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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하는 여성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청년. 그 청년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노하우를 전달한다. 물론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다. 이들 때문에 그는 마침내 사랑을 시작한다. 소설이자 영화 <전차남>의 내용이다.

사람들의 선의가 사랑을 일구어 준 좋은 사례다. 사람들의 지혜가 모여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집단 지성은 집단 감성과 연결되어 있다. 의미 있는 일에 참여한다는 심정은 집단적인 지성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위키디피아'가 대표적인 예다.

특정한 주제에 대한 백과사전을 만드는 일은 참으로 보람되는 일이다. 그 백과사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윤리적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이러한 선의지는 좋은 결과물로 나타났다. 오로지 돈을 위해 만들어지는 백과사전보다도 훨씬 탁월한 백과사전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위키디피아의 원리를 경제적 수익모델화 시키려는 것이 '위키노믹스'다. 위키노믹스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와 '이코노믹스(economics)'의 합성어다. 대규모 협업(mass collaboration)에 경제적 수익 창출의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경영 조직 차원에서는 내부의 가용자원만이 아니라 외부의 가용자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크라우드소싱과 통하는 면이 있다.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은 군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합성어다. 불특정의 사람들에게서 능력을 빌려오는 셈이다. 물론 그들을 단순히 군중이나 네티즌이라고 묶을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는 비전문가/전문가의 경계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과 엘리트는 인터넷 시대에 구분이 되지 않는다. 대학원생, 컨설턴트, 수학자, 물리학자 등 각종 전문가도 인터넷을 통해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리눅스는 명령과 통제 없이 전 세계 이용자들이 자발적으로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시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참여는 수익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스스로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강한 즐거움과 성취감도 있었다.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금 매장 지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회용 이벤트성 제안의 수집과 축적은 위키노믹스의 본령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금이 아니라고 해도 언제든지 있어왔기 때문이다.

위키노키믹스의 핵심은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점차 사람들의 집단적 지혜로 해결하거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점인데 사람들의 자발성과 참여는 겉 현상일 뿐 그 현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심리는 선의지, 봉사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그 대신 물질적 대가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때로는 대가 없는 행동에 스스로 보람을 느낀다. 물론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만족과 보람도 하나의 대가라고 억지를 부리기는 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이 위키노믹스다.

구구는 <당신은 왜 가난한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되는 이들의 자원이다. 부자들의 먹이가 함유된 진흙이다"라고 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선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한 먹이가 된다. 위키노믹스는 참여자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밥은 제대로 먹었는지 병은 걸리지 않았는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만약 오프라인의 조직에서는 적어도 자신의 소속 조직원이라면 이 정도는 챙겨야 하지만 위키노믹스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문제가 된다.

예컨대 10년을 인터넷 매체에서 활동해도 그 참여자에 대한 관심은 없다. 물론 그 참여자가 만든 콘텐츠는 양질의 내용을 구성해 이익을 창출한다. 결국 위키노믹스의 조직에서는 조직구성원에 대한 지출 비용은 없지만, 양질의 결과물은 상당한 수익을 남긴다.

위키노믹스는 선의지가 충만한 이들의 활동을 유도해 그들이 만든 콘텐츠로 새로운 상품을 파생시키면 된다. 물론 그 상품에 대한 저작권은 1차 생산자에게는 없다. 즉, 위키노믹스의 등장은 새로운 노동착취의 시대가 도래를 의미한다. 그 착취는 선의지, 자율성, 참여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이럴 때 한 가지 떠오르는 명제가 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언제나 수익을 위한 먹이가 된다. 자발적 참여라는 웹2,0, UCC, UGC 열풍의 허구성이다. 물리적 협업 없이 성공 없는 시대가 다가온다는 말이 솔깃하지만 비극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위키노믹스를 가리켜 '소유'와 '권리' 대신 '개방'과 '공유'를 기본 원리로 하는 신경제가 도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또하나의 소유와 권리의 집중을 의미한다. 참여자들의 소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말 자체를 꺼내는 걸 꺼리는 디지털 참여자들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것이 위키노믹스다. 위키노믹스가 내세우는 네 가지 즉 개방성(Being open), 동등계층 생산(Peering), 공유(Sharing), 행동의 세계화(Acting globally) 등도 마찬가지다.

소수가 만드는 이코노믹스 시대가 저물고 대중 혹은 다중이 만드는 위키노믹스 시대가 오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데 여전히 소수의 영향력은 독점적이다. 특정 주제나 활동 범위를 선택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본 집중 위에 있는 소수다. 일정한 자신들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는 소수 말이다. 이러한 목적의식은 위키노믹스에서는 자본의 수익성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지혜가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중이 소수에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디지털 집단 지성이 무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 과연 집단 지성은 천재를 이길 수 있을까? 무엇보다 평생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천착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디지털의 한계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노마드처럼 이동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논의가 일방적으로 정주민을 착취자로 규정하지만, 분명 정주민의 생산적 역할도 있다.

어느 인터넷 신문 대표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채택된 기사 한 건 당 천원의 원고료가 지급된다. 이걸 따먹으려고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천 원짜리 기사에 채택되기 위해 격심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밥은 먹는지 기사를 만들기 위해 교통비는 어떻게 마련하는지 관심을 결코 갖지 않는다. 이렇게 원고료가 지급되는 곳은 다행이다. 누리꾼들의 창작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하는 곳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이 인터넷 신문은 자율적이다. 어느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소속도 되어 있지 않은 자율 지성들의 향연이다. 상호 소통성과 참여라는 아름다운 명분은 추악한 착취의 이름으로 현실을 지배하기 일쑤이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보낸 글입니다.


태그:#위키노믹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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