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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후보 4인 오는 22일 치러지는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의 주요 후보 4인. 왼쪽부터 대중운동연합(UMP)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 사회당(PS) 세골렌 루아얄 후보, 프랑스민주연합(UDF) 프랑수아 바이루 후보, 국민전선(FN) 장-마리 르펜 후보.
5년 전이다. 자크 시라크 현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2002 프랑스 대선의 강력한 후보였던 사회당(PS)의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가 4월 21일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사건. 조스팽을 제치고 시라크와 결선 투표를 겨룬 것은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사태를 4·21 정치 대지진이라 부른다.

5년 후, 4·21 정치 대지진은 2007 프랑스 대선 한가운데 망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인의 뇌리 속에 상상하기 싫은 일인 동시에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리고 대선을 이틀 남짓 앞둔 지금 프랑스는 다시 4·21의 트라우마와 마주 하고 있다.

"당선 가능한 후보에 투표 하라"

4·21 정치 대지진의 공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일반적인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빌면 '소름 끼치는' 극우당의 르펜이 다시 한 번 결선 투표에 오를 것인가. 둘째, 프랑스 최대 좌파 정당인 사회당이 이번에도 1차 투표에서 고배를 마실 것인가.

지난 17일자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여론조사기관 < LH2 >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3가 넘는 프랑스인이 르펜의 1차 투표 통과를 우려하고 있다. 78%의 응답자는 이것이 국제사회가 보는 프랑스의 이미지에 치명적이라 했고 70%는 프랑스 민주주의의 위기라 했다.

한편 사회당 후보가 1차 투표에서 탈락한다는 가정은 프랑스인에게 '대재앙'으로 인식됐다. 61%의 응답자가 프랑스 민주주의를 위해 '심각한 사건'이라 했고 77%는 프랑스 좌파에 위협이라고 했다. 77%의 좌파 지지자들이 이같은 가정에 민감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우파 지지자의 56%도 사회당 후보가 건재할 것을 희망해 4·21 정치 대지진의 여파를 실감케 했다.

어느 때보다 유권자의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선거가 바로 올해의 대선인 것이다. 이것은 유행어가 된 '당선 가능한 후보에게 투표하라'는 슬로건으로 함축된다. 적어도 사표(死票)는 줄일 것, 즉 책임있는 투표를 하자는 말이다. 사회당 제1서기 프랑수아 올랑드가 주창한 이 슬로건은 사회당 내에서 그치지 않고 올해 프랑스 대선의 화두로 자리 잡았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가 엘리제궁에 입성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이들이다.

프랑스민주동맹(UDF)의 후보 프랑수아 바이루가 사전 여론조사에서 급격히 도약한 이유이기도 하다. 바이루가 대선 1차 투표를 통과하기만 하면 사르코지건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이건 상대를 누르고 승리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뒷받침 됐다. 그러나 같은 여론조사에서 단 한 차례도 바이루가 1차 투표를 통과하지 못 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아이러니컬 하다. 지난 1월 14일 집권당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된 후 여론조사에서 지지도 1위를 고수해온 사르코지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루아얄에 밀려 바이루는 늘상 3위에 머물러온 것.

결국 오는 22일 대선 1차 투표에서 상위에 오른 두 후보가 겨루게 될 결선 투표는 사르코지와 사르코지 저지 전선의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후보를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해' 투표하기. '당선 가능한 후보에 투표하기' 전략의 실체다.

▲ 파리의 거리에 프랑스 대선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늘어서 있다.
ⓒ 한경미
사르코는 파쇼?, 히틀러?

대선 1차 투표가 가까워올수록 긴장감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긴장감은 그러나 '공포의 정치인'이라 불리는 사르코지라는 '인물'에 집중돼 있다. 사르코지 자신도 인정한 일이다.

"사람들은 내가 무섭다고 하더군요."

때문에 만약 4·21 정치 대지진 즉 집권당 후보인 사르코지와 극우당 국민전선의 르펜이 대선 1차 투표를 통과하는 사태가 다시 일어나면 차라리 르펜에 표를 던지겠다는 발언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아예 난장판을 만든 뒤 다시 5년을 기다리자는 막가파식 전략. 이런 반응은 대체로 방리외(파리를 비롯한 대도시 외곽) 지역에서 불거지고 있다.

대선 후보 총 12명의 선거 포스터가 진열된 광고판에서 유독 사르코지의 포스터가 훼손되는 이유다. 훼손된 사르코지의 얼굴에는 분노를 자극하는 낙서들이 괴발개발 그려지고 있다.

"사르코는 파쇼!"
"사르코를 카쵸로!"

