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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일간 14개국을 다닌 아프리카 배낭여행 길

카렌 블릭센 박물관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직접 밥을 지어 먹었다. 뉴케냐롯지에는 워낙 가난한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오다보니 공동의 작은 부엌과 음식 도구들이 갖춰져 있었다.

나이로비 도착 첫날, 나는 남자 대학생과 함께 숙소 근처의 식료품 가게에서 쌀과 참치통조림·소시지·계란·토마토소스 등 반찬거리와 생수 등 며칠 동안 먹을거리를 샀다. 나이로비에 머무는 동안 가능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대학생이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고추장은 예비 식량 역할을 충분히 했다.

뜸을 덜 들여서인지 아니면 석유버너의 불길이 약해서인지 밥이 설익었다. 생쌀을 씹는 맛이다. 그러나 라면국물에 말아먹으니 밥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일본 여행객뿐 아니라 대부분의 배낭 여행객은 우리처럼 밥을 지어 먹었다.

전날 재미교포 여학생이 떠난 데 이어 다음날 아침에는 나와 같은 방을 쓰던 남자 대학생이 3박4일짜리 케냐 마사이마라 사파리(동물구경) 투어를 위해 배낭을 메고 떠났다. 이 학생도 남아공까지 종단하는 여행 일정이어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으나 결국 여행 내내 만나지 못했다.

3호실에는 나와 젊은 의사, 뉴질랜드 여행객 등 3명만 남았다. 우리는 오전 나이로비 시내구경을 한 뒤 오후에는 택시를 타고 '보마스 오브 케냐(Bomas of Kenya)'라는 곳으로 갔다. 우리나라 용인의 한국 민속촌과 같은 아프리카 민속촌인 셈이다. 케냐의 각 부족의 전통적인 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은 곳이다. 보마(Boma)란 말 자체가 현지어인 스와힐리어로 집이라는 뜻.

아프리카 민속촌을 방문하다

▲ 보마스 오브 케냐의 입구 간판
ⓒ 김성호
보마스 오브 케냐로 가는 케냐타 거리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센트럴 공원과 우후루 공원이 있어 매연이 가득한 나이로비 시내의 공기청정기 같은 허파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후루(Uhuru) 공원은 '나무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환경운동가로 지난 200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가 목숨을 걸고 보존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989년 케냐 정부가 우후루 공원 부지를 외국투자자들에게 초고층 빌딩 용지로 팔아넘기려하자 왕가리 마타이는 직접 시위대를 이끌면서 온 몸으로 지금의 우후루 공원을 지켜낸 것이다.

보마스 오브 케냐는 시내 남부외곽으로 빠져 나이로비 국립공원 정문 근처에 있었다. 11개의 주요 부족 전통가옥을 잘 복원해 놓아 아프리카 각 부족의 독특한 생활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무가 우거진 입구에 들어가면서 첫 번째 만나게 되는 전통가옥은 타이타 부족의 마을이다. 밀짚으로 집을 지었고, 첫 번째 부인의 집과 두 번째 부인의 집 등으로 여러 부인의 집이 따로 있었다. 두 번째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마사이 부족 마을이었는데, 소똥으로 집을 지었고, 부인집이 남편집 보다 더 큰 것이 눈에 띈다.

그 다음은 미지켄데 부족인데, 대문 입구에 원두막 같은 감시초소가 있다. 그 다음 쿠리아 부족과 루오 부족은 모두 흙으로 집을 지었고, 지붕은 밀짚이었으며, 키시이 부족과 칼렌진 부족, 캄바 부족 순으로 집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냐의 가장 큰 부족인 키쿠유 부족은 나무기둥에 풀잎으로 지붕을 이었고, 남편의 집은 작고 부인의 집은 큰데, 남편의 집을 빙 둘러싸듯이 첫째, 둘째, 셋째 부인의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뒤편으로는 아들 집이 있고, 대문 입구에는 할머니집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각각의 부인에게 별도의 곡물창고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다른 부족과 달랐다.

