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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나무가 무성한 우간다의 도로.
ⓒ 김성호
김광석의 노래 CD를 배낭에 넣은 나는 우간다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밤 9시께 나이로비의 숙소를 나왔다. 같은 숙소에 머물던 로렌스 스미스라는 뉴질랜드 배낭여행객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컴퓨터 관련 회사에 다니는 30대 초반의 로렌스는 나와 함께 마운틴고릴라를 보러 가기 위해 토요일 출발 계획을 취소하고 이틀 뒤인 오늘, 같은 버스표를 예매했다. 더욱이 로렌스는 우간다와 콩고 국경 근처에서 마운틴고릴라를 볼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다행이었다.

마운틴고릴라, 드디어 너를 보는구나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오기 5개월 전부터 마운틴고릴라 트레킹 예약을 받는 우간다야생생물보호청(UWA)에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로렌스는 자신의 친구가 2개월 전에 예약 없이 마운틴고릴라를 구경할 수 있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이로비 여행객 숙소에서 김광석 노래 CD뿐 아니라 사파리용 쌍안경을 빌려주고, 뉴질랜드 여행객 로렌스를 소개시켜주는 등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젊은 의사는 오후에 마다가스카르와 유럽 배낭여행을 위해 이미 떠난 뒤였다. 지방대학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를 하다 그만두고 개업 준비를 하는 동안 아프리카와 유럽 배낭여행을 한다는 그는 정말 신세대 의사다웠다.

모든 사람이 적절한 여행이 필요하지만, 나는 평소 교사와 의사야말로 누구보다도 여행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교사와 환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야말로 직업의 특수성과 사회적 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휴식과 여행은 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이다.

어둠을 헤치고 케냐에서 우간다로

▲ 파란 바나나를 길에서 팔고 있는 우간다 농촌 모습.
ⓒ 김성호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100여m 떨어진 버스 정류장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나이로비 시내의 밤은 너무 위험한 곳이어서 강도라도 만날까 두려워 배낭을 멘 채 마라톤 하듯 뛰어간 것이다. 우간다로 가는 스칸디나비안 버스 정류장에는 대여섯 명의 현지인들과 30대 초반의 중국인 부부가 있었는데 중국인 부인은 임신을 한 듯 배가 많이 나와 있었다.

밤 10시쯤 도착한 버스에는 이미 3분의 2는 여행객들로 꽉 차 있었다. 버스는 내리고 타는 승객들을 교체하고, 화장실 이용을 위해 30여 분을 정차한 뒤 밤 10시 30분이 되어 출발했다. 나이로비에서 우간다의 캄팔라까지는 요금이 30달러(2000 케냐실링).

버스에 타자마자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추위가 느껴져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2시 20분이다. 버스 차창 위에서 비가 새면서 밑으로 떨어져 창 쪽에 앉아있던 나의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잖아도 가벼운 옷을 입은 나는 아프리카 밤의 냉기와 빗물이 합쳐져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중간에 잠시 차가 서서 어두운 밤에 길거리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한 뒤 다시 잠들었는데, 운전사가 모두 내리라고 승객들을 깨운다. 케냐와 우간다의 국경에 다다른 것이다. 케냐의 국경도시 말라바를 거쳐 우간다의 국경도시 토로로에 도착했다.

그 때가 오전 6시 10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출발한 버스는 밤새 쉬지 않고 8시간이나 나이바샤와 나쿠루, 엘도레트를 거쳐 달려왔다.

잠자는 사이 어둠을 헤치며 지나온 롱고노트 분화구와 나이바샤 호수, 나쿠루 호수 등은 바로 동아프리카 대지구대(그레이트 리프트 밸리)이다. 에티오피아 상공에서 본 아비시니아 고원의 동아프리카 대지구대가 케냐의 국경을 넘어 투르카나 호수와 보고리아 호수를 거쳐 나쿠루 호수와 나이바샤 호수까지 따라온 것이다.

고릴라와 친팬지의 고향... 인류의 진화를 찾아서

동아프리카 대지구대는 케냐와 우간다·탄자니아 등 3개국에 걸쳐 있는 빅토리아 호수와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킬리만자로산, 탕가니카 호수를 거쳐 말라위 호수까지 뻗어 모잠비크까지 가는 나의 여행길이다.

