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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
아파트와 땅 집

장소를 통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박완서는 <그 남자네 집>을 통해 1950년대 한국전쟁 후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복원해준다. 남루한 기와집이 닥지닥지 붙어서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집인지 분간하기 힘든 골목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설의 첫 부분은 아파트와 땅 집에 대한 비교로 시작한다. 땅 집과 아파트는 각각 과거와 현재의 초상이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편리와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 땅 집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죽하면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소리가 자주 들리겠나.

박완서의 땅 집 예찬은 단순히 사람살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은근히 묻혀있다. 바로 '첫사랑'이다.

노인이 된 화자는 땅 집으로 이사한 후배 집에 들렀다가 과거 첫사랑의 집을 기웃거린다. 물론 그 첫사랑은 이미 그 집에 살지도 않고 이미 죽고 없는데도. 사람은 자신이 머물렀던 장소에 대한 기억을 몸에 지니나 보다.

나 역시 우연히 과거에 살았던 고향집으로 이끌려 온 적이 있다. 개천과 양옥집이 마구 섞인 아주 평범한 동네였다. 막상 내 두 눈이 마뜩찮게 마주친 건 초현대식 아파트 단지였다. 그때 느낀 상실감은 오래 두고 기억되었다.

화자의 심정도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첫사랑이 살던 집에는 전혀 연관없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첫사랑과 비슷한 좋은 사람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으리라. 과거의 첫사랑을 집을 매개로 만난다는 설렘이 이 소설의 주된 감정이다.

언제나 낭만적인 과거

화자가 사랑한 건 첫사랑만은 아니었다. 땅 집과 아파트로 대조되는 사람살이가 불러 일으킨 긴장감 속에서 화자는 과거를 낭만적으로 그리워한다. 더 이상 전쟁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경제적 생활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게 좋아진 삶은 아파트다. 현재의 땅 집은 과거의 기와집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분명히 과거를 연상시키는 무언가 존재한다.

먹고 살기 위해 양반체면 버리고 포목점을 했던 친정식구나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동생들 먹여 살린 춘희네는 1950년대 한국인의 초상이었다. 전쟁 통에 '남루'했던 삶의 고단함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화자는 첫사랑이 일깨운 과거의 삶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그 남자네 집은 화자인 노인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장작이 되었다.

"내 예상을 뒤엎고, 이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서 홀로 초연히 그 남자네 집은 그냥 조선 기와집으로 남아 있었다…… 철문 때문에 그 안의 조선 기와집은 좌우의 빌딩들과 나란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접근을 거부하는 은둔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24쪽)

화자는 마치 세상과 교감하기를 거부하듯 그 남자네 집에 빽빽하게 심어져 있던 나무를 식물도감에서 찾는 열정을 보인다. 그 나무로 집주인의 성향까지 파악하는 주도면밀함까지 보인다. 그만큼 첫사랑과 그를 둘러싼 과거에 대한 낭만적 기억이 강하다는 증거다. 그 남자와 추억이 서려 있는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기 위한 아등거림이라고나 할까.

이 소설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퇴행적인 자세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불행을 현재의 위안거리로 삼지도 않는다. 그냥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보는 심정으로 담담하게 묘사할 뿐이다. 가끔 가슴 뛰게 하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그런 거다.

몸과 마음이 다 빠져나와 기억하는 과거는 언제나 낭만적이다. 자신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으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과거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래서 기근에 먹던 꽁보리밥 같은 음식은 지긋지긋한 게 아니라, 향수음식이 되었다.

화자와 그 남자의 주 연애무대는 청계천변이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청계천이 복개되어 고가도로가 들어섰다. 장소가 사라지면 추억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했을 때 화자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이 간다. 복원된 청계천과 그 남자와 연애하던 청계천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겠지만.