그 다음 엠부 부족의 마을이고, 마지막 루야 부족 마을은 수리 중이어서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여러 부인의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대부분의 케냐 부족들이 전통적으로 일부다처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머니나 아버지, 여러 부인의 집, 결혼한 아들의 집과 결혼하지 않은 집 등이 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을 통해서는 대가족 제도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집 입구에는 가장 연장자인 할머니나 남편의 오두막이 있고, 남편 주위로 첫 번째 부인의 오두막이 있는 것은 연장자 우선의 경로사상과 가부장제이면서 본부인 우선의 아프리카 부족의 사회구조와 가족제도, 생활상 등을 알 수 있다.

마사이 부족의 소똥 집과 루오 부족의 흙집, 키쿠유 부족의 나무기둥과 풀잎 지붕 등 집짓는 재료와 자재를 통해서는 유목생활과 농경생활의 차이도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 기예단과 중국 기예단의 차이는...

▲ 부족 전통 음악에 맞춰 민속춤을 추는 장면
ⓒ 김성호
▲ 표범무늬 옷을 입고 아프리카 기예를 선보이는 공연
ⓒ 김성호
전통가옥을 구경한 뒤 이어지는 차례는 전통 공연 관람이다. 전통가옥 입구에 있는 원형극장 형태의 공연장에서는 매일 민속춤과 전통음악이 공연된다. 내가 갔을 때도 전통가옥에서 본 부족들의 민속의상을 입고 민속악기로 연주하는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케냐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43개 부족으로 이뤄진 다부족국가이다.

마사이와 키쿠유 등 여러 부족들의 전통춤과 노래가 끝나자 아프리카 기예단의 묘기가 선보였다. 기예단의 묘기는 특히 아프리카 전통춤과 곡예를 잘 조화시켜 예술적 묘미와 재미를 안겨준 공연이었다.

표범 무늬의 옷을 입고 벌이는 기예는 역동적인 아프리카인들의 본능을 잘 표현했을 뿐 아니라 묘기와 춤, 음악이 잘 어우러져 아프리카판 기예라고 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기예단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중국의 기예단이나 북한의 교예단이 고도의 훈련을 통한 인간 한계의 기술을 보여준다면, 케냐의 기예단은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동물과 같이 뛰어 노는 원주민들의 자연스런 율동을 묘기와 결합시킨 것이라는 점이다.

중국 기예단이 두 다리를 뒤로 비틀어 머리까지 닿게 하는 고난도의 기술로 관객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면, 아프리카 기예는 인간탑쌓기를 원숭이들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하듯이 하고, 둥그렇게 만든 인간원형 안을 표범이 뛰듯 넘어가서 네 발로 내려앉듯 자연스런 착지의 묘기들이 관중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도 흥겹게 한다.

공연장 2층에는 각 부족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조이 애덤슨의 그림 사진들이 공연장 전체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진본이 전시되어 있는 케냐 국립박물관의 일시 폐관으로 그림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사진이로나마 각 부족의 그림을 보니 다행이었다.

조이 애덤슨(Joy Adamson)의 그림에는 낙인이 'Joy'라고 쓰여 있었다. 새끼 사자와의 우정을 그린 소설 <야성의 엘자(Born Free)>를 쓴 조이 애덤슨은 26살 때 오스트리아에서 케냐로 옮긴 뒤 1980년 죽을 때까지 야생생물 보호에 평생을 바쳤는데,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여러 부족의 초상화를 남겼다.

그의 그림은 부족 인물도감으로 사용될 정도로 각 부족의 특징과 생김새를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원형 공연장에 걸려 있는 목에 붉은 구슬의 목걸이를 하고 검은 그릇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이는 보니(Boni) 부족 여성 원주민의 그림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살아 움직였다. 사진 속의 보니 부족은 케냐의 동쪽 해안지대인 라무 지역 북쪽의 소말리아 국경지대의 산악지대에 살면서 사냥과 자연채집 등 수렵을 주로 하는 부족이다.