동아프리카의 지구대에 의해 갈라진 아프리카의 동서는 기후적 차이로 인해 인간 진화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쪽의 열대우림지역은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한 원숭이와 고릴라·침팬지 등 유인원의 서식처가 되었고, 동쪽의 사바나 초원은 유원인 등 인간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초기 인류화석들 대부분이 동아프리카 지구대 동쪽에서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따라 여행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진화를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우간다와 르완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열대우림지역은 고릴라와 침팬지의 고향이다. 그리고 케냐의 투르카나 호수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와 보이세이,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 라에톨리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등 초기 인류화석이 계곡을 따라 발견되었다.

서쪽의 열대우림지역에서는 비가 많이 내려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원숭이와 고릴라·침팬지 등 나무 위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동물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동쪽은 비가 적어 작은 관목만이 자라면서 넓은 초원이 펼쳐지자 사자 등 맹수에 대항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두 발로 걷고, 두 손과 도구·불을 이용하면서 평지의 환경에 적응해 나가게 되었다.

우간다의 공용어는 영어

▲ 커다란 광고 간판이 있는 도로에 바나나를 가득 싣고 가는 자전거.
ⓒ 로렌스 스미스(동행한 뉴질랜드 여행객)
케냐 출국 심사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은 새벽부터 한 줄로 서서 수속을 밟아야 했다.

케냐 국경에서 우간다로 넘어가는데, 중국인 부부가 총을 든 우간다 국경 경비요원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황열병(Yellow Fever) 예방 접종증명서를 보여 달라는 것인데, 중국인 부부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중국인 부부에게 설명을 해주자 얼굴색이 밝아지면서 가방에서 예방 접종증명서를 꺼내 보여준다. 더 답답했던 경비요원은 그 때서야 가라고 손짓하며 고개를 흔든다.

우간다는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아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어가 짧은 나도 여행 도중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당신, 영어 할 줄 모르냐"는 말을 종종 들어야 했다.

나에게도 여권과 함께 예방 접종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하는데, 막상 내가 버스 안에 있는 배낭 속에 예방 접종증명서를 두고 가져오지 않았다. 버스 안의 배낭 속에 있다고 하자 "꼭 소지하고 다니라"고 말한 뒤 의외로 순순히 그냥 가라고 한다.

아프리카 여행에는 황열병 예방 접종증명서를 반드시 갖고가야 하는데, 내가 남아공까지 종단하는 동안 실제 접종증명서를 검사한 경우는 이 때가 유일했다.

케냐 출국 수속에 이어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우간다 입국 심사대에서 미화 30달러를 내고 바로 여행 비자를 발급받았다. 버스 승객들이 출입국 심사를 마치자 기다리고 있던 버스는 다시 승객을 태운 뒤 오전 7시께 우간다 수도 캄팔라로 향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더욱 추위가 느껴졌다.

아프리카에서 모내기를 보다

우간다에 들어서자 파란 세상이 펼쳐졌다. 푸른 들판과 무성한 나무, 다양한 곡물들이 풍부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막화로 고통받는 다른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우간다는 남아공과 함께 물이 부족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케냐의 하늘이 낮고 푸르다면, 우간다의 들판은 넓고 푸르다.

아침이슬을 머금어서인지 푸른 나무들이 더욱 파랗고 투명해 보였다. 짙푸른 차와 사탕수수, 특히 옥수수가 무척 크게 자라고 있었다. 논에서 모내기하는 장면도 보였다. 옆 논에는 이미 벼가 많이 자랐는데, 늦은 모내기를 하는지 10여 명의 시골 농부들이 공동으로 품앗이하듯이 모를 심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모내기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우간다의 푸른 들판에서는 기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간다는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불린다.

어린 학생들이 아침 일찍 등교하는데 옷 색깔도 주로 파란색이다. 우간다는 온통 푸르다. '녹색의 나라'라 불리는 이유이다. 에티오피아와 케냐는 고원지대여서 덥지만 서늘한데, 우간다는 저지대여서인지 더우면서도 습하다. 우간다가 케냐보다 더 비옥한데도 유럽인들이 주로 케냐에 정착한 것은 바로 이 기후차이 때문이다.

토로로와 진자까지 가는 데 곳곳에 '토로로 시멘트'라는 광고 간판이 도로를 따라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토로로에 유명한 시멘트 공장이 있나 보다. 이발소와 화장품 광고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있는 단골 간판이었다.

