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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보문고 잠실점 비문학 코너, 여성을 대상으로 한 수필집이 한 켠에 모여 있다.
ⓒ 김홍주선
뭐라고? 취업 좀 해보겠다고 들어간 '스터디' 팀장이 외모와 고분고분함으로 여자 성원들을 줄 세웠다고? 그러더니 급기야 '넘버원'에게는 노래방에서 무릎을 꿇고 연가를 바쳤다고? 학술답사를 갔는데 교수님이 술에 취해 여학생들 숙소 창문 아래 '창문을 열어다오~'를 밤새 열창하셨다고? 사회정의를 외치는 고학번 운동권 선배가 '인생은 술과 계집'이라 했다고?

그런데 또 뭐라고? 성희롱이라고 말했더니 "너 페미니스트냐?"고 반문했다고? 한술 더 떠 "남자를 싫어하세요? 혹시 호모섹슈얼?"이라고 물었다고? 편들어주는 듯하던 한 동료는 "그런데 그렇게 까칠할 필요는 없잖아, 융통성이 있어야지"라고 충고했다고?


참, 여자로 세상 살기 팍팍하다. 그런데 대체 이런 얘기 털어놓을 공간은 어디에 있는 거야. '난 그런 일 겪은 적 없어', '귀찮으니 조용히 넘어가자' 이런 거 말고, '야 진짜야? 그거 성차별 발언에 동성애 혐오 발언이잖아, 가중 처벌해야 해'라고 지지해줄 여자들은 어디 없나?

있다. 어디에 있느냐고? '언니네'에.

"나도 사실 페미니스트!"

▲ <언니네 방 2> 표지
ⓒ 갤리온
2006년 3월 <언니네 방>이 출간됐다. 언니네트워크의 '자기만의 방'에 올라온 글들 중 추천수와 반응이 가장 좋았던 글들을 뽑아 묶은 수필집이었다. 자기검열의 구속을 훨훨 벗어버린 언니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헉 이런 이야기까지 하다니. 이 사람들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죠?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요",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속이 시원합니다!"

<언니네 방>은 그렇게 입소문을 타고 5쇄 인쇄에 2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한국 최초로 여성주의 블로그를 시도했던 '언니네(www.unninet.co.kr)'는 이삼십대 여성이라면 한번쯤 그 이름을 접해봤을 온라인 커뮤니티다. '세상은 짜증나고, 성차별은 존재하는데, 이런 생각하는 나… 페미니스트인가?'라고 고민했던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공간을 제공받고 '의자매 맺기' 등의 기능을 이용해 서로 지지하는 공간.

6년 동안 4만여 명의 여성들이 '나도 사실… 페미니스트다'를 체험하며, 다른 곳에서 말하지 못한 가족사, 성폭력의 피해 등을 구구절절 풀어놓았다. 6년 동안 쌓인 글들의 '화끈함'은 그렇게 나왔다.

그로부터 1년 후, 2007년 4월 언니네트워크 편집팀은 <언니네 방 2>(갤리온)를 기획 출판했다. <언니네 방 1>에서 여성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를 '그야말로 질렀다'면, <언니네 방2>에서는 긴 호흡으로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밖으로 꺼낼 수 있었는지 추적하고 파헤쳤다. <언니네 방 2>의 필진이자, 1, 2권을 기획했던 '페이퍼문(별칭)'이 설명한다.

▲ 페이퍼문 "아빠한테 책을 드렸어요. 나중에 문자가 하나 띡 오더라고요. '고맙다'라고."
ⓒ 김홍주선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이 구호를 위해서는 일상을 다 바꿔내지 않으면 안 돼요. 가족 안에 묶이지 않고 가족주의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이 있다면, 그게 도대체 어떻게 나온 건지. 엄마 아빠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가 먼저 있는 거지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오랫동안 동거하며 겪었던 경험이 있었고, 애인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공만큼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다. <언니네 방 2>의 필자들은 가족, 애인, 친구와 조금 다른 관계를 고민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받았던 상처를 대면하고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 새로운 삶을 시도한다.

엄마를 창피해했던 딸의 이야기,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화해하는 이야기, 예쁜 친구와 친구하기 힘들었던 속사정, '띠동갑'과 친구하기 등. 28편의 에피소드는 무심결에 책을 집어든 독자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들며, 어느 구석에서는 다시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속사포 같은 명대사를 읊는다.

"엄마가 학교 다니는 거 싫어? 옛날에 엄마가 떡집에서 퇴근할 때면 너희들이 만날 과자 사와라, 아이스크림 사와라 부탁했잖아. 그 과자와 아이스크림 죄다 영어로 된 거였잖아. 사실은 엄마가 그걸 못 읽고 자꾸 이름을 까먹고 해서 못 사왔어. 엄마 그래서 학교 다니고 싶었던 거야." (중략) 졸업식 날 아무런 상도 타지 못했던 엄마에게 나는 그 어떤 상이라도 주고 싶다. "너무나 멋지게 잘 살아온 나의 엄마, 전성자. 마미. 아이러브유" ('미안해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그림)