"그 남자는 대청마루 가운데 기둥 먼저 쳐다보았다. 왜? 저 포탄 자국 때문에. 그 남자하고 이 집을 처음 보러왔을 때도 그는 기둥에 생생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포탄 자국에 먼저 주목하고 마음 아파했었다. 그 남자는 오래오래 마치 작별을 고하듯이 감개무량하게 포탄 자국을 쳐다보고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기둥에 포탄 자국은 없었다." (286쪽)

그 남자는 시각장애인이 되어서도 포탄 자국만 기억한다.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기식대로 과거를 이기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던 이미지, 그 파편만 기억하지 전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면 아마 미쳐버릴 게다. 그래서 적당한 망각이 필요하다. 과거에만 집착하면 미래로 나아갈 기력이 생기지 않는다.

미국으로 간 양공주

주요 줄거리는 아니지만 양공주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한국근대사의 부끄럽지만 엄연한 과거인 양공주들의 솔직한 내면이 담긴 서술에서 막막해졌다. 양공주가 어디 우리나라에만 있겠나. 미군이 주둔한 나라마다 생겨났을 거다. 한 번도 이들의 처지를 대변할 역사의 구절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박완서는 이들의 심정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들려준다.

"내가 내 이름자는 동백 아가씨가 아니라 봄 아가씨라고 해도 동백 아가씨가 나한테 어울린대. 아무튼 이모 이름을 제 딸에게 붙여주고 싶어하는 건 이모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증거 아뇨. 얼마나 고마워. 근데 그 카메리 년이 공부를 그렇게 잘해서 명문대학에서도 장학금 받고 다닌다더니 무슨 박사를 하는지는 몰라도 한국전쟁 중에 섹스 산업이 한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했나, 그런 걸 가지고 연구해서 논문을 준비한다나 봐.

걔 얘기를 들으면 한국에 산업이라고는 전무 했을 시기에 무상원조 말고는 유일한 외화벌이였을 거라는 거야. 그걸 구체적으로 산출할 건가 봐. 나야 기껏 피 에프 씨 아니면 콜포1의 백 불 미만의 월급에서 뜯어다가 우리 식구 먹여 살리고, 그 사이사이 똥갈보 소리 들어가며 주로 검둥이한테 더 싸구려로 몸 팔고. 아, 엠병, 그게 몇 푼 될까 싶은데 합치면 그렇지도 않은가 봐. 난 내 부끄러운 과거가 학문이 된다는 게 이상해……

우리 아버지 민간인 복장으로 시골로 식량 구하러 가다가 국도에서 미군 비행기 기총소사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잖아. 눈깔 뜨고 빤히 보이는 데까지 내려와서 왜 민간인한테 기총소사를 하냐 말야. 엠병, 미친 살인마들이지……

아무 데나 묻어버린 아빠의 육신이 썩기도 전에 그 웬수 양키한테 몸을 파는 내 마음이 어땠겠어. 조선 여자라면 양키 한 놈 껴안고 한강에라도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갈등 때문에 생전 불감증으로 살았단 얘기를 카메리한테 했어. 처음 입 밖에 내보는 소린데 그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어." (302∼303쪽)


화자가 미군부대에 소개시켜준 춘희의 첫인상은 말도 제대로 못하던 처녀였다. 화자는 자신이 그렇게 내몬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춘희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 나왔다. 그렇지만 춘희는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기 유학을 나온 한국인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영어를 가르치다가 양갈보 집안이라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들의 고통이 이 정도인데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박완서의 장점은 과거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담담하고 생생하게 잘 담아내는 데 있다. 이 소설을 읽는데 거의 몇 개월이 걸렸다. 단번에 읽어 나갈만한 충격적인 과거도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없다. 책을 펼쳐들면 청계천변을 노니는 연인의 모습이 시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이는 며느리의 모습이 머릿속에 삼삼하게 그려진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 그녀는 잔잔해 보이는 일상의 결을 글로 술술 풀어나간다. 도도한 화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심리묘사는 놀랄 만큼 솔직하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종의 자기검열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 그게 박완서에게는 별로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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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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