온통 푸른색의 우간다는 '아프리카의 진주'

▲ 쭉 뻗은 우간다의 도로.
ⓒ 로렌스 스미스
푸른 들판에 이어 갑자기 파란 호수가 나타났다. 눈이 번쩍 띄었다. 백나일강의 수원인 빅토리아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빅토리아 호수가 백나일 강으로 빠져나가는 골목인 진자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하얀 학과 수많은 물새들이 빅토리아 호숫가를 날아다니고, 파피루스 갈대가 물새들의 날갯짓에 의해 흔들린다. 내 마음마저 넓어지는 느낌이다.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가 둥그런 접시 안으로 물이 모이는 호수라면, 빅토리아 호수는 넓은 들판으로 물이 퍼져 나가는 호수이다.

유럽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존 해닝 스피크가 1862년 7월 2차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빅토리아 호수가 백나일강의 수원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곳도 바로 이 곳 진자이다. 스피크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나온 물이 백나일 강으로 흘러가는 진자 근처의 리폰 폭포를 발견함으로써 빅토리아 호수가 백나일강의 수원이라는 것을 입증해 냈다.

스피크는 "빅토리아 니안자호는 우리 종교의 창시자(기독교의 모세를 의미)가 바구니에 실려떠내려 온 성스러운 강의 근원임을 확인했다"며 당시의 감동을 그의 일기에 적었다. 유럽인들이 나일 강에 대해 관심을 둔 이유 중에는 바구니 속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졌다 구출된 구약성경의 모세의 이야기를 통한 종교적 이유도 있었다.

리폰 폭포는 바로 밑에 지난 1954년 오언 폭포(Owen Falls) 댐이 건설되며 물이 폭포 위까지 차면서 이제는 예전의 폭포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아프리카에 웬 '빅토리아 호수'?

스피크가 제2차 탐험을 하게 된 것은 1857년 1차 탐험을 함께 한 리처드 버튼과의 갈등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빅토리아 호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1858년 2월 탄자니아의 탕가니카 호수를 함께 발견했으나 병으로 버튼은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 머물고, 스피크 혼자 탐험에 나서 1858년 3월 탄자니아의 므완자에 도착해 빅토리아 호수를 보고 백나일강의 수원임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확인했다.

스피크가 빅토리아 호수가 백나일강의 수원이라고 발표하자 1855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 이슬람 도시인 하라르를 방문했던 버튼은 킬리만자로 산 근처에 수원이 존재한다고 엇갈린 주장을 했다. 두 사람은 탐험 동료에서 철천지 원수로 바뀌었다.

스피크는 당시 현지인들이 '니안자호'라고 부르고, 아랍인들이 '우케레웨'라고 부르던 호수를 영국 여왕인 빅토리아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호수'라고 멋대로 불렀고, 2차 탐험에서 발견한 호수도 자신의 탐험을 지원한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장을 역임한 리폰의 이름을 따서 '리폰 폭포'라고 붙였다.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은 이미 오래 전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먼저 발견하고 이름을 붙인 호수와 폭포 등의 명칭을 무시하고, 마치 자신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전유물인 양 멋대로 유럽식 이름을 붙이는 오만을 보여주기도 했다.

새로운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의 발견이 문명인으로서는 '최초'라는 상징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고, '미문명'인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발견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인종적 차별이 숨어있다.

빅토리아 호수는 백나일 강의 수원일 뿐 아니라 아프리카 제1의 호수이자 담수호로는 캐나다의 슈피리어 호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우간다와 케냐·탄자니아 등 3개국에 걸쳐 있는 동아프리카의 젖줄 같은 호수이다. 호수 자체는 물고기를 주고, 주변의 들판의 곡식에 필요한 물을 제공하고, 나무들을 푸르게 하고, 야생동물과 새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엽기적 독재자' 이디 아민의 기억

▲ 최근 <라스트 킹>이라는 이름으로 상영된 이디 아민을 그린 영화 포스터.
ⓒ 폭스서치라이트픽처스사
진자는 또 인도인 등 아시아인들이 많이 진출해 아시아풍의 건물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간다의 '엽기적인 대통령'인 이디 아민이 집권하던 지난 1972년 주로 인도인들인 아시아인 7만여 명이 하루아침에 국외로 추방당했다.

"우간다의 암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 젖을 짜려는 사람은 우간다에서 얻을 것이 없다."

이디 아민이 인도인을 추방하기 하루 전에 한 말이다. 말은 그럴 듯 했지만, 당시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인도인들을 추방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이디 아민의 치졸한 통치술이었다. 결과는 경제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디 아민의 권력기반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디 아민의 실각 이후 인도인에 대한 적극적인 유치활동으로 대다수가 다시 돌아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기도 하고, 현재 간디를 추모하는 동상이 힌두교 사원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진자에 인도인들이 많이 진출한 것은 우간다와 인도가 같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우간다에서의 면화와 커피 집단재배 등에 필요한 인력을 인도에서 끌어다 쓰기도 했다.

