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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권 <복사골>, 다색목판, 60 x 40 cm, 2006년
ⓒ 김준권
따사로운 봄햇살 아래 연분홍색 복사꽃이 만발했습니다. 꽃이 너무 화사하여 옛 어른들은 집안 여인네들이 바람날까봐 뜨락에 복숭아나무를 심지 못하게 하는 금기를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안 단속을 한들 담장 너머로 흘러 들어오는 꽃향기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 동네의 청춘남녀들은 복사꽃 만발한 뒷산에 올라가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복사골이란 그런 곳이고, 복사꽃이란 그런 꽃입니다. 꽃이 아름다우니 꽃에 취하고, 꽃에 취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없고, 세상에 관심이 없으니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알 필요가 없는 곳이기에, 도연명은 '무릉도원'이라 했습니다. 이태백도 복사꽃 동산을 거닐다 꽃이 시드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밤에도 촛불을 켜고 놀자'고 했고,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다'라는 시구도 남겼습니다.

그런 복사골을 김준권 화백이 목판화로 만들었고, 다른 40여점의 근작과 함께 3월 28일(수)부터 4월 3일(화)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엽니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 밑그림을 판다 하여, 전시회 이름을 '화.각.인(畵.刻.人) 김준권 목판화전'이라 하였습니다.

▲ <복사골> 부분
ⓒ 김준권
열여섯 그루의 복숭아 나무로 이루어진 <복사골>은 화가가 2달 이상 공들여 만든 작품입니다. 나무 밑동과 가지 그리고 나무껍질의 형태를 모두 다르게 만들었고, 복사꽃은 꽃이 잎보다 먼저 피기 때문에 연초록 잎보다 연분홍 꽃을 훨씬 많이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꽃을 단순히 연분홍색으로만 나타내지 않고, 흰색과 짙은분홍색 그리고 검은색까지 함께 사용함으로써, 화면을 가득 메운 복사꽃의 화사함을 단순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김준권 <산에서...0703> 가운데 부분, 수묵목판, 240 x 140 cm, 2007년
ⓒ 김준권
이번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가로 240cm의 대작 <산에서… 0703>의 가운데 부분입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가 태백산맥 같기도 하고, 영주 봉황산 부석사에서 바라보이는 소백산맥 줄기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화가는 어느 특정 산맥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산의 모습을 판화로 만든 것입니다.

한반도에는 산이 많은데, 너무 많다보니 오히려 산의 의미와 이미지를 놓칠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친근하고 푸근하게 느낄 수 있는 어머니 의미로 산을 표현했다. - 화가와의 인터뷰

▲ <산에서...0703> 부분
ⓒ 김준권
이 부분은 위의 이미지보다 많은 부분이 보이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피면, 위의 <복사골>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칼질의 흔적보다는, 목판을 칼로 밀어 산을 보여주는 면과 선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정통 목판화를 고집하면서도 칼질의 흔적을 찾기 힘든 새로운 형태의 판화세계를 개척한 것이고, 이 부분이 바로 '김준권 판화'만이 갖는 독창성입니다.

▲ <산에서...0703> 전체도와 김준권 화백
ⓒ 김준권
나무판 크기의 한계와 판화를 찍어낼 수 있는 한지 크기의 한계 때문에 3장으로 나눠 작업을 했습니다. 웅장하면서도 작품성을 갖췄으니, 화가로서는 자랑스럽고 당당한 작품입니다. 가끔씩이라도 전시회를 가면 좋은 이유가, 이런 실제 크기에서 보여지는 작품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준권 화백은 이 작품을 판화로 만들기 위해, 모두 11판의 나무판을 만들었고, 한지를 판 위에 대고 찍은 횟수는 15번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앞 풍경부터 뒤 풍경까지 찍을 먹의 농담 차이에 따라 11판 만들었고, 맨 앞부분의 검은 색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부분은 4번을 중첩해서 찍었기 때문에 모두 15번의 판작업 끝에 작품을 완성한 겁니다. 김준권 화백은 이런 열정과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이 시대에 몇 안 되는 '진정한 목판화가'라고 불리기에 부족함과 부끄럼이 없는 화가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높이는 화가의 키보다 조금 작은 140cm인데, 한지로 판화를 찍을 때는 물을 흠뻑 적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고 긴 한지에 물을 흠뻑 적실 경우 헝겊보다 더 흐느적거리고, 그런 한지를 평평하게 판에 올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율도 높습니다.

