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심사위원장 스티븐 피어스(왼쪽에서 여덟번째)와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왼쪽에서 세번째) 등 다른 참가자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68년 5월 17일, 칸의 팔레 데 페스티발이 영화인들에 점령됐다. 영화인들이 팔레 데 페스티발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물론 당연하다. 그러나 39년 전 이날은 달랐다. 팔레 데 페스티발을 사령부로 만든 영화인들은 축제를 전쟁으로 탈바꿈시켰다. 68혁명이었던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뤽 고다르 등 젊은 혈기의 감독들은 68혁명으로 프랑스가 마비된 가운데 '칸에서 영화나 즐기는, 한가한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며 거리에 나선 학생, 노동자들과 연대할 것을 주장했다. 다음날인 18일 심사위원장이었던 프랑스의 좌파 소설가 앙드레 샹송은 영화제 중단을 공식 선언했고 루이 말, 로만 폴란스키 들은 심사위원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알랭 레네, 클로드 를루슈 등 감독들도 영화 출품을 철회했다. 거리와 연대하기 위해서였다. 1968년 5월 10일 개막한 칸 국제영화제는 이로써 일주일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세상을 향해 열린 창' 칸 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시간 속의 칸 영화제>를 연출한 끌로드 미셸 위원장.
ⓒ 이훈규
세계에서 가장 관능적인 영화제, 가장 화려한 영화제로 불리는 칸 국제영화제를 영화라는 문화의 옷을 입은 '허영'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이유다. 영화와 함께 칸 영화제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했다. 칸은 영화를 알리고 배우와 감독과 관객이 만나는 자리인 동시에 사회문제를 소리높여 외치는 공간이기도 했다. 지난 16일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개막작으로 힘차게 문을 연 칸 영화제는 올해 60주년, 이른바 환갑을 축하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등 세계가 경외하는, 총 25개국 35인의 감독이 '영화관'을 주제로 각자 3분짜리 단편영화를 연출했고 이것은 <그들 각자의 영화(To Each His Own Cinema)>라는 제목으로 영화제 60주년 기념작으로 지난 20일 세 차례에 걸쳐 소개됐다. 그러나 영화제 개막 직전 질 자콥 조직위원장이 밝힌 바와 같이 '60주년을 기념하지 않는 60주년'에 충실한 행사들이 은근히 개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세계를 향해 열린 창으로서 칸 영화제를 돌아보는, 크고작은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 이틀 째인 지난 17일 이 중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팔레 데 페스티발 2층 앰버서더 살롱에서 소개된 다큐멘터리로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산하 공연예술 노조의 끌로드 미셸 위원장이 연출한 <시간 속의 칸 영화제>가 그것이다. <시간 속의 칸 영화제>는 칸을 대변하는 '관능'이 아닌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전후인 1946년 5월 블륌-비른 조약에서 다큐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블륌-비른 조약은 프랑스에서 미국영화 상영 제한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프랑스 영화를 13주 중 4주에 한해 상영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미국이 프랑스를 나치에서 해방시켰다는 명목 아래 강제된, 이른바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 제1회 칸 영화제가 개최됐으며 10월 25일 프랑스 영화를 지원할 목적으로 프랑스 문화부와 재경부 산하 기관인 프랑스국립영화센터(CNC)가 설립되는 것으로 프랑스 영화의 부흥을 알리고 이듬해인 1947년 노동총동맹의 지휘 아래 노동자들이 무보수로 팔레 데 페스티발 착공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칸이 노동자들의 땀으로 시작됐음을 강조하고 있었다. 다큐 속의 프랑스전력공사(EDF) 노동자는 말했다. "베니스도 하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뭐냐고 생각했지. 칸은 우리가 만들었어!" 68 혁명에서 <펄프픽션>까지
 칸영화제 60주년 기념포스터