"내가 많이 봐준다. 어린이 미숙련 노동이라 치고, 엄밀히 말해 12년이지만 10년으로 깎아줄게. 1년에 천만 원으로 하자. 갑자기 내놓을 능력은 없을 테니까, 무이자 할부해준다. 너 솔직히 보수적인 집안에 아들로 태어나서 얼마나 날로 먹고 살았냐? 네가 맘 놓고 공부하고 놀러 다니는 동안 난 밥했다." ('내가 친오빠들과 전쟁을 벌인 이유'-잠적누아)


'난 여자'가 아닌 '큰 여자' 되기... 인간적인 여자생활백서

시중에 여성 자기계발서는 많다. 그러나 일반 여성들이 읽기에 여성학 책은 조금 딱딱하고, 여성 성공기는 너무 개인적으로만 읽히는 경향이 있다. <언니네 방 2>는 '나처럼 하면 성공한다'는 책은 아니다. 실패한 경험도 있고 성공한 경험도 있다. 여전히 힘들고 세상에 휘둘리지만 '그 시간을 당신은 이렇게 해봐'라고 담담히 제안한다. 1, 2권의 필자 '야생싸가지(별칭·26)'는 이렇게 말한다.

▲ <언니네 방> 1, 2권의 필자 '야생싸가지'
ⓒ 김홍주선
"돈도 그렇지만 남자들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삶의 지침이 없는 편입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에세이집도 '촌스러운 삶에 대해 견딜 수 없고, 잘나가야 하는 싱글 여자'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가 잘나가기 힘든(게 우리 현실인)데도. 그렇기에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인간적인' 여자생활백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페이퍼문도 덧붙인다.

"(잘)난 여자들이 되는 게 아니라, 큰 여자가 되는 거. 사회적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다른 관계들을 돌아보고 자신을 긍정하는 거였죠. 원고를 추리면서 지나치게 특수한 경험은 일부러 제외했습니다."

교보문고 서울 잠실점 북 마스터 이아무개(45)씨에 따르면, 현재 <언니네 방 2>는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미친년(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등과 함께 비문학 코너에서 꾸준히 나가고 있다. 20~30대 여성들이 일주일에 (동 지점에서만) 5~30부까지 찾는다.

"<언니네 방 1>의 경우엔 섹스 같은 주제에 대한 솔직함 때문에 젊은 층이 호기심으로도 많이 찾았지요.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고객분들이 찾으시면 <미친년>이나 <언니네 방 2> 등을 추천해 드립니다. 뭔가를 미친 듯이 찾는 그런 진지함을 젊은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여자의 힘이 더 커질 것 같아요."

나이를 불문하고 여자가 솔직하기 힘든 세상, 젊은 언니들의 향후 계획은 어떨까. 언니네 편집팀은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언니네 방 3>의 주제로 '무턱대고 야한 얘기', '미친년 프로젝트' 등을 논의 중이라고 전해왔다.

여성부와 총여 폐지? 언니네가 필요한 이유

▲ 언니네트워크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이 함께 참가한 성추행 가해자 역고소 철회 시위 모습. 오매가 피켓을 들고 있다.
ⓒ김홍주선
"흔히들 그런 말하죠.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다. 여성운동에 여성이 없다. 활동가로서 '이것이 문제다'에 집중하면서 놓쳤던 여백을 메워주는 곳, '언니네'입니다. 그 여성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가느냐가 <언니네 방 2>에 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 간사이자, <언니네 방 2> 필진으로 참여한 '오매(별칭·27)'가 하는 말이다. 언니네는 수많은 여성들이 '사적(이라고 지칭되어온)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간이다. 기존의 성편향적 공간에서 풀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자기 속도와 자기 맥락으로 이야기한다.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칭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여성문제를 고민하는 일이 가능하다.

최근 1년여 사이, 여성(가족)부 폐지 서명운동이나 총여학생회 폐지 등의 소식이 연이어 전해졌다. 굳이 여성 공간을 따로 확보할 필요가 있을까? 오매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에게만 혜택이나 특별이익을 돌아가게 하려는 게 아니라, 기존의 공적 영역이 '얼마나 남성 편향적이었는지'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게 그 기관들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를 세계 1위로 올리겠다' 이것이 정말 모든 사람이 원하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로는 오히려 소수자의 목소리를 주류에 반영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총여학생회가 레즈비언 문화제를 개최한다든가. 이럴 경우에 절차적 공정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여 공적인 장에서 여성 공간을 없애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현상은 여성이 뭔가를 하거나 목소리를 낼 경우 더 권력적으로 바라보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요."

최근까지 언니네트워크 운영진을 맡았던 페이퍼문은 언니네는 국가를 대상으로 법이나 정책을 만들어내는 공간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걸 가지지 못했으니까 우리에게 이걸 줘'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드는 공간이 언니네'라는 설명이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지분을 차지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여성부나 총여학생회 등의) 그런 게 없다면 우리가 게토화되니까요. 그렇지만 언니네는 이것과 상관없이 여자만의 공공영역을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새로운 문화 공동체, 여성들이 공적 공간을 만든다면 이런 모양이 아닐까 하는 대안을 실험하는 곳이죠."

비폭력대화와 평등한 토론의 공간인 언니네는 한편, 보존해야 할 인터넷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정보트러스트 어워드 2005'를 수상했고,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의 뜻을 잇는 단체로 선정되어 '제3회 고정희상(2005)'을 받은 바 있다.
/ 김홍주선 기자

덧붙이는 글 |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태그:#언니네방, #언니네, #여성주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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