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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인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는 곳, 향비묘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을 깨서 숙소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더운 날씨라 그런지 길에서 자는 사람, 출근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거리는 그리 한산하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길에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같이 달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새로 지은 아파트도 있지만 곳곳에 낡고 버려진 집들이 모래 언덕처럼 놓여 있다. 오늘은 오후에 탈 기차 시간 때문에 서둘러 향비묘를 방문하기로 했다.

▲ 이른 아침 카스시내, 운동하는 할머니
ⓒ 조수영

▲ 초록색 타일로 장식된 향비묘
ⓒ 조수영
청색으로 무늬가 그려진 타일로 장식되어 있는 정문으로 들어선다. 이 곳은 모스크와 묘지, 예배를 드리는 강경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이티가르 사원과 마찬가지로 백양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길이 이어진다.

호자집안의 묘가 있는 모스크는 초록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코란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신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등은 일체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식물의 모양이나 도형, 또는 아랍 문자를 이용해 벽과 문들을 섬세하게 꾸몄다.

모스크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에 초록색 타일을 깔고 그 위에 호자 일가 5대에 걸친 72명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이 아팍 호자의 묘이다. 보통 이슬람식 묘는 가족묘로 만든다. 왕족의 직계자손일 경우 이곳 아팍 호자의 묘처럼 사원식으로 모스크를 지어 그곳에 관을 일렬로 보관한다.

▲ 향비묘의 내부. 아팍 호자 집안의 5대에 걸친 묘가 모여 있다.
ⓒ 조수영
우리에게 알려진 이름은 향비묘이지만 원래 명칭은 아팍 호자(阿巴加墓:1622~1685년)의 묘이다. 호자는 이곳 신강 지방의 귀족으로 카슈가르에 작은 궁전을 가질 정도로 이름난 집안이었다.

호자 집안에 무하마드 호자는 사우디에서 유학을 하고, 카슈가르에 이슬람대학을 세우고 위구르어로 번역한 코란을 가르쳐 위구르 민족을 단합시켰다. 그의 아들 아팍 호자가 부친의 뜻을 기려 부친의 묘를 네 개의 첨탑과 돔을 앉힌 이슬람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이것이 아팍 호자의 묘이다.

▲ 향비묘 모스크의 천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 조수영
몸에서 천연향이 풍겼던 향비

향비는 아팍 호자의 외손녀이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으로 몸에는 항상 특이한 천연향이 풍겨나 사람들은 그녀를 향비(香妃)라 불렀다.

청나라군이 천산남로를 평정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향비는 이미 정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현혹된 건륭제(乾隆帝)는 그녀를 자금성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를 위해 궁 안에 이슬람식 집과 모스크를 지어주기까지 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신강의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었고, 그녀가 위구르 전통복장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향비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절개를 지켰다.

하루는 황제의 명을 받은 궁녀가 향비를 찾아가서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자 향비는 칼날이 시퍼런 비수를 내밀었다. 놀란 궁녀는 달아났고 이를 들은 태후는 황제가 교외로 제사 지내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향비를 불러 그녀에게 생각을 물었다. 향비는 '죽음으로 절개를 증명해 보이겠다'라며 바로 자살하였다.

실제 향비는 건륭제의 여인들의 무덤인 유릉비원침(裕陵妃園寢)속에 잠들어 있다. 하북성에 있는 유릉비원침에는 36명에 이르는 건륭제의 여인들, 즉 황후, 황귀비, 귀비, 비, 빈, 귀인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최근 어떤 중국학자들은 향비가 건륭제의 용비(容妃)였으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반란평정전쟁에 참가하는 등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단결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받아 귀인에서 빈으로 승격하였다가 더 나아가서 용비가 되었고, 위구르족 전통 복장을 하고 회족 음식을 먹으며 황제를 따라 각지를 주유하는 등 자금성에서 28년간 생활하다가 58세에 병으로 죽어 동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향비는 청나라에 대항한 위구르의 상징

▲ 카슈가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 그래서 모스크의 바로 옆에는 위구르족들의 다양한 모양의 공동묘지가 있다.
ⓒ 조수영
서로 상반되는 두 이야기는 어쩌면 향비를 바라보는 위구르족과 한족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구르족은 향비를 자기 민족의 자존심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한족은 중국 민족의 단합이라는 목적의식적 입장에서 향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저 멀리 하북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슈가르 사람들은 124명의 카슈가르 사람들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호자가문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도 카슈가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그래서 모스크의 바로 옆에는 위구르족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큰 것은 어른의 묘, 작은 것은 아이들의 묘, 꽃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부부가 합장된 묘라고 한다.

▲ 카스역. 우루무치로 가는 24시간 기차여행을 시작한다.
ⓒ 조수영
진정한 실크로드 여정이라면 카슈가르에서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 파키스탄의 이슬라바마드까지 더 나아가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가야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서쪽 끝은 여기까지다. 실크로드의 완성, 그 꿈을 훗날의 기약으로 남기고 마지막 여행지인 우루무치로 향한다.

카스에서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가는 길은 만 하루 동안 기차를 타야 한다. 시내를 벗어나니 또다시 사막이 펼쳐진다. 자세히 살펴보니 철로주변으로 마름모 무늬가 이어져 있다. 모래가 바람에 날려 철로가 묻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의 좌우에 짧은 갈대를 심은 것이다. 바람의 제방역할인 셈이다.

▲ 카스 시내를 벗어나자 또 다시 사막이 펼쳐진다
ⓒ 조수영

▲ 열차안 식탕칸의 모습
ⓒ 조수영
이젠 제법 중국 기차에 익숙해졌다. 비좁은 대합실도 요령껏 잘 빠져나가고, 열차번호도 잘 찾는다. 2층의 침대칸도 단숨에 오르고, 있는지도 몰랐던 식당칸에서 음료도 사다 먹었다. 열차에서의 마지막 밤을 위한 우리 일행의 작은 파티는 자정이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떠나는 은하철도

▲ 천산으로 가까와질수록 계곡으로 눈녹은 물이 흐른다.
ⓒ 조수영
승무원이 커튼을 열어주는 소리에 잠을 깼다. 눈앞에 펼쳐진 천산산맥과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눈부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창밖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영화속 풍경 같다. 또 다시 사막이 나타났다.

지평선 저 멀리 다른 기차가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문득 뿌연 먼지 속으로 멀어져가는 기차가 영원한 삶을 찾아 안드로메다로 떠나는 철이가 탄 은하철도999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반대편에 멀어져가는 기차가 영원한 삶을 찾아 안드로메다로 떠나는 철이가 탄 은하철도999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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