진자는 이뿐만이 아니라 이디 아민과 또 다른 연관이 많은 도시이다. 지난 1946년 영국 식민지부대의 군인으로 이디 아민이 첫 군생활을 시작했던 곳이면서 1979년 탄자니아군과 반정부군에 쫓겨 수도 캄팔라에서 후퇴했다가 리비아로 헬기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던 곳도 이 곳 진자이다. 이디 아민의 권력의 출발이자 몰락의 지점이기도 하다.

재빨리 독재자를 승인한 영국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집권하던 1971년부터 8년간 살해된 우간다 국민의 숫자는 무려 30여만 명에 달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일찌감치 영국 식민지군대에 입대해 경력을 쌓아간 이디 아민은 영국군에게는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간다 국민에게는 불행한 식민지 유산이 되었다.

육군 총사령관이던 이디 아민은 1971년 오보테 당시 대통령이 외국에 나간 사이 영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 때 가장 먼저 이디 아민 정권을 승인한 나라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의 영향 아래 있던 케냐와 이스라엘·영국이다. 전임 오보테 정권의 국유화로 손해를 본 영국과 우간다를 거점으로 수단에서 정치적 불안을 일으키려던 이스라엘은 재빨리 자신의 국익을 위해 이디 아민 정권을 승인하고 나선 것이다.

테러와 공포의 정치를 펼치던 이디 아민은 인도인의 추방에 이어 1978년에는 우간다 반정부군을 지원한다며 인근 국가인 탄자니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이 이디 아민의 정치 행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탄자니아 침공을 통해 국민들의 반감을 전쟁을 통해 돌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으로 이디 아민의 몰락을 가져왔다. 니에레레 탄자니아 대통령은 우간다의 반 이디 아민 세력과 함께 1979년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 이디 아민 정권을 쫓아냈다.

'아프리카의 히틀러' 또는 '인간백정'이라 불린 이디 아민의 몰락과정은 영화 <킬링필드>로 잘 알려진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정권과 유사하다.

중국의 지원을 받던 폴 포트 공산정권은 1975년부터 집권 4년간 무려 150만 명의 주민을 학살한 뒤 같은 공산국가인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일으켰다가 베트남군과 반 폴 포트 연합군에 의해 1979년 1월 몰락한다. 이디 아민이 몰락한 것은 그보다 3개월 뒤인 1979년 4월이니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학살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운명을 맞이한 셈이다.

수도 캄팔라에서 쫓겨난 이디 아민은 진자에서 헬기를 타고 자신의 유일한 우방이었던 리비아로 도망갔다가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지를 옮겼으나 지난 2003년 8월 사망했다.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디 아민을 수용한 것은 이슬람교도인 그가 정권을 잡은 뒤 친중동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디 아민은 서구제국주의가 낳은 괴물

▲ 우간다 수도 캄팔라 시내 모습.
ⓒ 김성호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한다는 미국과 서구유럽은 왜 이디 아민의 공포정치를 그토록 오랫동안 묵인해왔을까. 이디 아민 자신이 서구제국주의가 낳은 '식민지 유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민은 영국 식민지부대인 왕립아프리카소총부대원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 2차 세계대전에는 영국군으로 미얀마 전투에 참여한 데 이어 1953년부터 59년까지는 인근 케냐의 독립운동인 '마우 마우' 저항세력의 소탕에 참가하고, 1961년에는 우간다 최초의 유색인 장교로 승진했다.

1962년 우간다가 독립하기 전에 이미 이디 아민은 식민지 군대의 충견이 되어 있었다. 독립 이후에도 아민은 우간다군의 핵심인물로 성장하면서 육군 참모총장까지 이르고, 마침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된다.

영국과 영국의 영향 아래 있던 케냐·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아민의 쿠데타를 인정하고 나선 것은 다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물론 영국과 이스라엘은 믿었던 아민이 집권 뒤에는 다시 국유화 정책으로 영국의 국익과 어긋나고, 이슬람교도였던 아민이 리비아와 중동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이스라엘을 등지면서 또다시 두 나라와 우간다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서방세계가 주저한 이유 중에는 1975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섣부른 내정간섭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로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좌익 정권 출범과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의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실험, 수단의 누메이리 정권의 수단식 사회주의 건설,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정권의 사회주의 경도 등으로 동아프리카에 확산되고 있는 사회주의에 대한 우간다의 견제 역할 때문이다.

