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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디아스포라'

저는 저 자신을 평가할 때 꽤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부지런함은 모든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함정이 있습니다. 특히 독서에 관한 한 게으름엔 숫제 이골이 나 있습니다. 신간평을 읽으면서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책은 곧잘 구입하는 편입니다만 구입한 책을 꼬박꼬박 다 읽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읽지도 않을 걸 뭐하러 사느냐고요? 물론 처음부터 읽지 않으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요. 오늘은 읽어야지, 내일은 꼭 읽어야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는 손이 가지 않아 버려둔 책이 한두 권이 아니랍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 등의 저자 서경식 선생이 쓰신 에세이 <디아스포라 기행>도 그런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1년 전에 산 책을 며칠 전에야 책장에서 꺼내 읽었으니 어지간하지요? 그러고 보면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이란 책도 오랫동안 제 마음 속으로부터 추방당한 채 버려져 있던 책 세계의 디아스포라였던 셈이네요.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서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서경식 선생은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그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모든 사람을 '이산의 백성', 즉 디아스포라로 규정하는 것으로 책의 첫머리를 시작합니다.

▲ 책 표지.
ⓒ 도서출판 돌베개
이 책의 저자인 서경식 선생도 자신이 '디아스포라'라는 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로서 소수자로서 겪었던 고통과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간단치 않은 생애 때문이겠지요. '유학생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20년 가깝게 옥고를 치른 서승과 서준식 선생의 동생인 그는 근대 국가권력이 행하는 폭력을 그만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2001년, 그는 런던으로, 카셀로, 브뤼셀과 오스나브뤼크 등지로 첫 번째 유럽 여행을 떠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디아스포라를 보듬어 줄 '진정한 조국'이 있기를 바라면서.

죽은 자와의 대면

그가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영국의 런던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1983년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에 있는 마르크스의 묘지를 찾아갔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가 본 마르크스의 묘지명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는군요.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_36쪽"

그러나 그가 본 마르크스의 무덤은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게 꽃다발 몇 개만 놓여있을 뿐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서경식 선생이 맨 처음 유럽 여행에서 제일 먼저 이곳을 찾았던 것은 아마도 세상을 바꾸기를 열망했던 자신을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런던의 호텔방에서 TV를 켜던 그는 이스라엘 관련 뉴스를 보다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인이며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무덤이 있는 이탈리아의 토리노를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 민족의 피난처'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때는 공격적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사태를 우려한다면서 반대했습니다.

1987년 자택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던 프리모 레비가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9ㆍ11 테러 이후 자폭이 일상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라는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죽음마저 '국민'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수렴해버리는 일본인들에 생각이 미칩니다. 그가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이란 '국민'을 하나의 유기적인 신체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이란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 가는 배타적 감정으로 간주합니다.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_59쪽"

망월동의 기억과 디아스포라의 작품들

이야기는 그가 1990년에야 처음으로 찾을 수 있었던 광주에 대한 회상으로 넘어갑니다. 그가 탄 택시가 그의 형 서준식이 고문을 받았던 광주교도소 앞을 지나갈 때 그는 많은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찾은 망월동은 산 중턱의 쓸쓸한 비탈에 늘어선 흙 봉분들이었습니다. 무덤을 뒤덮은 풀들만이 바람에 흐느끼고 있을 뿐인 곳.

그리고 10년이 지난 2000년 5월 18일, 그는 다시 망월동을 찾습니다. 기념행사에선 윤이상 작곡의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됩니다. 그토록 원했던 고국의 흙을 끝내 밟지 못하고 망명지 베를린에서 객사하고 말았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그와 같은 처지의 디아스포라였던 윤이상의 곡이 버젓이 연주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암흑은 물러갔는가, 그 아픔과 한은 씻겨졌는가를 되묻고 싶어합니다.

그가 10년만에 광주를 다시 찾은 것은 비엔날레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상을 받은 이란계 미국인 시린 네샤트의 <환희 연작>을 바라보면서 가치관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나라를 조국과 고국으로 다른 하나를 모국으로 가지고 있는 그의 삶을 떠올리지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이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다카야마 노보루의 '대지의 노래', 조양규의 '밀폐된 창고' 등을 볼 때도 그의 끈질긴 디아스포라 의식은 멈추지 않습니다.

