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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도중 갑자기 나타난 '아! 나의 조국'. 이 사진은 1999년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 고명진


6월만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사진, '아! 나의 조국'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부산 문현 로터리에 그야말로 '찰나' 등장했던 주인공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언론사들이 수차례 찾아 나섰지만,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장(56)의 아쉬움도 컸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사진기자로서의 '삶'을 관통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기자들은 시위대 뒤쪽에 있었지만, 나는 그들과 반대편에서 위치를 잡고 있었다. 당시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혼탁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선 시민들을 상징하는 순간을 잡아보자. 지랄탄 연기가 퍼지는 순간 시민들의 모습을 찍어보자. 그래서 반대쪽에 있었던 건데, 태극기가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딱 한 커트 찍었다."

▲ 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장
ⓒ 이정환
- 그 순간, 어땠는가.
"아… 그건, 정말… 정말 전율을 느꼈다. 셔터 누르는 순간, 내 평생의 특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구나, 내가 사진기자구나. 사진기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만 이 사진을 당시 신문에 싣지 못했다. 서글펐다. 자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진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큰 것 같다.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 사진이다."

물론 저절로 특종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진기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8년이 걸렸고, 8번 직장을 옮겨 다녔다. 은행을 다녔는가 하면, <선데이서울> 등 주간지도 거쳤다.

하지만 고명진 국장의 목표는 오로지 종합일간지 사진기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있어야 할 현장'에 있고 싶다는 것.

6월 10일, 바로 그 현장, 신발에 흥건했던 핏물

특히 "80년 광주 항쟁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두고두고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그러다 마침내 1982년, 고 국장은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 '명함'을 손에 쥐는데 성공한다.

"1984년에 선배가 낸 사진집 '얼굴'을 접했다. 취재하면서 찍은 얼굴들의 기록집. 바로 이거란 생각이 들더라. 그때 광주 항쟁 당시 사진들, 과연 우리 시각으로 남긴 사진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물론 말도 못하게 열악한 조건이었다. 들어가면 죽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 시각'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부터 시작했다. 우리 기억은 우리 손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사회부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꼭 나가야 하는 시위 현장'이라고 데스크를 설득했다. 마지못해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현장에서 편하게 취재했다. 신문에 꼭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으니까."

심적 부담은 없었을지 몰라도, 신체적인 '부담'까지 피하기는 어려웠다. 극도로 격렬한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면서 "입원 많이 하는 기자"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1일 자 <한국일보>보도에서 '고명진'이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 당시 고명진 기자 부상 소식이 실린 1987년 6월 11일자 한국일보 기사
ⓒ KINDS PDF
전국 22개 지역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6·10 국민대회'는 경찰의 통제로 열리지 못했거나 일부 준비인사들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으며, 대회장에 가려는 군중의 시위가 곳곳에서 10일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중략… 을지로·태평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민가협 회원 박금순(56) 이금선(50) 박희애씨(50) 등 3명, 20대 청년 1명과 본보 사진부 고명진 기자(36) 주간사진부 김건수 기자(31)를 비롯한 취재기자 2명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 때 전경들이 시위대에 포위당할 것 같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사과탄 터뜨리는 것이었다. 6월 10일, 바로 그 날이었다. 한국은행 앞이었는데, 시위대와 전경 중간 지점에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느낌이 이상하더라. 신발을 벗으니까, 피가 흥건했다. 파편이 신발을 뚫고 들어와 발에 박혀 있더라. 나중에야 알았다."

'기자 출입금지'였던 건물 옥상에서
방독면에 붙인 안경알 때문에 굴렀던 언덕까지


고명진 국장에게 프린트해 간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모두 "사진 촬영 방해를 전담하는 경찰들에게 맞아"가면서, 혹은 "어용 보도하지 말라"는 시위대의 야유를 참아가면서 '고명진 기자'가 남긴 현장 기록들이었다. 그리고 1987년형 '현재'가 아닌, 2007년형 사진 설명을 부탁했다.

▲ 1987년 6월 15일, 고명진 국장이 촬영한 '학우의 분노'. 그 해 세계 보도사진전에서 3위에 입상했다
ⓒ 고명진
[사진 1] 1987년 6월 9일,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는 학우 소식에 학생들의 눈은 뒤집혔다. 6월 15일, 연세대생들은 학교에서 '최루탄 추방 궐기 대회'를 갖고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한다.

