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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대웅전.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의발이 모셔진 이후 사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 정윤섭
조선조 500년의 사상사는 유학과 불교의 대립 속에서 유학이 지배했다고 할 수 있지만 평민대중에게는 불교가 신봉의 대상이었다. 특히 일반 계층에서의 불교와 유교는 공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유학이 귀족계층인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불교는 서민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학은 자연 상류계층을 형성했고 불교는 하류계층에 파급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에게 불교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사대부가와 불교의 교유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학자들의 교유의 장 대흥사

이같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유학을 숭상하는 사대부들과 불교와의 교유는 단절되어 있는 듯하지만 해남 대흥사는 조선후기 유학자들과 승려들의 활발한 교유의 장이 되었던 곳이다. 이는 여러 정치·사회적 배경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불교를 배척해온 조선 사회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다.

18세기를 전후 한 대흥사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었고 초의를 중심으로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추사 김정희, 그리고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대흥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유를 가졌다. 이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를 비롯한 스님들과의 영역을 뛰어넘는 유·불의 사상적 교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의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된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또한 대흥사에서 그 인연의 끈을 맺어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 초의선사가 기거하며 차를 중흥시킨 일지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조선후기 최고의 석학들이 교유했던 곳이기도 하다.
ⓒ 정윤섭
대흥사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추구하며 차를 중흥시킨 초의선사가 그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차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교유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이를 통해 유학과 불교가 사상적으로도 교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대흥사는 18세기 이후 학문과 예술의 중심 도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처럼 유배라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이루어진 교유에 비해, 이 지역 토착 양반사대부라고 할 수 있는 해남윤씨가도 대흥사와의 오랜 인연의 끈이 맺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윤씨가의 인물들이 대흥사와 다양한 교류를 가졌음을 여러 기록과 작품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는 철저한 유학자 집안이지만 가학(家學)의 경향이 사뭇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어초은 윤효정대 에서부터 시작되어 고산 윤선도대에 그 가풍을 확립한 해남윤씨가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이라는 매우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며 또한 현실적인 학문관과 생활관을 가짐으로 인해 편향된 학문이나 사상 속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를 대표로 하는 실학적 학문경향과 예술활동 등 다양한 학문을 받아들이고 섭렵하고자 하였던 집안의 학풍에서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흥사와 인연이 깊었던 정약용은 공재 윤두서의 외증손으로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외가라는 점에서도 이러한 친밀함을 엿볼 수 있다.

고산의 대흥사와의 인연

고산은 조선 시가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듯이 문학적 업적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불가적 성격의 시를 여러 편 남기고 있다. 고산의 한시는 불교사상이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불교의 서원사상(誓願思想)이 들어 있어 고산은 불교를 일방적으로 배척했다기보다는 공존공생을 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둔사지>에는 고산이 해남에 있을 때 대흥사를 왕래하며 대흥사를 노래한 시가 있다.

누대(樓臺)사이로 산허리가 둘렀는데
청경(淸磬)은 먼 곳까지 쨍그랑거린다.
소객(騷客)이 지팡이 놓고 다리에서 쉴 제
진금(珍禽)은 새끼와 함께 물위를 스친다.
바위틈에 달이 질때 빗방울 내리고
상방(上方)의 스님네는 명연(暝烟)에 잠긴다
그 누가 방훼(芳卉)를 공곡(空谷)에 남겨두어
뜨락에 규화(葵花)와 저녁노을을 다투게 하는고.


▲ 고산과 관련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대흥사 장군샘.
ⓒ 정윤섭
고산은 대흥사 남록에 있는 도선암 우물을 늘 음용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샘의 이름을 '고산시암', '고산천' 등으로 불렀다. 도선암은 폐찰이 되고 말았는데 우물터는 있었으나 부근의 도로신설로 인하여 고산천은 물이 마르고 신설도로변에 약수터가 개설되어 해남의 약수로 이름을 날렸다. <대둔사지>에서는 고산이 항상 이 샘물을 길어다 녹차와 한약을 달여서 '고산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산이 이처럼 불교에 친화적 자세를 취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가풍이나 성장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흥사와 고산이 살았던 녹우당과의 거리상 가까움도 있겠지만 '고산유고'에 대흥사를 소재로 한 한시 3수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대둔사(大屯寺)에 노님으로써 불교에 대한 이해와 친근함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산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독학을 하였는데 11세 때 산사에 묵으며 수학하기도 하여 일찍부터 불교에 대한 친화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산의 불교 관련 시들은 다분히 풍류적이고 불교에 대한 사상적 깊이에까지는 다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시 조선사회의 숭유억불 속에서도 불교와의 친밀함이 유학자들의 의식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 고산의 아들 인미가 글을 쓴 대흥사 부도전내의 청허당대사 비
ⓒ 정윤섭
해남윤씨 인물과 대흥사

고산 윤선도 외에도 해남윤씨가 인물 중에는 대흥사와 관계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숭정(崇禎) 4년 신미년(辛未年 1631) 고산의 첫째 아들인 인미(仁美)가 쓴 '청허당대사비명(淸虛堂大師碑銘)'이 있다.

인미는 1662년(현종3) 문과에 오르는 등 능력이 뛰어났으나 고산의 당화(黨禍)로 인해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는데, 천문·지리·의약에 대한 지식이 높았으며 장유가 찬(撰)한 대둔사 청허대사비문을 쓸 정도로 필력이 뛰어났다. 이 비에서 인미는 자신을 '棠岳後學 白蓮幽人'이라고 밝히고 있어 녹우당이 있는 백련동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대둔사지> 권2에는 공재 윤두서의 아들인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의 시도 보인다.

이와 함께 근대기에 윤정현(1882~1950)은 자신이 쓴 시문을 대흥사 대웅전 앞 누각에 현판으로 남기기도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시대 유·불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유학자들과 불승들이 자유롭게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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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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