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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5월 14일 오후3시 50분

▲ 사진 왼쪽이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 정지원
'재즈 페스티벌'과 '탈북 피아니스트'.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음악 장르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선율의 재즈와, 공산국가에서 성장한 피아니스트의 만남이라니.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33)씨를 만나기 전까진 이 조합이 완전한 모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을 하루 앞둔 지난 3일 그를 만났을 때, 이것이 엄청난 편견이었음을 단 10분도 안 돼서 깨닫게 되었다. 그가 북한 출신이기에 앞서, 무한한 자유를 열망했던 한 사람의 음악인이었기에.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위해 보장된 모든 특권을 버린 용기있는 젊음이었음에. 피아니스트 김철웅씨는 호주 멜버른 재즈 페스티벌(Melbourne Jazz Festival)이 표방하는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다.

북한의 음악신동, 1%의 특권을 버리다

편견은 그의 첫인상을 보면서부터 무참히 깨졌다. 훤칠한 외모에 정장을 잘 차려입은 그는 그동안 언론에 비친 정형화된 탈북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정형화된 모습'이란 허름한 옷차림에 어색한 표정으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하는 모습이다).

사실 몇 주 전만 해도 나는 국내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탈북 청소년의 대다수가 현재 재학 중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 또는 자퇴한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만큼 새터민들이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일진대, 김철웅씨는 완전히 남한 사회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남한 사회에 적응했다기보다는 제 원래 모습입니다. 북한에서도 상류층은 자신을 꾸미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거든요. 그들도 명품을 알고 세련된 문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탈북 전 그는 북한 사회에서 상위 1%에 속하는 주요 인물이었다.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위 공무원 아버지와,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 대학교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김철웅씨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모든 것을 누리며 음악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천재라고 불리는 음악 신동이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약 6000명의 지원자 중 단 9명을 선발하는 북한 최고의 평양음악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철웅씨는 수상의 기쁨을 '김일성·김정일 동지'에게 돌릴 만큼 철저하게 북한 인민이었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그가 러시아 차이콥스키 국립 음악원에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김철웅씨의 말에 의하면,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마음을 뒤흔든 곡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곡이 무슨 곡인지 묻는 그에게 카페 주인은 "음악을 전공한다는 학생이 이 곡도 모르는가"라고 반문하며, 리차드 클라이드만의 '가을의 속삭임'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그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지만, 그보다 재즈란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에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또 그에게 모든 장르의 음악을 자유로이 접하고픈 열망이 생긴 것도 이 때였다고 한다.

"제가 연주하고 싶은 음악, 듣고 싶은 음악이 국가에 의해 제한될 때, 음악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만큼 이에 따른 절망은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북한에서는 오직 클래식에 한해 음악을 배우는 것이 허락되며,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19세기 말 이후 음악가의 곡은 모두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배울 만큼 배운 음악가로서, 한 독재자의 장난감이 되는 기분은 정말 끔찍합니다. 내 영혼을 투영하는 연주가 나와야 하는데, 마음에도 없는 누군가를 찬양하는 음악은 음악가로서 스스로 내 영혼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었죠. 아무리 1%의 상류층으로 물질적인 행복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 정신적인 불행을 그대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독재자의 장난감 될 수는 없었다"

ⓒ 정지원
러시아에서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탈북을 결심한다. 이미 수많은 언론이 그의 특별한 이야기를 집중 조명했지만, 직접 만나 들어보니 김철웅씨의 탈북 과정은 더욱 드라마틱했다.

"오로지 음악이 하고 싶어 제게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2001년 중국으로 탈북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족 마을에 도착해보니 음악과는 먼 생활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아노는커녕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힘든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이었죠."

그동안 곱게만 자란 그였지만 막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텼다. 때로는 피아니스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손에 부상을 입을 만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던 중 겨우 그는 교회의 피아노 반주자가 되어 부흥 집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 위조 여권이 발각되며 북한으로 송환되기도 했는데,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철웅씨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대한민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행히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는 피아니스트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한세대학교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모금활동에도 열성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대한민국에서의 새 삶에 얼마만큼 만족하고 있을까? 탈북을 통해 그는 과연 자유의 꿈을 찾았을까?

"사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탈북 이후 '삶의 목표'란 걸 갖게 되었다는 거죠. 사실 탈북을 결심했을 당시만 해도 무언가 목표가 있었다기보다, 국가가 내 자유를 억압하는 데 대한 오기가 컸거든요. 북한을 벗어나면 치고 싶은 곡 마음껏 치면서 음악적 자유를 누리겠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런데 탈북 이후 대한민국에 정착하면서 오히려 삶의 목표가 생기더군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고민도 하게 되고요. 그런 면에서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는 점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의 삶에 만족합니다. 아직은 자유가 무엇인지 맛만 본 단계이기에,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죠."


