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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를 내놓으라는 상소(上疏)를 도승지 이문화가 읽어 내리자 임금 곁에 있던 세자 방석은 부들부들 떨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온 것이다.

"모두 내 아들이니 어찌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너에게는 편리하게 되었다."

곁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방석을 돌아보며 달랬다. 세자 방석을 내놓으라는 방원의 요구가 옳다는 얘기다. 방석을 사지로 내보내면서 편리하게 되었다니 그렇다면 여태껏 막내아들을 불편하게 했단 말인가. 태조 이성계의 수용의 변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흘러가는 뜬구름을 바라보며 허세를 부리는 것과 같았다.

태조 이성계는 즉시 윤허를 내렸다.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었다.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다. 시기를 놓치면 끌려갈 터인데 따라가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대궐 안에 있던 정승들이 무슨 일인가를 물으니 도승지 이문화가 말했다. 도승지는 오늘날의 비서실장 격이다.

"세자를 바꾸는 일입니다."

좌부승지 노석주가 교서를 초안하여 이문화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했다. 이문화가 받지 않고 서명을 거절했다. 노석주가 이화에게 청했으나 또한 받지 않고 거절했다. 자리에 있던 여러 정승들에게 청하여도 모두 받지 아니하였다. 순리를 벗어난 정의롭지 못한 문서이므로 후대의 역사가 두렵다는 뜻이다.

"그대가 지은 글을 어찌 자기가 서명하지 않는가?"

도승지 이문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개 정국 속에서 누가 총대를 메겠는가. 간밤의 변란은 아직 불확실하다. 언제라도 뒤집힐 개연성이 있다. 서명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모두가 몸을 사리며 서명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안개정국 속에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좋습니다."

노석주가 팔을 걷어 부치며 서명했다. 좌부승지라면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당대의 엘리트다. 불확실에 운명을 걸어보는 것이다. 자신이 서명한 교서 초안을 소매에 넣고 대궐에 들어간 노석주가 임금의 재가를 받아 왔다.

"교서를 고쳐 써서 빨리 내리라."

교서를 읽어본 이문화가 말했다. 어리둥절한 노석주가 물었다.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합니까?"
"개국 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왕자와 종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어 이미 모두 살육(殺戮)되어 공히 죄를 가릴 수 없으므로 그 협박에 따라 행동한 당여(黨與)는 죄를 다스리지 말지어다." -<태조실록>

이문화가 교정하고 당대의 명필 우부승지 변중량으로 하여금 이를 다시 써서 올렸다. 임금이 시녀로 하여금 부축해 일어나서 압서(押署)하기를 마치자마자 쓰러졌다. 깜짝 놀란 시녀가 시중을 도왔지만 무엇인가 토하려고 하였으나 토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 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임금이 양팔을 내저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태조 이성계의 목구멍에 걸린 것은 이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방원이었다. 방원이 군기 직장(軍器直長) 김겸에게 무기고를 열게 했다. 갑옷과 창을 꺼내어 화통군(火㷁軍) 100여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제야 군대의 형세가 조금 갖추어지는 듯 했다.

"흥안군과 무안군은 각기 사저로 돌아갔는데 의안군 이하의 왕자는 어찌 나오지 않는가?"

갑사(甲士) 신용봉이 무장을 갖추고 대전에 들어가 방원의 말을 전했다. 평시라면 목이 달아날 무엄한 행동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장수라도 임금 앞에 나설 때는 칼을 차지 않는 것이 법도였다.

여러 왕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보루 임금 곁을 떠나면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공포심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신용봉이 버럭 화를 내며 독촉했다. 이화와 왕자들이 그때서야 몸을 움직였다. 심종은 궁성의 수문을 통하여 도망해 나가고 정신의가 꾸물거리자 신용봉이 칼자루를 만지며 재차 독촉하자 궁 밖으로 나왔다.

"후환을 없애라" 유배 길에 죽임을 당한 세자와 왕자

도당(都堂)에서 세자 방석을 내보내 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미 주안(奏案)을 윤허했으니 나가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세자 방석이 울면서 하직하니 현빈이 옷자락을 당기면서 통곡했다. 세자를 지켜내지 못한 태조 이성계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방석이 현빈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세자를 접수한 혁명군은 그를 영추문 밖으로 끌어냈다.

방석을 끌어내기 전 도당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먼 지방에 안치하자는 온건파와 후환을 없애자는 강경파가 첨예하게 맞섰다. 방석이 궁성의 영추문을 나서자 이거이, 이백경, 조박 등이 도당(都堂)에 의논하여 사람을 시켜 도중에서 죽이게 하였다.

이제는 방번이 차례다. 도당(都堂)에서 방번을 내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세자는 죽었지만 너는 먼 지방에 안치하는 데 불과할 뿐이다."