김광석의 노래는 초콜릿 같은 자장가

▲ 조이 애덤슨이 그린 보니 부족의 여인초상화 사진
ⓒ 김성호
보마스 오브 케냐를 구경한 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저녁도 역시 직접 밥을 지어 먹었다. 이제 밥 짓는 일도 조금 익숙해지다 보니 밥이 제대로 익었다. 우리는 홍콩에서 온 다른 배낭여행객들과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케냐의 대표적 맥주인 터스커(Tusker)를 마시면서 케냐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나이로비의 밤거리는 강도로 들끓는 무서운 곳이지만, 뉴케냐롯지는 가족같이 포근한 여행객 숙소이다. 시내구경으로 피곤한 데다 터스커 맥주까지 곁들이자 침대에 눕자마자 곤히 잠이 들었다. 각각의 작은 침대에 4명이 같이 자는 유스호스텔 같은 도미토리 방이다.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노래 소리가 들렸다. 어슴푸레 귀에 다가오는 노래에 눈을 뜨니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이다. "흙 속으로 묻혀갈 나의 인생아…"라는 노래가 작은 스피커를 통해 방안에 퍼져 울렸다.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불행아>라는 노래였다. 꿈결에 다가오듯 그 노래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같은 방을 쓰는 젊은 의사가 틀어놓은 CD(콤팩트디스크)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의사는 역시 김광석의 열렬한 팬. 여행오기 전 김광석의 데뷔 앨범에서부터 '김광석 다시 부르기'라는 제목의 김광석 헌정노래 앨범까지 모든 노래를 한 장의 CD에 담아 왔다. CD플레이어에는 별도의 작은 스피커를 장착해 여행객 숙소가 마치 하나의 음악다방이자 소규모 김광석 콘서트장 같다.

<불행아>는 내가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처음 들었던 인생의 노래였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었던 당시를 똑똑히 기억한다. 내 마음에 그렇게 다가왔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암울했던 시절 대학에 입학한 사회과학계열 신입생 환영 노래자랑에서 한 신입생이 마치 인생의 오랜 여정을 거쳐 온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기타를 치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나는 이제 지방생활에서 벗어나 대학 초년생으로 새로운 서울 생활을 막 시작하려는 촌티 나는 어리 숙한 시골내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인데 어떻게 저런 표정하며, 저런 뜻깊은 노래를 부를까 부러워했다. 어쩐 일인지 나는 오랫동안 이 노래의 제목을 '고아'로 알고 있었다. 물론 이 노래는 한대수라는 가수가 부른 것을 나중에 김광석이 다시 부른 노래지만.

<불행아>라는 노래를 통해 인생은 참 심각하기도 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시작한 나의 대학시절은 <그루터기>와 <광야에서>와 함께 고함소리와 최루탄, 새싹의 꿈틀거림과 군화발의 짓누름, 자유를 향한 울부짖음과 광란의 폭압으로 끝났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모순 사이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모든 젊은이들이 헤맬 때 멀리서 들려오는 구원의 소리처럼 다가왔던 김광석과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김광석은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 몸부림치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초부터 가수가 아니라 친구로서 다가왔다. 현실에 타협하거나 힘에 겨워 쓰러지려던 젊은이들의 두 어깨를 따뜻이 감싸주던 그의 노래들. 그래서 나는 김광석을 '부드러운 혁명가'라 부른다.

그의 노래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 아버지 오두막이 입구에 있는 한 부족의 전통가옥
ⓒ 김성호
▲ 할머니 오두막이 입구에 있고 중간에 곡물창고가 있는 한 부족의 가옥.
ⓒ 김성호
밀려나듯 교정에서 나온 우리가 또 다른 인생을 고민할 때 서울 신림동과 봉천동의 허름한 지하 음악다방에서 손님들이 연신 뿜어대던 하얀 담배연기를 뚫고 흘러나오던 그의 노래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닌 내 친한 친구는 그때 신림동 동사무소 방위를 하고 있었는데, 봉천동에서 하숙을 하던 나를 자신의 퇴근시간만 되면 철판에 순대를 볶아 파는 신림동 극장 지하의 순대촌과 봉천동의 지하다방으로 불러냈다. 나는 오랫동안 순대와 막걸리, 다방커피 한 잔을 놓고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어야 했다. 무려 그가 방위복무를 끝내던 1년 동안이나.