끝으로 김철웅씨는 멜버른의 자라나는 음악 학도들에게도 격려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는데, 그 첫 번째 핵심은 남들에 앞서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선 그들보다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디서 포기해야 하는지 그 시점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재능은 있는데 노력을 안 하는 친구들이 종종 보입니다. 재능만 믿고 연습을 소홀히 한다면 절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일례로 부닝이라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는 그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거의 20년간 살아오면서 하루 17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 재능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동안 해온 것이 아까워 포기를 못 하는 친구들도 안타까운 케이스인데요, 포기할 줄 아는 과감한 결단과 용기도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해도...

인터뷰 후 장소를 옮겨 그와 가볍게 와인을 마셨다. 평소 와인을 즐긴다는 그는 약간 취기가 돌자 평소 가져온 고민들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제가 남한 사회에 정착하면서 받은 사랑도 넘칠 만큼 많았지만, 때때로 탈북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저를 외롭게 만들기도 해요. 누군가와 사랑을 해도 그녀 주변의 믿었던 사람이 내가 탈북자란 이유만으로 반대를 하는 거죠. 그럴 때면 참 마음이 아프죠."

그 역시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에 앞서,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 청년인데 이런 어려움을 조심스레 털어놓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희망'을 찾아온 남한 사회에서 오히려 절망을 느낀다면, 그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상처는 아무는 법, 그는 확실히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이 있는 청년이었다.

"탈북자란 꼬리표 때문에 힘든 일도 많지만, 탈북자이기에 저만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탈북 청소년들을 돕는 일이라든가,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를 세계에 알리는 일도 제 몫이겠죠. 그래서 지난해부터 북한인권시민연합의 홍보대사로 일을 하고 있지요.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전하는 일도 보람있는 일이죠."

그의 말처럼 '탈북 피아니스트'란 수식어는 때때로 그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겠지만,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동기 부여도 된다.

김철웅씨가 이번 재즈 페스티벌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초청된 것도, 어쩌면 음악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그의 능력에 거는 세계의 기대 때문일 것이다. 희망을 담아 혼신의 연주를 펼칠, 그가 앞으로 보여줄 아름다운 새 인생을 기대해본다.

[공연 리뷰] 어느 한국인의 특별했던 연주회

덧붙이는 공연 리뷰는, 호주 멜버른 재즈 페스티벌 행사기간에 김철웅씨의 통역을 담당했던 정지원 학생이 <멜번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정지원양은 현재 라트로브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재학 중인 연세대학교 학생입니다. <기자 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무대 위에는 단 한대의 피아노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탈북 피아니스트 김철웅씨 본인 인생의 격정과 한을 담아 직접 편곡했다는 아리랑소나타는 바로 그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미복을 멋지게 갖춰 입고 성큼성큼 무대에 걸어나온 김철웅씨는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 앞에서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자신은 재즈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사실 클래식 피아니스트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러시아 유학 도중 한 카페에서 우연히 리차드 클라이드만의 피아노곡을 듣게 되었어요. 카페 주인에게 곡의 제목을 물어보니, 어떻게 음악을 공부한다는 학생이 재즈를 모를 수가 있냐고 하더군요.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 곡, 리차드 클라이드만의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적으로 혼을 담은 연주 때문이었는지, 곡이 끝나자 그는 숨을 크게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를 주시하며 적막이 흐른 관객들 사이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며 그는 "북에서 왔으니까 북한 노래도 들려드려야죠"라며 북한 어린아이들이 즐겨 부른다는 경쾌하고 빠른 리듬의 '동틀날' 등 두 곡을 선사했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음악 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했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갈구하며 먼 길을 떠나 온 김철웅씨.

북한에서는 어떤 연주회든 당에서 연주 곡목을 정해주기 때문에, 스스로 곡목과 순서를 정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그는 특히 이번 연주회가 힘들었다며 공연 준비과정을 회상했습니다. 그렇게 현재의 자신으로 있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하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이번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한참을 손뼉을 치던 관객들의 눈빛에서 모두 뜨거워진 가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 연주에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어깨춤이 추고 싶어지더라니까요"라고 말씀해주신 황해도 출신의 목사님. "물속에 물감을 떨어뜨리면 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커다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라던 노란 머리의 아주머니. 그리고 "다음 멜번 공연 때는 자신과 함께 피아노 협연을 해 줄 수 있겠느냐"며, 수줍게 사인을 부탁하던 꼬마까지.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제대로 된 북한 이야기. 그리고 가슴을 울렸던 피아노 선율이 함께했던 5월 어느 금요일의 콘서트. 음악에의 자유를 누린지 이제 겨우 4년 되어 갈 길이 멀다는 어느 한국인의 특별했던 연주회는 그렇게 멜버른에서의 재회를 다짐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멜버른저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철웅, #탈북 피아니스트, #멜버른, #멜번 재즈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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