판화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판만 만들어지면 그냥 막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세밀하고도 힘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 장의 에디션이 탄생됩니다. 그리고 이런 제작 과정의 어려움이 바로 목판화가가 그리 많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 김준권 <산에서...0601> 수묵목판, 40 x 30 cm, 2006년
ⓒ 김준권
이 작품은 소품이지만 먹 농담에 대한 화가의 다양한 실험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아주 엷은 먹부터 진한 먹까지 씀으로써, 먹색의 다양함을 통해 산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사실 먹의 농담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냐에 대한 문제는, 먹물로 그림을 그리던 조선시대 화가들에게도 '화두'였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모든 먹물 즉 수성판화 먹물, 한국화 먹물, 자연안료 석채, 먹을 갈아 만든 먹물 등 물로 섞어지는 모든 먹은 다 썼고, 고판화에서 사용한 검정먹보다 더 짙은 검정먹까지도 만들어 썼다. - 화가와의 인터뷰

그래서 이번 전시 작품 중 일부 작품에는, 생먹의 맛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액자에 유리를 끼우지 않은 작품도 있습니다. 작품 손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진먹의 맛을 보여주려는 의지를 통해,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먹의 농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 김준권 <청보리밭에서>, 다색목판, 199 x 105 cm, 2005년
ⓒ 김준권
작품의 명제가 <청보리밭에서>이고, 화가가 직접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해맞이 명소인 호미곶 근처)에 있는 10만평 규모의 보리밭에 가서 밑그림을 그린 후 만든 판화입니다. 그런데 보리밭과 보리가 제대로 보일질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가로 199cm의 작품을 너무 작게 줄여서 세부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이 전시회를 직접 가서 감상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 <청보리밭에서> 오른쪽 부분
ⓒ 김준권
아직 원본 크기에는 어림없지만, 청보리가 조금 보입니다. 지난 겨울 눈 온 다음 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뒷짐지고 고랑 고랑 꼭꼭 밟아 줬기에 언 땅을 뚫고 나온 보리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보리는 늦봄이 되면 우리나라 남쪽의 넓은 평야를 초록색으로 물들이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합니다.

그래서 30만평 크기의 규묘를 자랑하는 전북 고창 학원농장 보리밭에서는 보리밭축제가 열리기도 하고, 서편제 촬영으로 유명한 완도군 청산도 보리밭 그리고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 만석 보리들판에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고창 보리밭의 경우 한 달 동안의 축제기간에 30여만명이 찾아와 보리피리도 불고, 보리떡과 꽁보리밥도 먹는다니, 보리밭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옛날을 돌이켜보게 하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 <청보리밭에서> 보리 부분
ⓒ 김준권
보리 익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극사실적인 수법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극사실적인 묘사가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의 화폭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4달이 걸렸다는 화가의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힘이 드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큰 화폭에다 보리밭을 만들었을까?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큰 화폭에다 보리밭을 표현했을 때만 보리밭의 의미와 정취가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김준권 <그리움>, 다색목판, 60 x 40 cm, 2006년
ⓒ 김준권
봄이 되면 나무가지에 파릇파릇한 새 잎이 돋아 납니다. 그리고 판화가는 봄이 오면 기지개를 켜고 나무판에 칼질을 시작합니다. 겨울에는 나무가 얼어 작업이 쉽지 않아, 밑그림을 그리면서 봄이 오면 시작할 작품에 대한 구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봄을 맞는 판화가의 감회는 남다르고, 화가는 봄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화폭 가득히 담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이렇게 오고, 김준권 화백의 전시장에 가면 화사한 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07 화.각.인(畵.刻.人) 김준권 목판화전> 전시안내 

전시기간  : 2007년 3월 28일(수) - 4월 3일(화) 
전시시간 : 10:00-19:00 
전시장소 : 인사아트센터 4층 /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8 (110-300) 
안내전화 : 02-736-1020 
교통안내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사동방면 / 3호선 안국역 6번출구

<전시장에서 화가의 한정판 제작 목판화집을 구입하실 수 있고, 화가의 서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태그:#김준권, #김준권 목판화, #김준권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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