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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보러가자.
오늘 아침 봉오리를 닫은 장미가
햇살 아래 주홍빛 꽃잎을 열었는지…."


16세기 프랑스의 궁정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는 <아가야, 장미를 보러가자>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장미는 4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봉오리를 활짝 열었다. 붉은 장미는 프랑스 사회당(PS)의 상징이다.

대선 1차 투표 전, 고향으로 돌아온 루아얄

▲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루아얄 후보.
ⓒ 박영신
사회당 대선 후보, 장미의 여인 세골렌 루아얄이 '도시인'들을 시골로 초대했다. '도시인'은 대선 보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프랑스의 기자들이다. 프랑스의 최대 민영 TV 채널 <테 에프1>(TF1), 공영 <프랑스 2>, 라디오 <에르 테 엘>(RTL), 프랑스의 뉴스 통신사 <아 에프 페>(AFP), 일간지 <르 몽드>, <리베라시옹> 등 굵직굵직한 프랑스 언론사의 기자들이 루아얄의 귀향을 동행했다. 나는 유일한 외국인으로 이들과 함께 테제베(TGV)에 올랐다. 햇볕이 따가운 봄날이었다.

목적지는 푸아티에. 푸아티에는 2004년부터 루아얄이 지방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는 프랑스 중서부 푸아투 샤랑트 지방의 도청 소재지다. 루아얄이 참여민주주의를 시험한 지역인 까닭에 푸아티에를 아우르는 푸아투 샤랑트는 루아얄의 작은 프랑스라 할 수 있다. 정치인 루아얄의 고향은 그래서 푸아투 샤랑트다.

갖가지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대선 1차 투표 선거전 마지막 날인 지난 20일의 일이다. 차창 밖으로 노란 유채꽃의 평원이 펼쳐지나 했는데 어느새 열차는 푸아티에에 멈췄다. 붉은 티셔츠 차림의 사회당 당원들이 기자들을 태울 버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푸아티에의 중심 블로삭 공원으로 향했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걸어본 블로삭 공원은 장미로 물결쳤다. 사회당의 상징인 붉은 장미를 비롯해 파랗고 하얀 장미들도 화사하게 피어나 프랑스의 삼색기를 그리고 있었다.

미리 공원에 도착해 자리를 잡은 시민들이 친구끼리 가족끼리 평화롭게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왕년의 테니스 스타, 이제는 인기 가수로 제 2의 인생을 살고있는 야닉 노아의 흥겨운 노래가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야닉 노아는 프랑스의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대선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를 맹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르코지가 집권하면 프랑스를 뜰테다!"

이것은 사르코지와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을 동일시하는 발언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르펜이 결선에 오르자 프랑스인들은 앞다퉈 선언했다. "르펜이 집권하면 프랑스를 뜰테다!" 그래서 사회당이 집회에서 야닉 노아의 노래로 흥을 돋우는 것은 이제 전통이 되고 있다.

▲ 루아얄 후보를 응원하는 깃발과 피켓을 들고 나온 지지자들과 어린이들.
ⓒ 박영신

▲ 푸아티에의 블로삭 공원에서 열린 루아얄의 마지막 유세에 참가한 지지자들.
ⓒ 박영신

어느새 공원은 인파로 넘쳐난다. 당초 3천여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상 5천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공원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세골렌은 격렬한 싸움 뒤에 에너지를 보충하러 고향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 세 딸을 데리고 나온 자영업자 기는 1차 대선전 마지막 날 루아얄이 푸아티에를 찾은 것은 상징이라며 루아얄을 향한 신뢰를 표현했다.

'오늘 세골렌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그건 범죄'라며 호탕하게 웃는 레미는 이미 루아얄의 결선 투표를 예상하고 있었다. "사르코지랑 겨뤄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레미는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했다.

▲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레미는 말했다. "(세골렌이) 사르코지랑 겨뤄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지!"
ⓒ 박영신

▲ 루아얄을 중심으로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에디트 크레송이다. 크레송은 1991년 프랑스 사상 첫 여성 총리의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 박영신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 프랑스 사회당을 상징하는 장미. 청홍백은 프랑스의 삼색기를 상징한다.
ⓒ 박영신
공원 앞쪽에 마련된 무대에서 차례로 마이크를 잡은 루아얄 지지자 중에는 1991년 프랑스 사상 첫 여성 총리의 기록을 세운 에디트 크레송도 있었다. 크레송은 사르코지의 '열에 들뜬 선동'을 비판하며 '세골렌은 잘 하고 있다'고 지지자들을 안심시켰다.

시민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블로삭 공원에 루아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루아얄의 등장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자 시민들은 박자에 맞춰 노래하기 시작했다.

"세, 세, 세, 세골렌… 세, 세, 세, 세골렌…."