처음 본 문승근이라는 작가의 생애를 더듬어 가던 그는 그의 '활자구'라는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 고뇌에 몸부림치던 인간이 왜 분노 대신 그렇게 정돈된 표현을 하는지 불만(?)을 털어놓기까지 하니까요.

2001년 3월 독일 카셀에서 열린 현대미술국제전 '도쿠멘타'에 갔을 때도 디아스포라 의식을 갖고 관람하는 태도만은 한결같습니다. 디아스포라인 자리나 빔지의 작품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청명한 정적, 그녀가 속삭인 것은 순수한 침묵' 등을 보며 대전교도소에서 형 서승을 면회할 때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잉카 쇼니바레의 작품에선 은폐된 식민지배의 현실을 들춰내기도 합니다.

그 밖에 추방된 자들

2002년 5월, 그는 펠릭스 누스바움이란 유대인 화가에 대해 다룰 TV 프로그램의 촬영을 위해서 촬영팀과 함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를 점령한 독일군이 강제수용소로 썼던, 공포의 대상이었던 브렌동크 요새를 방문해서 고문 시설들을 둘러보고 나서 독일 점령하의 펠릭스 누스바움의 은신처를 찾아갑니다.

그는 독일인 다수자를 향한 동화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 유지에 대한 갈등이 펠릭스 누스바움 예술의 모티프라고 판단합니다. 그 일례로 <두 사람의 유대인>이란 작품을 들지요. 은신처에 숨어 있던 펠릭스 누스바움은 결국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꿑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또한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단골이기도 합니다. 음악제에서 연주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다나에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나치의 협력자였던 슈트라우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그런가 하면 강제수용소에 대한 경험을 <죄와 벌의 피안>이란 책으로 남겼던 장 아메리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오스트리아 국민으로서 또한 '독일 문화의 적자'로서 살아가다가 어느 날 '유대인'임을 강요당한 장 아메리. 독일군이 벨기에를 점령했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프리모 레비와 거의 같은 시기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보내지만 운 좋게 살아남습니다.

책의 맨 마지막 이야기는 유대인 시인 파울 첼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2차 대전 당시 강제수용소 이송은 면했으나 강제노동에 처했던 파울 첼란. 서경식 선생은 1990년 파울 첼란의 묘지가 있는 파리의 남쪽 교외 오를리공항에서 가까운 티에의 공동묘지를 찾기도 합니다.

독일군에게 강제노동을 당하는 등 힘겹게 산 파울 첼란이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가 맨 처음 쓴 시는 독일어로 쓴 것이었답니다. 서경식 선생은 그런 파울 첼란에 대해 평하기를 모어(母語) 그 자체를 자신의 '모국'으로 삼고 시를 쓰는 행위 자체를 '모국'으로 삼아 끝없이 방황했던 사람이라고, 근대 국민국가 시대에서 추방당한 시인이라고 얘기합니다.

새삼 소수자들에 눈뜨게 하다

책의 제목은 <디아스포라 기행>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 책의 제목은 '디아스포라 예술 기행'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와 그들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시종일관 담담하게 끌어갑니다. 당연히 분노를 품고 격하게 얘기해야 할 대목에서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담담한 글이 오히려 읽는 이의 양심에 불편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가 분열돼 있는 것"이 디아스포라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추방당한 자들이나 버려지고 내쳐진 존재들에 대해 너무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제게 몹시 부끄러움을 갖게 합니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이 책을 통해서 소수자들의 삶, 디아스포라들의 비극을 알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서경식 선생은 책의 서문 '한국어판을 펴내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선생이 자꾸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서라고 말씀하시는 뜻은 아마도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라는, 종속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경계하는 것이지 속수무책으로 자신들의 생존의 기본적인 영역까지 포기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밖을 내다보니 황사가 뿌옇게 일고 있습니다. 이 자연적인 현상 외에 한미FTA라는 황사까지 지금 온 나라를 휘덮고 있습니다. 한미FTA와 디아스포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사안이지만 힘의 논리가 빚어내거나 빚어내고야 말 비극이라는 점에선 일맥상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요?

덧붙이는 글 | 디아스포라 기행/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돌베개/ 12,000원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돌베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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