<이등병의 편지>에 이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들으며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사회생활에 열중할 때는 정말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던 <서른 즈음에>가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좀 생뚱맞다 싶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불렀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라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노후연금 가입하듯 60대가 되어 꿈꾸는 그런 사랑을 30대에 미리 불러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대학 초년생 처음 들었던 <불행아>와 같은 느낌을 주는 노래이기도 했다.

"40대에 가죽잠바를 입고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뒤 60대에는 이런 멋진 황혼의 사랑을 하겠다던 그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떠났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나는 돛단배"처럼 "복잡하고 아리송한 세상"을 뒤로 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애드벌룬처럼 저 하늘로 홀연히 날아갔다.

젊은 의사가 담아온 김광석 노래 CD는 한 번 틀면 무려 8시간 정도 갔다. 밤새도록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 잠들고 다시 깨어나서 듣다하면서 새벽을 맞았다. 그의 노래에 취해 우리는 그렇게 밤을 보냈다. 아프리카에서 김광석의 노래는 고독에 지친 여행객에게 초콜릿 같은 달콤한 자장가였다.

김광석의 노래는 이처럼 우리의 젊음과 함께 했다. 어느 때는 우리의 행복보다 조금 앞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우리의 아픔보다 한 발 뒤처지기도 하면서…. 비슷한 또래였으니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기쁨과 고독을 느끼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가슴 속에 담아둘 뿐이다.

김광석과 같이 여행을 떠나던 날

▲ 나와 함께 아프리카 여행을 다닌 김광석 노래모음 CD
ⓒ 김성호
날이 밝자 대충 아침을 때운 뒤 나는 오전부터 젊은 의사가 가져온 김광석의 노래 CD를 굽기 위해 나섰다. 저녁에는 마운틴고릴라를 보기 위해 우간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이로비를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시내 힐튼 호텔 근처의 인터넷카페에 갔으나 한글로 된 노래제목을 컴퓨터가 읽지 못해 실패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야 했다. 무려 3시간이나 돌아다닌 끝에 한 인터넷카페에서 간신히 구울 수 있었다.

다음에는 CD플레이어를 사러 전자제품 가게에 들어갔다. 소니 MP3용 CD를 1175실링(147달러)에 구입했다. 카드결제가 안된다고 해서 근처 영국계 바클리 은행에 가서 시러스(Cirrus) 카드로 케냐 실링으로 돈을 인출해야 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비자카드와 시러스카드 두 개를 갖고 갔는데, 대부분은 비자카드 하나만으로도 거의 불편이 없었다.

나이로비에서는 시러스카드를 취급하는 은행이 많아 편리했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해 불편했다. 아프리카 역시 비자카드가 보편적인 것 같았다. 도난의 우려가 많은 아프리카에는 미국달러를 현금으로 많이 가져갈 수 없기 때문에 현금 인출이 가능한 카드를 최소한 한두 개 꼭 가져가야 한다. 아프리카 대도시에는 자동현금인출기(ATM)가 적잖이 설치되어 있다.

김광석의 노래 CD를 구우니 마음이 한결 든든하다. 여행의 동반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저 하늘에 구름 따라 흐르는 강물을 따라, 정처 없이 걷고만 싶구나, 바람을 벗삼아가며(불행아)" 나는 작은 배낭 속에 김광석을 태우고 떠났다. 그가 하지 못한 세계 일주여행을 대신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 모든 물품을 38ℓ짜리 작은 배낭 하나에 넣다보니 마지막에 쌍안경과 CD플레이어 등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내가 즐겨듣던 김광석의 노래 CD도 당연히 가져올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포기했던 김광석 노래 CD를 나이로비에서 다시 만나니 같이 여행을 할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거금을 투자해 CD플레이어를 산 이유이다.

실제로 김광석의 노래가 없었다면 나는 아프리카 종단여행을 마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 정상으로 가는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잔지바르 섬과 말라위 호의 푸른 물에 비친 고독감을 씻겨 내고, 나비비아 사막의 붉은 모래가 몰고 오는 여행의 피로를 날려 버려준 것은 그의 노래였다. 젊은 시절 나를 부축해주던 그는 아프리카 여행 내내 나를 뒤에서 밀어주고 있었다.

