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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살아 있다.
ⓒ 유성호
'1987년 6월'을 떠올리면 습관처럼 오른손으로 왼쪽 쇄골을 더듬는다. 그곳에 손톱 크기만 하게 아로새겨진 20년 전의 상처, 그리고 밀려오는 오랜 감회와 아찔한 상상에 진저리친다. 대학 2학년생으로 학교에 있어야 할 나는 왜 서울 한복판 명동성당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지….

여느 해보다 무더위가 일찍 찾아온 87년 6월 10일. 이날은 임기 중 개헌이 없다는 4·13 호헌조치를 규탄하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있는 날이었다. 대회 전날 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시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호헌 선언 이후 각 대학 총학생회는 동맹 휴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시대'에 저항했고 캠퍼스는 이미 학문의 기능이 마비돼 버렸다. 밀도 높은 새벽 안개처럼 대낮의 캠퍼스에는 최루가스가 뒤덮여 쉬 걷히지 않았고 6월까지 저항과 물리적 진압이 반복되면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응축'되는 분위기였다.

흔히 민주화의 성지로 일컫는 명동성당에 도착했을 때 입구 계단은 이미 자민투 계열 학생들이 점거해 연좌농성 중에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진영은 크게 자민투와 민민투 계열로 양분돼 있었다. 80년대 초반 이른바 무림과 학림의 논쟁에서 파열된 이들은 이후 급변하는 정치 정세 속에서 학생운동의 양대 축이었다.

특히 민민투는 제헌의회(Constitutional Assembly) 소집을 통한 급진적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다. 이른바 CA파의 등장이다. 이런 헤게모니는 당시 총학생회를 누가 쥐고 가느냐에 따라 캠퍼스 전체의 정치의식으로 인식되는 분위기였다.

동맹휴업으로 더 이상 학교에 머물 이유가 없던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야 하는 당위성을 국민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공권력은 이를 적극 저지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소위 가투(가두투쟁) 형태로 변했다.

캠퍼스를 뒤덮던 최루가스가 이번에 도심에 어지럽게 난사됐다. 종로와 을지로, 특히 시청 주변은 게릴라와 정규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공권력에 밀린 시위대는 대열을 정돈하거나 철야농성을 위해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성당 안은 공권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극소수 공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권은 위태롭다고 생각할 때면 성당 안까지 군홧발자국을 찍어대며 집요하게 학생들과 시민들의 눈물을 요구했다. 더 이상 나라 안에는 안전한 곳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쩌면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극한의 대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극한으로 치닫는 민주 세력과 군부의 갈등

비폭력 투쟁을 기치로 내세운 자민투와는 달리 CA파는 다소 과격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프로파간다(선전선동)를 이끌어 나갔다. 이날 명동성당 집회 역시 가투를 작심하고 모였다. 그러나 평화대행진이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양상과 달리 물리력은 '일단' 접기로 했다.

앞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자민투 학생들의 집회가 끝났다. 그 자리를 CA파 계열이 채우고 앉았으나 수적으로는 자민투 학생들의 5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성당 주변을 봉쇄하는 바람에 상당수가 참석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원래 수적으로 열세인 정파였다. 또래에 비해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화를 낼 때 악착같은 면을 보이는데, CA파가 그와 비슷한 처지라고 설명할 수 있다.

집회의 내용은 거개가 비슷하다. 민중가요를 '가열 차게' 불러대다가 간간이 사회자나 참석자의 선창에 따라 정치구호를 외치고 중간 중간 연자가 나와 현 시국에 대해 성토하는. 마지막 연자는 아지프로에 능한 이가 맡는다. 분위기를 고조시켜 가투로 이어지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CA파의 정치집회 끝은 대부분 공권력과의 정면충돌이었다. '피할 수 있지만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여야만 뭔가를 이뤄낸 것으로 여겼다. '이슈 파이팅'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가투였기 때문이다. 이날 역시 CA파는 연좌집회를 끝내자마자 선두에 서서 자민투 학생들과 시민들을 후미에 달고 행진을 이끌었다.