푸아투 샤랑트 지방의원들에 둘러싸여 하얀 정장차림의 루아얄이 단상에 오르자 시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세골렌을 연호했다.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말썽을 일으킨 것은 엉뚱하게도 마이크였다. 좌중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네는 루아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졌다 했던 것. 루아얄의 앞으로 바짝 몰려든 시민과 기자들이 뒤죽박죽 엉킨 가운데 마이크를 연결하는 선이 곤욕을 치른 것이다.

"마이크가 왼쪽에서는 작동되는데 오른쪽은 완전히 먹통이군요." 루아얄의 재치가 번득이는 이 발언은 공원을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세골렌 대통령'의 함성은 더욱 커져갔다.

마이크 문제가 해결되자 루아얄은 단호하게, 그러나 잠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얼굴로 '프랑스의 모든 좌파가 한 데 모일 것'을 호소했다. 좌파 지지자들의 표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친다면 결선 투표에서는 '진정한 선택'의 기회가 올 거라는 설명과 함께. 총 12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7명이 좌파 후보인 것을 겨냥한 발언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결코 기권하지 말고 투표소로 달려갑시다. 여러분은 프랑스의 역사에 매우 소중한 한 페이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루아얄은 이어서 '주식'이나 '부의 축적'이 아닌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후보가 자신이라며 '이웃을 생각하는 프랑스', '유럽에서 세계화의 물결에 대항해 싸울 프랑스'를 역설했다. '당선 가능한 후보에 투표'라는 전략 투표를 원치 않는다고 고백하며 유권자들이 '진정 원하는 후보'에 표를 던질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의 계획은 내가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프랑스 대통령들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성명이나 담화를 마무리 할 때 쓰는 인사말인 '프랑스 만세, 공화국 만세'로 연설을 마치기 전 루아얄이 던진 이 말은 며칠 전 사르코지를 향한 비판을 상기시켰다. 루아얄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그의 계획은 그 자신입니다. 나의 계획은 여러분입니다." '그'가 사르코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대통령, 세골렌…" 연호하는 군중들
ⓒ 박영신

푸아트 샤랑트의 승리를 이제는 프랑스로

"파리여, 내 고향으로 보러가자.
5년 전 무참히 짓밟힌 사회당의 장미가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 다시 피어나는지…."


루아얄은 파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선 1차 투표 직전 마지막 미팅을 정치적 고향 푸아티에에서 마무리한 것은, 그래서 여러모로 상징적이었다.

같은 날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알프코트다쥐르의 카마르그로 기자들을 불러 '정복자'처럼 말 탄 모습을 과시하던 사르코지도, 트랙터를 타고 농민의 대통령을 각인시키려 한 프랑스민주동맹(UDF)의 프랑수아 바이루도 결국 파리에 근거를 둔 정치인임을 폭로함과 동시에 파리 중심의 정치를 지방분권으로 확대하려는 루아얄의 의지를 보여준 것.

앞서 기자는 푸아트 샤랑트를 일컬어 루아얄의 작은 프랑스라 했다. 작은 프랑스는 2007 프랑스 대선에 출마한 12명의 후보 중 루아얄에게만 있는 자산이다. 그리고 성공적이라 평가되는 작은 프랑스, 푸아투 샤랑트의 경험은 루아얄이 사회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는 데 가장 큰 힘이었다.

5년 전, 대선에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당시 총리가 자크 시라크 현 프랑스 대통령에 참패한 곳, 3년 전 지방선거에서 루아얄이 장-피에르 라파랭 당시 총리를 누르고 의장에 오른 격전지 푸아투 샤랑트는 2004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의 승리를 상징하는 지방이기도 하다.

푸아티에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는 테제베 안에서 펼쳐본 신문은 대선 1차 투표 직전에 나온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로 장식돼 있었다. 여론조사기관 < CSA-Cisco >의 발표에 따르면 루아얄은 이전보다 1%P 오른 26%의 지지도를 얻어, 변함없이 27%를 획득한 사르코지와 박빙의 승부가 예상된다. 바이루는 2%P 떨어진 17%, 르펜은 0.5%P 오른 16%를 기록했다. 그리고 만약 사르코지와 루아얄이 결선 투표에서 만난다면 50 : 50으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왔다.

대선 1차 투표를 위한 선거전은 20일 자정을 기해 모두 끝났다. 이때부터는 여론조사도 엄격히 금지된다. 그리고 21일 과들루프섬, 마르티니크 등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섬을 시작으로 22일 프랑스 전역에서 대선 1차 투표가 실시된다. 오늘이다.

▲ 마지막 유세일은 20일 우파 대중운동연합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프랑스 남부지방의 한 목장에 말을 타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같은날 파리 서부지방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들과 악수하고 있는 중도파 바이루 후보.
ⓒ AP=연합뉴스

태그:#프랑스 대선, #루아얄, #장미, #사르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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