태조 이성계는 울먹이며 방번을 내보냈다. 방번이 궁성(宮城)의 남문 광화문을 나가려 하는데 방원이 말에서 내려 손을 이끌며 말했다.

"정도전이 우리를 제거하게 된다면 너 또한 면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내가 너를 부른 것인데 너는 어찌 따르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외방에 나가더라도 얼마 안 되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어젯밤 궁궐에서 일어났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채고 뒷간에서 뛰어 나올 때 방번도 같이 영추문을 빠져나가자고 권했지만 방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줄을 서지 않은 방번이 괘씸했다. 하지만 동모형제를 따르는 방번을 이해했다. 방원은 세자 방석은 미워했지만 방번은 미워하지 않았다.

방번을 끌어내기 전 도당에서 논의가 있었다. 방번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고 강화도 건너가는 길목 김포 통진에 안치하기로 결정했다. 방번이 양화진 나루터를 건너 도승관(渡丞館)에서 유숙하고 있을 때, 방간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방간이 이백경과 도당에 의논하여 후환을 없애자고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방원이 방석과 방번이 유배도중 죽었다는 말을 듣고 대노하며 이숙번을 불렀다.

"유만수도 내가 그 생명을 보전하고자 했는데 하물며 형제를 죽이려 했겠는가? 이거이 부자가 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도당(都堂)에게만 의논하여 나의 동기를 살해했는데 지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까닭으로 내가 속으로 견디어 참으면서 감히 성낸 기색을 보이지 못하니 그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 -<태조실록>

실록에 숨어있는 사실과 진실

군사들이 좌부승지 노석주, 우부승지 변중량과 남지를 끌고 나왔다. 변중량이 정안군을 우러러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공(公)에게 뜻을 기울이고 있은 지가 지금 벌써 두서너 해 되었습니다."
"저 입도 또한 고기덩이다(彼口亦肉也)."

방원이 일축했다. 육두문자는 아니지만 젊잖은 표현은 아니다. 실록에 있는 그대로다. 총 1893권 6천만 자에 이르는 실록에서 이토록 직설적인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다. 태조실록은 혁명에 참여한 하륜이 총책임자로 편찬했다.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당시 태조 이성계의 핵심참모는 셋이었다. 도승지 이문화, 좌부승지 노석주, 우부승지 변중량, 이들은 단순한 관료가 아니라 당대의 엘리트였다. 변중량은 시문에 능하고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들은 순군옥에 하옥된 연후에 죽임을 당했다. 혁명 와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장에서 죽었는데 이들은 투옥된 다음에 참형을 당했다.

변중량은 '요동정벌론'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있을 때 "임기응변 계책으로는 계속 밀린다. 옳지 못한 명령에 임시변통으로 대응하면 잇따라 따르기 어려운 요구가 있게 된다. 우리의 의사를 굽혀 먼저 겁내고 약한 형세를 보이지 말고 당당하게 나가자"며 대명강경노선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명나라에 끌려갈 위험을 무릅쓰고 곧은 소리를 했던 사람이다.

꼼수 부리지 말고 정면 돌파 하자고 당당하게 말했던 선비가 지조를 꺾었을까? 아니면 순군옥에 갇혀 회유를 당할 때 방원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으면서 절의를 지키다 참형을 당했을까? 실록이 사실이라면 고종이 1868년 그를 절의가 가상하다 하여 신원하고 이조판서로 추증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이 바로 실록의 허와 실이다.

항복문서를 받아내고 사저로 간 혁명군 총수

태조 이성계가 마침내 영안군을 책명(策命)하여 세자로 삼는다는 교지(敎旨)를 내렸다.

"적자(嫡子)를 세우되 장자(長子)로 하는 것은 만세의 상도(常道)인데 내가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장자를 버리고 어린 아들을 세자로 삼았으니 이 일은 내가 사랑에 빠져 의리에 밝지 못한 허물이다. 내가 이미 전일의 과실을 뉘우치고 또 백관들의 청으로 이에 영안군을 왕세자로 삼으니 그 덕을 능히 밝혀 우리의 사직을 진무하라." -<태조실록>

이것은 교지가 아니라 항복문서다. 상도를 벗어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밝게 보지 못한 것은 자신의 허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방원은 이 문서를 받아내기 위하여 여러 왕자들과 함께 광화문 밖 감순청(監巡廳)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동안 야영했다. 전투를 지휘하는 야전군 사령관의 다름 아니었다. 마침내 이 문서를 손에 쥐고 영안군이 내선을 받은 후에 순화방 사저로 돌아갔다.

내선(內禪)이란 임금이 왕세자에게 양위(讓位)는 하였으나 아직 즉위(卽位)의 예(禮)를 올리지 않은 것을 말함이다. 끝장을 보고 돌아간 것이다. 대단한 집념이다. 이 때 그의 나이 서른 한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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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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