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초등학교 아이들의 그림 전시회
ⓒ 김윤주
지난 주말,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미술 전시회가 있었다. 언제더라… 만 세 살쯤이었을까? 현대백화점에서 열렸던 어린이집 단체 미술 전시회에 '데뷔'한 이후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런 전시회에 그림이 걸리곤 했으니 우습지만 벌써 경력이 꽤 되는 아티스트인 셈이다.

미국에 건너온 지 두어 달쯤 된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고운 색깔 봉투에 담긴 초대장을 하나 가지고 왔다. 아이의 그림이 학교 대표로 뽑혀 한 달간 어디 어디에 전시될 예정이니 가족 모두 와서 그림도 보고 미술 축제를 즐겨 보라는 초대장이었다. 축하한다는 미술 선생님의 메모와 함께.

이곳 대학생들이 즐겨 간다는 카페에 그림이 전시된 덕에 오랜만에 대학생 기분 내며 남편이랑 차도 한 잔 나누고, 학교 이름과 함께 걸려 있는 아이의 '신나는 겨울'이란 작품도 감상하며 은근히 뿌듯해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한 이국땅에 적응하느라 한참 고단하던 시기였던지라 딸아이의 이런 작은 '성취'는 우리 부부를 흥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로도 아이의 그림들은 크고 작은 미술 대회에 추천이 되었다. 때마다 전시도 되고 상도 받고 축하도 받으며 즐거워하던 무렵, 우연히 어딘가에서 글을 하나 읽게 되었다. 어떤 대학생의 글이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버렸다.

혹시 우리 딸 그림도...

중학교 때 엄마 아빠 따라 미국에 건너온 그 아이는 처음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너무 다르고 친구도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적응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들었단다. 엄마 아빠도 나름대로 힘들어 보였고 그래서 그 아이는 매일 그냥 말없이 그림을 그렸단다. 하도 그려댔더니 그림 잘 그린단 소리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온갖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쓰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단다.

속 모르는 어른들은 미술에 재능이 있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아이가 찾아낸 유일한 탈출구로서의 그림이었을 뿐, 본인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거다. 후에 영어가 쉬워지고 그림보다 말과 글이 즐거워질 무렵이 되어선 더 이상 미술 대회에 나가는 일 따위는 없어졌다는 이야기였다.

혹 내 아이의 잦은 전시회에도 이런 아픔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가슴 한 구석이 시려오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딸아이의 그림 그리는 시간을 아이가 모르게 의식적으로 체크해 보기도 했다. 혹 너무 오래 그림을 그린다 싶으면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하다못해 식료품 쇼핑이라도 같이 나가 수다를 떨곤 했다.

그리고 어느새 2년 8개월이 흘렀다.

▲ 딸아이가 주인공으로 공연했던 음악 연극
ⓒ 김윤주
어제 저녁에는 학교에서 연례 행사의 하나로 '2학년 음악의 밤'이 있었다. 연극의 형식에 전래 동화와 음악을 삽입해 넣은 작은 음악극 공연이었다. 한 달 전쯤 아이는 자기 이름이 적힌 두툼한 연극 대본을 들고 와서는 2학년 아이들 중에 8명이 연극 공연에 뽑혔는데 이제 음악실에서 1주일에 몇 번씩 연습할 거라며 자랑했었다.

관중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내 아이 모습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2학년 아이들이 무대 뒤편에 모두 다 올라 서 있고 8명 배역을 맡은 아이들만 한가운데 앉아 있는데, 음악과 함께 딸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무대 위의 친구들과 관중석의 부모들을 둘러보며 또박또박 대사를 외기 시작하는 거다.

평소엔 말수 적고 얌전한 아이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목소리는 어찌나 야무지던지,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몸짓들은 또 어찌나 깜찍하던지…. 게다가 긴장해서 대사 잊어버린 친구들까지 챙겨가며 여유롭게 무대 위를 누비는데… 정말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놀란 나머지 45분이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다.

엄마, 제 걱정은 마세요!

미국에서 나고 자란 100명의 친구들 틈에서 주인공으로 뽑혀 멋지게 공연을 해낸 것도 자랑스럽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건, 얼굴 가득 넘쳐나던 맑디 맑은 눈부신 미소, 자신감 가득했던 몸짓들, 충분히 긴장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다른 친구들까지 챙겨가며 무대 위를 누비던 넉넉한 태도였다.

팍팍한 세상, 행여나 상처라도 입을까 노심초사하던 엄마한테 '엄마! 저 이렇게 단단하고 이렇게 행복해요.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항상 엄마보다 나은 아이 아니었던가.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며 인내심과 책임감이 엄마보다 휠씬 나은 아이가 아니었던가.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아이를 재단하려 하지 말자. 미리부터 겁먹지 말자. 세상은 도전해 볼 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내 아이는 지금 그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저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고, 끝없이 응원해 주고, 매일 꼭 안아주며 속삭여 주자. 사랑한다고, 엄마의 자랑스런 딸이 되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미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한국어교육의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