식민지군대 출신인 이디 아민은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상징인 니에레레 탄자니아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공포와 독재정치를 펼쳤지만 사회주의 성향을 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케냐의 오랜 독재정치를 서방세계가 묵인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방세계는 동아프리카에 확산되는 사회주의 도미노 현상을 케냐와 우간다의 독재정권을 통해서라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 때 아프리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독재자 이디 아민이란 인물의 탄생부터가 서구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식민지 유산이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이디 아민은 또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 또는 '대영제국의 정복자'라고 부르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 어느 독재자나 그렇듯 이디 아민도 자기과시를 위한 허망한 수식어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이디 아민은 평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춤과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를 동경했고, 영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스코틀랜드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스코틀랜드의 영원한 왕이 되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었다고 한다. 최근 실제로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분리해 독립국가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디 아민이 살아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녹슨 아프리카 철도는 기적소리를 내지 않는다

▲ 탄자니아에서 잠비아로 가는 타자라 열차의 모습.
ⓒ 김성호
진자를 뒤로 하고 버스가 떠나자 빅토리아 호수도 밀려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나일강의 수원인 빅토리아 호에서는 여전히 많은 물들이 흘러나가고 있었다.

빅토리아 호에서 흘러나온 물은 빅토리아 나일로 불리며 키오가 호수를 거쳐 머치슨 폭포를 지나 앨버트 호로 들어갔다가 다시 앨버트 나일이 된다. 이어 수단으로 흘러가면서 백나일로 불리며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에티오피아의 타나 호수에서 흘러나온 청나일과 합류한다. 이 때부터 나일강의 이름으로 지중해로 흘러든다.

진자를 지나자 버스 안의 남자 차장이 비스킷과 콜라, 환타 등 음료수를 승객들에게 나눠준다. 아침 대용으로 주는 음식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도 부족하다. 길가에는 침례교회도 보이고 기찻길도 나타났다. 철도에는 아무런 열차가 다니지 않아 약간은 녹슨 모양이다.

바로 케냐의 인도양 연안 몸바사에서 나이로비를 거쳐 우간다의 토로로와 진자, 캄팔라를 거쳐 남서부의 카세세까지 가는 철도이다. 버스는 수도 캄팔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루가지라는 작은 도시에 이르렀다.

현재는 녹슬어 방치되어 있는 우간다 철도는 아프리카의 다른 철도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절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 따라 건설되었다. 우간다 철도는 영국에 의해 1901년 케냐의 인도양 연안 몸바사와 빅토리아 호숫가 키수무까지 연결하는 공사에 이어 1931년에는 캄팔라에 이어 1965년에는 카세세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완성되었다.

우간다 철도는 우간다에서 재배되던 면화를 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면화철도'라 불리고, 케냐 지역에서는 커피와 차를 실어 나르는 데도 이용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철도는 '다이아몬드철도', '황금철도'로 불리고, 벨기에령 콩고민주공화국의 철도는 구리를 실어 나르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동철도'라고 불렸다. 프랑스가 건설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항의 철도는 커피와 차트(카트)를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수탈을 위해 식민지인 한반도 종단철도와 만주철도를 건설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난 1976년 중국의 지원 아래 완공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과 잠비아의 카피리 음포시 사이의 타자라 철도를 제외하고 동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철도는 바로 식민지 시대에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건설된 철도들이다.

우간다에서도, 철마는 달리고 싶다

스웨덴의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야만의 역사>라는 책에서 "대륙에 포탄을 퍼붓는 군함의 대포, 대륙의 약탈을 용이하게 해주는 철도, 유럽인들과 그들의 군대를 대륙의 심장부로 실어 나르는 하천의 증기선"이라면서 '제국주의의 연장들'이라고 규정했다.

우간다 철도는 지난 1997년부터 안전상의 문제와 경영상 적자로 운행이 중단되고 있다. 비록 건설의 목적은 제국주의의 침탈을 위한 것일지라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사실상 고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의 경제적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간다 열차가 다시 달리는 날 빅토리아 호수를 따라 달리는 열차 여행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바이칼 호수를 끼고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즐거움을 느끼듯. 아프리카 열차의 기적소리를 상상하다 보니 버스는 벌써 수도 캄팔라에 다다랐다.

▲ 우간다 캄팔라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 모습.
ⓒ 로렌스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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