성당 앞과 도로 양옆에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시민들이 나와 박수와 환호로 학생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40·50대 남성들이 상당수 눈에 띄여 민도(民度)가 무척 높아졌다는 놀라움과 가투의 긴장감이 머릿속에서 섞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선두는 어느새 성당 입구를 나서 롯데백화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구호와 노래가 뒤섞이고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오는 6월의 거리는 오롯한 해방구였다. 자유와 진리만이 넘실대고 은근한 혁명의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거리. 길가에 서서 굳건한 신뢰와 지지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저들. 시민들이 지지하고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저 멀리 일찌감치 진을 치고 있던 전투경찰들이 대열을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위협적인 군홧발 소리가 빌딩 숲에 반사돼 메아리친다. 평화대행진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진압에 나선 것이다. 집회신고 자체가 어불성설이던 시대였고 평화시위도 불법으로 걸면 걸리는 때였다.

"따당 땅 따당!"

성당 입구에서 20미터가 채 되지 않는 약간 내리막길을 갈 무렵 멀리서 최루탄 쏘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앞에 서 있던 사람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옆으로 굴렀다. 눈앞으로 뭔가 쏟아졌다. 그 순간 복숭아통조림 같은 깡통이 쇄골을 때렸다. 정신이 아뜩해졌다. 쇄골이 부서진 것 같았지만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직격 불발 최루탄이 쇄골을 강타

▲ 쇄골에 남아 있는 불발 최루탄에 찍힌 손톱만한 상처.
ⓒ 유성호
직격탄으로 발사된 SY-44 최루탄을 보고 앞선 사람은 용케 피했지만 내겐 너무도 급작스런 상황이라서 피할 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나를 몇몇 사람들이 옮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얼마 후였다.

6명의 아저씨들이 나를 상여처럼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이동시키고 있었다. 곁눈으로 살펴보니 좀 전에 길가에 서서 우리를 열렬히 지지해준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화가 잔뜩 난 얼굴들이다. 나 역시 고마움보단 불길함이 엄습했다. 사복경찰이었다. '민주시민'에 대한 나의 순진한 기대감은 배반감으로 바뀌면서 한순간에 무너졌다.

환자로서 후송이 아닌 실정법 위반자로 끌려간 곳은 한국은행연합회 뒷마당. 연행된 인원이 워낙 많아서 닭장차는 이미 꽉 찬 모양이다. 안정을 찾고 주위를 둘러보자 현장에서 즉석으로 약식 조서를 꾸미는 모습이 들어왔다. 왼쪽 팔을 움직일 때마다 쇄골 부위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찢어진 흰 티셔츠 위로는 검붉은 피가 적잖이 배여 나왔다.

조서를 꾸미려는 전투경찰의 말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병원을 먼저 보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주변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조서를 꾸미는 과정에서 전경이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는 순간이다. 폭력과 고통 속에 엄습하는 두려움. 빨리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나의 담당은 어디론가 무선을 주고받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고통의 강도를 물었다. 한열이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지, 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직격탄에 의한 사고는 공권력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무조건 병원에 먼저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종교시설 다음으로 안전하게 느껴진 곳이 병원이었다.

다행히 불발이라서 목숨 건져

담당 전경은 또다시 무선 연락을 주고받더니 주변 눈치를 살피곤 한적한 곳으로 이끌었다. 또다시 두려움이 음습했다. 혹시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허기지고 지친 몸을 휘청거리며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모퉁이를 돌자 담당은 3미터 가량 되는 옹벽을 가르키며 뛰어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공권력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높이도 마다지 않을 때였다. 이를 악물고 옹벽에 매달린 후 뛰어내렸다. 바닥에서 두어 바퀴 구르고는 벌떡 일어나 뛰다시피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동료들이 모여 있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던 기억. 그날 밤 하루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끙끙거리는 나를 보고선 한 친구가 말했다.

"불발탄이었으니 망정이지 터졌으면 한열이처럼 위험할 뻔했다. 불량 최루탄이 널 살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 번의 섬뜩함으로 심박이 빨라졌다. 심장의 고동 소리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한열이는 누워서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나는 살아있다. 6월 어느 날 나는 숨 막히는 조국에서 그나마 자력으로 숨 쉬며 살고 있다. 불량 불발 최루탄이 생사여탈권을 쥔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시대, 1987년 6월 대한민국의 단면이다.

한편 6월 민주항쟁은 날을 거듭할수록 대중적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군사정권을 압박했다. 그달 29일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이 발표됐다. 한열이는 7월 5일 영면했다. 나는 지금 살아서 그의 명복을 빈다. 살아서…….

덧붙이는 글 | '나의 6월 이야기 응모' 글입니다


태그:#87년 항쟁, #최루탄,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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