이한열군 사망은 당시 시국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경찰의 폭력적 시위 진압방식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항쟁 대열에 동참하는 서민들이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5일, 연세대생들의 '최루탄 추방 궐기 대회'를 담은 고명진 국장의 이 사진은 당시 정세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정태원 선배(당시 로이터통신 기자)가 찍은 사진 한 장(이한열군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진)이 사람 마음을 다 움직였다. 4·19 당시 김주열군 사진과 똑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만약 그 사진이 없었다면, 6월 항쟁은 그만큼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 다음부터 경찰은 수세적으로 시위에 대응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함부로 연행하지 못했고, 분노한 학생들은 완전히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태였다."

▲ 1987년 7월 9일, 시청 앞 광장
ⓒ 고명진
[사진 2] 그리고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열렸다.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인파는 엄청났다. 군부 독재 '종막'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임을 상징하는 사진. 이 사진에는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가 숨어 있다고 한다.

"당시 정부에서 국내 기자들이 옥상에 올라가는 것을 금지했다. 왜? 어마어마한 군중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으니까. 사진은 지금의 국가인권위원회(서울 무교동) 건물 옥상에서 찍은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국내 기자로는 유일하게 나만 촬영했던 걸로 안다. 널리 알려진 또 한 장의 사진은 외신 기자가 찍은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 하면, 사연이 있다. 건물 근처에서 기회만 보고 있는데, 외신 기자가 건물로 쑥 들어가더라. 헌데 나이 든 경비 분들이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거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가서 그랬다. '당신 큰 일 난다. 왜 올라가게 했느냐'고 하니까 '영어를 못 해서…'라고 하더라. '오케이, 그럼 내가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 가방만 맡겨 놓고 올라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카메라로 '팍팍팍!' 찍고 내려왔다."

▲ (왼쪽)1986년 4월 30일 중앙대 시위 현장 (오른쪽)1986년 5월 20일, 서울대 이동수군 분신 장면. 당시 한국일보 권주훈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국내 보다 외신을 통해 먼저 알려졌다
ⓒ (좌)고명진 (우)권주훈
[사진 3] 그만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고명진 국장의 당시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중앙대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에 맞아 뒹굴고 있는 경찰의 모습을 담은 사진. 고 국장은 이 사진을 나중에야 공개했다고 한다.

"그 때 바로 내놓지 않았다. 이용당하기 딱 좋은 사진이었다. '이동수군 분신 사진은 아예 (보도사진전) 심사도 하지 말아라'는 분위기였으니까. 나에게는 씁쓸한 사진이다. 지금이야 당시 경찰들의 어려움을 알려주는 가치가 있지만…. 이 사진을 찍다가 언덕에서 굴렀다. 그 때 방독면에 안경알을 붙이고 시위 현장을 촬영했는데, 눈과 안경알 거리가 있으니까 착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분명히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앞이 내리막이더라. 몇 바퀴를 굴렀던 기억이 난다."

그 자리에서 바로 '우리'가 당신들의 얼굴을 찍었다

▲ (왼쪽)1987년 6월 시위 현장 사진 기자 모습 (오른쪽)1987년 6월 18일 명동성당 연좌 시위
ⓒ 고명진
[사진 4·5] 고명진 국장의 '현장'에는 현장을 기록하는 동료 기자들도 포함됐다. 그는 "현장 취재 기자들을 참 많이 찍었다"면서 "그 자리에 바로 우리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 국장을 현장으로 이끈 어느 선배의 '얼굴'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1987년 6월 18일 명동성당. 힘껏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앞에서, 가급적 "그들의 얼굴 중심으로 현장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바꿀 사람들"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 20년이 흘렀다. 6월은 끝난 것일까.
"지금도 6월은 진행형이다. 그 때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권력 기관에 들어갔다. 그들이 완성을 시켰는가. 우리 사회에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있는가? 원칙과 상식을 통하게 만들 수 있는 집단조차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중동 때문에? 언론 때문에? 그래, 문제 있다. 하지만 언론을 대하는 그들의 논리 역시 치졸하지 않나.

6월 항쟁의 목소리는 바로 민중의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다수의 의견이 무시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게 49% 밖에 안 된다면, 2%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득해야 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옳으니까 가야한다고 밀어붙인다. 이것이 민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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