재정 문제로 칸 영화제가 개최되지 못한 1948년 1월 4일 프랑스에서는 불-미 영화 불평등 상영 조약인 블륌-비른 조약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어진 9월 시위의 여파로 프랑스 영화 상영을 4주로 제한했던 항목이 5주로 늘어나고 미국영화 상영을 제한하는 쿼터제가 회복되는 등 블륌-비른 조약은 수정됐다. 1949년 마침내 팔레 데 페스티발이 준공됐으나 1950년에도 재정문제로 영화제는 개최되지 못했다. 1946년에 시작된 칸 영화제가 2007년인 올해에 이르러서야 60주년을 기념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한편 칸 영화제를 상징하는 황금종려상이 제정된 것은 1955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6년 칸은 외교적 스캔들에 휩싸이고 만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말살정책을 고발한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밤과 안개>가 독일 정부의 압력으로 출품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칸이 남긴 오점으로 기록됐다. 영화 자체도 격변을 겪었다. 1959년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영화 <400번의 구타>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쥠으로써 누벨바그의 탄생을 알린 것. 칸 영화제 역사상 처음으로 관객의 야유 사태도 발생했다. 지식인의 퇴폐를 몽상적 화면으로 그려낸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 찬성할 수 없었던 관객들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8혁명의 여파로 1968년 칸 영화제가 중단된 뒤 1987년 칸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시위의 물결에 휩싸인다. 레지스탕스의 최고 지도자였던 장 물랭 체포에 얽힌 일화를 프랑스 리옹의 게슈타포 책임자 클라우스 바르비의 시각으로 그려낸 끌로드 발의 영화 <진실은 씁쓸하여라>의 상영에 항의한 시위였다. 무엇보다 예측 불가능한 칸 영화제를 상징한 사건은 지난 1994년에 일어났다. 쿠엔틴 타렌티노의 <펄프픽션>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 <저수지의 개들(1992)> 이후 타렌티노의 두 번째 영화였던 <펄프픽션>의 수상은 '젊은' 칸 영화제를 빛낸 유쾌한 사건이었다. 1997년 프랑스의 상빠삐에(불법체류자)를 지지하는 프랑스 영화인들의 집단영화가 상영되면서 칸은 다시 한 번 사회로 눈을 돌렸고 이것은 1999년 장-피에르와 뤽 다르덴 형제의 영화 <로제타>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함으로써 구체화됐다. 칸이 '사회 영화'로 귀환했음을 알리는 상징이었던 것.
 작년 칸 영화제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최민식과 시위단.
ⓒ 박영신

칸 영화제 60년에 기록된 최민식과 스크린쿼터 프랑스 정부의 실업수당제 개정에 항의하며 2004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군 공연예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사태도 칸을 비켜가지는 못 했다. 프랑스의 농민 운동가 조제 보베와 마이클 무어 감독이 참가한 가운데 극장을 점거하고 거리 시위를 펼친 공연예술 노동자들이 팔레 데 페스티발의 붉은 양탄자를 오른 것은 칸 영화제 역사에서도 가장 뚜렷한 연대의 표상이었다. 연미복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11인의 노동자들은 각자 등에 '협상'을 뜻하는 불어 '네고시아시옹(NEGOCIATION)'의 알파벳 한 자씩을 달고 붉은 양탄자를 벏았고 이것은 전세계의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 됐다. 그리고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의 카메라가 포착한 아일랜드 독립 투쟁의 단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지난해의 칸을 돌아본 다큐가 멈춘 곳은 놀랍게도 배우 최민식의 얼굴이었다. 스크린쿼터 사수 원정투쟁단의 일원으로 팔레 데 페스티발에서 '문화다양성' 수호의 플래카드를 펼쳐보인 최민식의 쓸쓸한 얼굴이 접사된 위로 자막은 흐르고 있었다.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한국 원정투쟁단의 침묵 시위. 칸 국제영화제는 한국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공식 지지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랬다. 다큐를 만든 끌로드 미셸은 지난해 배우 최민식을 포함한 스크린쿼터 사수 원정투쟁단과 함께 칸 영화제를 배경으로 연대투쟁한 프랑스의 문화예술인 중 한 사람이다. 침묵시위, 촛불시위, 기자간담회, 한-불영화제 공동 심포지엄까지 영화제 기간을 채운 원정투쟁단의 활약은 지난해 5월 21일 마침내 프랑스 문화장관, 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20인의 영화인 대표가 참가한 칸 국제영화제 이사회에서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공식 지지 선언문 발표라는 결실을 이뤄낸 바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칸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 영화제 60년 기념 다큐 <시간 속의 칸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는 스크린쿼터제로 뚜렷하게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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