제국주의가 할퀴고 간 아프리카의 대륙

▲ 마사이 부족 마을의 입구
ⓒ 김성호
김광석과 같이 떠나는 여행은 한 때는 식민지배에 몸서리쳤지만, 지금은 내전과 빈곤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미래의 땅들이다.

내가 이미 여행했던 에티오피아는 2차 세계대전 이전 한때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았고, 역시 에리트레아와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하는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으로, 제일라(세일락) 항구의 소말릴란드는 영국령, 지부티 항구는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로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이른바 블랙아프리카 지역도 제국주의의 상처가 할퀴고 간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 케냐와 우간다는 영국령 동아프리카로 넘어갔고, 탄자니아와 르완다, 부룬디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은 벨기에령 콩고, 모잠비크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가 되었다.

말라위(옛 니아살란드)와 잠비아(북로디지아), 짐바브웨(남로디지아), 보츠와나(베추아날란드)는 영국령 중앙아프리카로, 남아공(남아공연방)은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미비아는 독일령 서남아프리카, 인도양의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령으로 넘어갔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가짜 주인끼리 바뀌었을 뿐 아프리카에 독립은 찾아오지 않았다. 독일의 패배로 독일이 갖고 있던 아프리카 영토만 영국 등 연합국 소유로 바뀌었을 뿐이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였던 탄자니아는 영국령으로 편입되고,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위임통치로, 독일령 서남아프리카였던 나미비아는 남아공연방의 위임 통치로 넘어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한참이 흘러 1960년 마다가스카르에 이어 대륙에서는 탄자니아가 1961년 독립을 찾고, 마지막으로 1990년 나미비아가 완전 독립을 하게 된다. 내가 여행하는 이들 나라 중 에티오피아와 케냐, 탄자니아 등은 소말리아, 부룬디와 함께 세계의 따뜻한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지역이다. 가뭄과 내전으로 굶어죽는 어린아이들이 속출하는 최대 기아국가이다.

아프리카 언어에 남아 있는 아픈 상처들

그들이 쓰는 공식 언어에도 식민지배의 흔적이 살아 있다. 에티오피아만 고유의 암하릭어를 쓰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와 우간다, 말라위, 짐바브웨, 잠비아, 보츠와나, 남아공, 나미비아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르완다는 프랑스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 프랑스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자 잡았다.

다만 탄자니아와 케냐만이 영어와 함께 자신들의 전통 말인 스와힐리어를 사용하지만, 문자 표기에는 영어 알파벳을 빌려 쓰고 있다. 르완다와 말라위, 보츠와나도 자신들의 전통적인 말을 공용어로 함께 사용하나 영어가 이미 압도적인 말이 되어 버렸다. 식민지배의 흔적은 이처럼 언어를 통해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언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고유의 전통이면서 문화인데, 아프리카의 고유 언어는 사라지고 영어와 프랑스어, 포르투갈어가 공용어가 되어 버린 아픈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참 막막하다.

대하장편소설 <혼불>을 쓴 작가 최명희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라고 말했다. 가까운 근세에도 만주족은 만주어를 잃으면서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한 뒤 수천 년이 흐른 뒤에도 단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유대교라는 종교 뿐 아니라 헤브라이어라는 자신들의 언어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정체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시대에 영어가 국제어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용어를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물론 아프리카가 자신의 말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가 없다보니 식민지 지배 이전에 통일된 언어체계를 갖지 못한 데다, 각각의 말을 사용하는 수십 개의 부족으로 이뤄지다보니 하나의 부족의 말을 공용어로 사용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아프리카에서 고유의 언어가 아닌 미국과 프랑스에서 들을 수 있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들어야 하는 것은 여행 내내 가장 가슴아픈 일중의 하나였다.

나는 김광석과 함께 오늘 저녁 우간다를 거쳐 체 게바라를 만나러 콩고로 간다. 콩고에서부터 다시 남아공과 나미비아, 마다가스카르까지 우리 셋이서 함께 하는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태그:#아프리카, #케냐, #김광석, #보마스 오브 케냐, #우후루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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