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수 아마추어를 고집하는 올림픽 축구

올림픽 축구는 1950년대 이후 그 규모나 위상이 월드컵에 비해서 상당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올림픽 축구 대회에 참가팀의 수준이 월드컵에 비해서 떨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철저하게 프로 선수의 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올림픽 정신 때문이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프로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종목에서 아마추어 대회는 프로로의 진출을 위한 디딤돌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아마추어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이후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프로의 길)에 접어들기가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프로는 이미 자체적으로 선수를 선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뛰어난 기량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기 위한 스카웃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는 일찍 프로의 무대에 뛰어들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축구의 경우는 이미 상당히 프로화가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유명한 프로 구단이 아마추어 대회를 거치기 이전부터 뛰어난 선수는 거의 다 프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소련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프로의 존재가 원천 봉쇄되고 있었기 때문에 축구에서 막강한 전력을 아마추어 팀이 보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냉전 기간 동안 동유럽의 축구는 올림픽에서 정상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월드컵에서 절대 강자로 떠오른 브라질이 올림픽에서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설명이 된다.

# 11개국이 참가한 초라한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경기는 1912년 이래 가장 적은 규모의 축구대회가 되었다. 총 11개 나라가 참가했는데(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서독, 영국, 호주, 미국), 당시에 유럽과 남미의 대부분의 축구 열강이 불참을 선언하였고, 축구의 불모지로 여겨지는 아시아에서 4개의 나라가 참가할 정도로 역대 대회에서 중량감이 상당히 떨어지는 대회가 되었다.

이 대회는 프로의 참여가 공식적으로 허용된 월드컵이 화려하게 성공을 거두면서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절감된 측면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헝가리 혁명(1956년 10월 23일)이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헝가리는 전쟁이 끝나면서 소련에 의해서 공산화가 진행되었는데, 스탈린 사후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헝가리 민중들에 의해서 혁명으로 크게 타올랐다. 이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견고했던 ‘철의 장막’을 무너뜨리기 위한 자유를 위한 운동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바로 이 헝가리 혁명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서방의 국가들은 소련과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자유를 위한 헝가리 민중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남반구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리는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는 소련의 만행에 대해서 다수의 국가들이 참가를 거절하면서 헝가리 민중들의 죽음에 대해 동참했다.

물론 이러한 불참이 전적으로 헝가리 침공에 저항의 의미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참한 나라들은 나름대로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세대들을 위하여 초라하게 줄어든 참가국이 자유를 짓밟은 만행에 대한 항거였다는 설명은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소련, 올림픽 정상에 서다

소련은 4년 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해서 첫 번째 라운드에서 불가리아에게 연장전 승부 끝에 2-1로 이기고 16강에 진출했었다. 16강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0-3으로 뒤지다가 5-5로 극적인 무승부를 이룬 소련은 재경기에서 1-3으로 패하고 탈락한 바 있었다.

1956년, 다시 한 번 올림픽에 도전하는 소련은 4년 전에 상대했던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비록 프로 선수가 빠졌다고 하지만 서독과 영국의 존재가 상당히 거슬렸을 뿐, 나머지는 그다지 걱정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련이 우승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은 훗날 전설이 되어버린 야신이라는 골키퍼가 그들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11월 24일, 첫 번째 라운드에서 월드컵 챔피언 서독을 만났다. 소련은 프로 선수가 빠진 서독에게 2-1로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소련의 8강 상대는 아시아의 인도네시아였다. 이 경기는 당연히 소련의 승리로 예상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의 수비는 소련을 당황케 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소련이 공격을 하게 되면 한명의 스트라이커를 제외한 열 명이 페널티 지역에 들어가서 수비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작전은 성공했고 소련은 인도네시아와 0-0의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강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소련이 강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의 밀집수비를 뚫어야 했다. 결국 소련은 재경기에서 Sergei Salnikov가 두 골을 넣는 활약에 힘입어 4-0으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소련의 준결승 상대는 4년 전에 연장 승부 끝에 이긴 바 있는 불가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영국(Great Britain)을 6-1로 격파하며 준결승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사기가 올라 있었다. 이 경기에서 소련은 수비수 Nikolai Tisjenko가 쇄골뼈 부상을 당했지만 당시에 선수교체의 룰이 없었기 때문에 붕대를 감고 뛰는 투혼을 발휘했으며, 이러한 정신력이 발판이 되어 소련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승리하고 결승에 올랐다.

불가리아는 연장전에서 먼저 선취골을 넣었지만 소련의 Eduard Strelzov와 Boris Tatushin에게 연속으로 골을 허용하며 역전패하고 3-4위전으로 밀려났다. 불가리아는 3-4위전에서 인도에게 3-0으로 승리하고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소련의 결승전 상대인 유고슬라비아는 4년 전에 소련을 재경기 끝에 이긴 뒤 끝내 결승에까지 올라 스웨덴에게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한 동유럽의 강호였다. 또한 이들은 2년 전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8강 토너먼트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었다. 월드컵에서 빈곤한 득점력을 보여주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이번 대회에서 미국을 9-1, 인도를 4-1로 누르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12월 8일, 10만 명이 입장한 올림픽 파크에서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결승전이 벌어졌다. 후반전에 소련의 Anatoly Ilyin의 헤딩 골은 득점으로 인정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Zlako Papec의 골은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 결국 소련이 1-0으로 승리하고 올림픽 정상에 등극하였다. 유고슬라비아로서는 세 번의 연속 준우승(1948년, 1952년, 1956년)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 대회는 비록 그 규모나 중량감은 역대 다른 대회들이나 월드컵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전설적인 한 선수가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소련의 수문장 레프 야신이었다. 오늘날 월드컵에서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야신상’은 바로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블로그(http://kr.blog.yahoo.com/apache630_in)에도 올립니다.

2007-05-28 11:1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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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축구 소련 야신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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