카쵸는 지난 2005년 말 프랑스에서 발생한 방리외 소요 기간 내무장관 사르코지의 '카처(고압세척기)' 발언을 비아냥거린 표현이다. 사르코지는 방리외의 젊은이들을 '카처'로 청소해야할 '오물'로 취급했던 것. 심지어는 사르코지 사진의 코 밑에 일자 수염을 그려 히틀러와 동일시하는 낙서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보름 간격으로 실시되는 대선 1, 2차 투표 사이에 프랑스에서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루머도 떠돌고 있다. 일명 음모론이다. 테러라는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득을 보는 후보는 단 한 사람 사르코지라는 것. 내무장관 직을 수행하는 동안 '똘레랑스 제로'라는 구호 아래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강경한 정책을 수행한 사르코지는 프랑스 치안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치안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후보는 바로 사르코지인 것이다.

억측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난 2002년 대선이 수상쩍다. 정치 대지진 5주년을 맞아 이른바 당시 프랑스 언론의 행보가 다시 물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국립시청각 연구소(INA)의 기 피노 교수는 지난해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프랑스 최고 민영 TV 채널 <테 에프1>(TF1)을 고발한 바 있다.

<테 에프 1>의 저녁 8시 뉴스가 2002 대선 기간 동안 헤드라인으로 다룬 것은 대선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발생한 각종 범죄였다는 것. 헤드라인을 통해 프랑스의 치안 불안을 극대화한 뒤 대선 후보들의 움직임을 조명한 <테 에프 1>의 방식은 은연 중에 시청자들을 세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프랑스의 치안 상태가 엉망이군. 강력한 정부가 나와야 해!"

이같은 현상은 <테 에프1>에 한정되지 않았다. 공영 TV 채널 <프랑스 2> 또한 대선운동을 축소 보도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테러에 초점을 맞췄다. 일간지 <르 몽드>의 경우 4월 14, 15일 자를 통해 파리 교외 센-생-드니의 봉디에서 발생한 유대인 축구 클럽 습격 사태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또 다른 일간지 <르 피가로>는 스트라스부르의 크로넨부르 유대인 공동묘지 훼손 사태를 집중 조명했다.

공동묘지의 비석에 그려진 나치만자장은 프랑스인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동시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마그레브(튀니지, 알제리를 포함하는 아프니카 북서부 지역) 출신 프랑스인들을 위축시켰다.

▲ 지난달 27일 파리 북역에서 무임승차를 둘러싸고 벌어진 경찰과 이민자들의 충돌 모습.
ⓒ AP=연합뉴스
음모론, 2007 프랑스 대선을 억누르는 공포

특히 9·11 테러가 발생한 지 6개월 여가 지난 당시, 테러의 공포가 극대화된 상태였다는 점이 요긴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이라 할 사건이 터졌다. 대선 1차 투표 하루 전인 4월 20일 72세의 독거노인 폴 부아즈가 빌라 화재로 사망한 것.

피의자인 두 청년이 빌라에 침입해 반항하는 부아즈 노인을 불에 태워 죽였다는 것이 사건의 골자였다. 이것은 구멍난 프랑스의 치안에 상징이 됐으며 프랑스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헤드라인으로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범인의 실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프랑스의 '아랍 청년'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 찍힌 것과 같이.

결국 사건 직후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19.88%를 획득한 시라크와 16.86%의 르펜이 결선에서 격돌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조스팽은 르펜에 0.68%p 뒤진 16.18%를 득표했다. '우파 vs 극우파'라는, 프랑스 정치에서 볼 수 없었던 정치 대지진의 이면이라 할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2007 대선에서 발견되는 2002년의 기억이다. 치안문제는 '강력한 내무장관 사르코지의 활약'으로 대선 쟁점 목록에서 제외될 정도로 잠잠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프랑스의 언론이 치안불안에 목소리를 높인다는 혐의가 일고있는 것은 우연에 불과할까.

이를테면 지난달 27일 파리 북역에서는 일단의 청년 집단과 경찰이 대치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 바 있다. 무임승차한 청년들을 경찰이 체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프랑스의 TV 저녁뉴스는 시작과 끝 무렵에 경찰 vs '배은망덕한' 청년들의 대치를 실시간으로 '중계' 했다. 무장한 경찰이 위압적인 함성을 지르며 청년들에 곤봉을 휘두르는 장면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국제사회의 테러 보도에서도 종종 드러났다. 지난 11일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4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카사블랑카 테러, 같은 날 17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부상한, 두 차례에 걸친 알제리 폭탄 테러, 이어진 18일 단 하루만에 발생한 5차례의 자살 테러로 233명이 희생됐다는 바그다드발 비극들이 부각된 것. 친이스라엘, 친미주의자로 불리는 사르코지에게 유리한 요건이라고 음모론자들은 주장한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공화국의 권위를 회복하는데 우선권을 할애하겠다."

지난 19일 마르세유에서 열린 대선 마지막 미팅을 통해 파리 북역 사태를 언급하며 사르코지가 던진 이 발언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20일) 대선 후보들의 공식 대선운동은 일제히 마무리 된다. 그리고 오는 22일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달 6일 결선 투표가 기다리고 있다. 올해의 프랑스 유권자들도 '치안'을 선택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

태그:#프랑스, #대선, #투표, #전략,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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