반기문 의전보좌관이 이 총리 추모문집에 당시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 하는 순간에 대통령 이하 그 누구도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오직 총리만이 군출동 반대와 직선제로의 개헌과 민주화의 방향인 6·29선언의 내용을 처음으로 언급한 총리"라고 썼다. 총리는 수많은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어쩌면 혁명으로 갈지도 모를 정국을 반보좌관과 나는 '발상의 전환'으로 과감하게 건의하도록 했다.

6·26평화대행진이 있었고 6·29선언이 있던 날 "오늘같이 좋은날 차(茶)는 공짜"라는 '가화다방'의 글귀도 있었다. 그날 5시에 노 대표는 "총리께서 저에게 힘을 주시어 제가 용기를 내어 결단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국민에게 항복 선언이었다. 정국은 선언으로 항의데모가 일순간에 사라졌으나 이 군의 생명은 위태롭다.

7월 5일 이 군은 27일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7월 9일 5일장을 치른 이한열군 장례행렬에 양김도 따르고 있었다. 시청 광장에 백만의 추모인파가 함께 한 거리제는 모진 군사정권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 시대의 불꽃인 박 군과 이 군의 죽음으로 얻은 승리의 날이었다. 6·29 선언이 없었다면 백만의 추도 인파가 이 군을 조용히 보냈을까. 한편, 혁명으로 갔다면 나라와 국민은 어디로 갔을까.

총리는 앞으로의 정치 일정에 중립내각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다. 지난 48일 동안에 혈당이 높아 국정수행이 어렵다며 사표를 내겠다고 했을 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만류했었다. 7월 12일 밤, 총리는 두 아들과 나를 공관으로 불러 이제 사표를 내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지금이 적기라고 동의하였다. 4개 장관의 사표 위에 당신의 사표를 올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대좌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뇨병이 그렇게 심하신 줄 몰랐습니다. 서리도 떼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그때 정치도 모르고 지병이 있어 불가하다고 했지요"라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공관으로 돌아와 바로 사택으로 귀가했다.

총리는 "하루가 백일 같고 한 달이 십년 같은 세월이었다"고 회고한다. 역사 앞에 최선을 다한 총리로 한때는 대통령 명령을 어기는 총리이기도 했다. 건국 사상 두 번째로 단명인 48일간의 험한 항해를 마치고 재상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이 총리가 감사원장 때도 보좌하면서 내가 지지하지 않은 정권의 기관장을 보좌하면서 혹, 역사에 오욕의 한 페이지를 남기면 어쩌나 노심초사했었다. 다행히 건의를 받아들이고 역사 앞에 진솔했기에 감사한 마음이다.

함께 총리를 모셨던 반 보좌관은 유엔사무총장으로 분주하다. 12년 전 선산에 잠들고 있는 총리와 역사에 희생된 '시대의 불꽃'인 박 군과 이 군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6월이야기 공모 글입니다.

지금까지 1987년 6월의 역사이야기는 모두가 민주화 투쟁을 하던 인사들의 투쟁사였다. 나는 지난날 정부에 잠깐 몸담았지만 그러나 민주화대열에 함께했었다. 천정연 임원으로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화 투쟁에 함게하면서 군사문화 청산을, 그리고 62년의 분단을 허물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대열에 섰었다. 우연히 민심수습개각에 지인인 총리를 보좌하면서 6월항쟁 역사의 한가운데 정부편에 서 있었다. 88올림픽을 담보로 또한 4·19와 같은 혁명기운에 반짝게엄을 저지하는데도 직언으로 보좌했다. 다시 반복되지 않은 역사를 꿈꾸며 12월 19일 다시 한 번 국민의 위대한 승리를 위해 매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태그:#6월항쟁, #이한기,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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