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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난설헌의 영정
ⓒ 국립현대미술관
대부분 한류 열풍이 최근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이미 17세기에 한문학의 본고장인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팬을 거느릴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국내보다 먼저 책이 나온 명나라에서는 그녀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바람에 종이 값이 올랐다고 할 정도였다. 또 그녀의 이름을 따라 작은 난설헌이라는 의미의 소(小)설헌이라고 이름을 짓는 이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그 인기가 높았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른바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셈인데 그렇다고 그녀의 글이 대중적인 인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문집을 중국에 소개한 명나라의 3대 문사 가운데 한 명인 주지번(朱之蕃)은 그의 글을 두고 "티끌 같은 세상 밖에 휘날리고 수려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으며 허심탄회하면서도 뼈가 있다. (중략) 길이 감상할 만하다"라고 높이 평했다.

허난설헌이 이처럼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뛰어난 묘사력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난한 여자의 노래'는 다른 신분의 여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된 작품으로 단순히 희소한 여성 문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문장가로서의 모습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얼마나 잘 썼는지 궁금해질 법도 하다. 본문 가운데 시 하나를 읽어보자.

연밥 따는 노래

맑고 넓은 가을 호수
푸른 옥처럼 물빛 빛나는데

연꽃 가득 핀 깊숙한 곳에
목련나무 배 한 척 매어 두었네

님을 보자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졌지

행여 누가 보진 않았나
한나절 내내 부끄러워라


짧은 글로 표현한 평이한 정경이지만 여인의 설레는 마음과 수줍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풀어낸 이의 솜씨인지 지은이의 재주가 뛰어난 것인지 글이 마음을 휘감는다. 이쯤 되니 지은이인 허난설헌이 좀 더 궁금해진다.

비운의 여인 '허난설헌'

▲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다룬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표지.
ⓒ 알마
허난설헌은 신사임당, 황진이와 더불어 손꼽히는 조선의 여류 문재(文才)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글을 통해 자취를 더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플 만큼 험하고 안타깝다.

일찍이 개방적인 가풍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남다른 교육과 사랑을 받았던 그녀였지만 결혼한 이후의 삶은 몹시 불우하고 평온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높은 명성에 열등감을 느껴서인지 남편은 바깥으로 겉돌기 일쑤였고 세상 사람들도 재주가 뛰어난 그녀를 두고 입방아를 찧었다. 위에 소개한 글만해도 방탕하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고 문집에는 아예 실리지도 못했던 작품이다.

이런 와중에 친정은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멸문 당하기에 이르고 슬하의 자녀 둘은 물론 뱃속의 아이마저 잃게 된다. 정감 있고 재치 넘치는 글은 점차 쓸쓸하고 어둡다 못해 일찍 저세상으로 간 아이들을 기리는 대목에서는 그 슬픔이 서늘하고도 깊게 가슴을 찌른다. 이런 마음의 상처와 한이 병이 되어서였을까? 허난설헌은 꿈에서 27송이 연꽃을 보고 스스로 예언한 것처럼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허난설헌은 죽기 전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해 본인이 직접 남긴 작품집은 없다. 하지만 그녀를 몹시 따랐던 남동생 허균이 외우고 있던 시와 편지에 남은 글들을 모아, 그나마 그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최근에 출간된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에는 그녀의 시와 글 가운데 가려 뽑은 27편이 실려 있다.

최근 한자 붐이 일면서 허난설헌의 한문 문학 작품집이 나온 것인가 싶지만 골치 아픈 주석이나 군더더기는 없다. 오히려 어린이를 위한 글을 짓던 이경혜씨가 풀어내서인지 정갈하게 다듬은 글이 쉬 읽히고 이해를 돕는 내용 설명도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정감이 넘친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

▲ 책에는 미술가 윤석남의 작품이 삽화로 사용되어 읽는 맛을 더해준다.
ⓒ 윤석남
- 한문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허난설헌의 글을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도 이번 책을 보고 있으면 남다른 애정과 정성이 느껴진다. 허난설헌의 글을 어떻게 소개하게 되었는지 동기가 있다면 말해 달라.
"중학생 시절 우연히 허난설헌의 쓸쓸한 삶을 엿보게 된 이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허균과 함께 거론되어 이름은 많이들 알고 있는데 정작 작품은 한문이라는 벽 때문인지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까웠다. 처음에는 번역을 생각했었는데 한문학은 동시대의 역사나 인물 등 정보가 많이 필요한 데다 주석이 너무 길어져 느낌 전달이 어려웠다. 조금 무리가 따르더라도 독자들의 접근과 이해가 쉬운 번안으로 방향을 바꿨다."

- 책의 대상이 어린이와 청소년인데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아이를 잃은 슬픔이란 주제는 낯설지 않을까 싶다. 삽화로 쓰인 윤석남의 작품 등도 역시 상당한 수준인데 오히려 성인 독자층을 겨냥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에는 나 역시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대상이었다면 내가 덧붙이고 싶었을 해석이나 내용상의 욕심이 생겼을 텐데 아이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니 더 정직하고 순수한 결과물이 나왔다. 주제에 대해서는,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것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이나 삶의 중요한 가치관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동일하게 접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피카소 그림에 어린이용이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허난설헌이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 단지 여성으로서 뛰어났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같은 여성으로서의 공감이 컸다. 하지만 허난설헌의 뛰어난 점은 단순히 여성 문학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다. '가난한 여자의 노래'처럼 다른 신분 계층에 대한 이해를, '유선사'에서 신선 세계라는 방대한 판타지를 아우르는 등 상당히 깊이 있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허난설헌이 죽기 전에 작품을 불태워 없애라고 한 것은 세상의 몰이해에 대한 환멸과 포기처럼 느껴져 안타깝다. 글쓴이로서는 그녀가 왜 그랬다고 보는가?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신선 세계, 즉 유토피아를 꿈꿨고 자신이 잠시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내 생각에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 이번 작업의 의미와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어린이나 청소년 문학은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어린이다움이라는 유형화에 갇혀있다. 이 책은 어른스러운 주제나 고전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새로운 시도인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하고 볼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허난설헌 외에도 묻혀있는 한문학의 보고(寶庫)들이 더 많이 세상의 빛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이경혜는 누구?

이경혜는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책 번역과 어린 독자를 위한 글쓰기에도 힘쓰고 있다. 어린 독자를 위한 작품 <유명이와 무명이> <선암사 연두꽃잎 개구리> <형이 아니라 누나라니까요!> <마지막 박쥐공주 미가야>와 청소년 소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등을 썼다.

최근에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한문 문헌 자료, 문학 자료를 오늘의 한국어로 풀어내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있다.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은 그 첫 결실이다.

이경혜는 청소년기 이후 마음속에 담아왔던 이 작업을 위해 허난설헌의 작품의 원전 강독, 교감, 해제를 엄밀하게 수행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과정을 엄격하게 지켜가며 김시습 작품, <여유당전서>에는 실리지 않은 정약용의 여성주의 작품, 동아시아의 한시들을 오늘의 한국어로 다듬어 '샘깊은오늘고전' 시리즈로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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