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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18일, 잿빛 건물에 연기가 솟았다. 계절은 시나브로 녹의홍상을 입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낙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초봄의 향긋한 거리는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평화로운 거리, 평화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미 문화원 옥상에선 50개의 별이 부드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연기가 미 문화원에서 솟아올랐고 소방차들의 사이렌이 공기를 찢어댔다.

세계 유수 통신사들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아래 부미방 사건)을 전 세계로 긴급 타전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단 하나였다. 반미의 무풍지대 한국에서, 친미와 반공으로 똘똘 뭉친 남한에서 '반미 행위'가 공개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사건 자체는 간단했다. 대학생 몇 명이 미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인근의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 수백 장의 반정부 유인물이 뿌려졌다. 전국 각지에 수사본부를 차린 경찰은 총력을 기울여 검거 작전을 벌였다.

사건 발생 후 14일째, 마침내 주범인 문부식이 자수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총 16명이 구속 기소됐고, 문부식의 배후 김현장을 숨겨준 최기식 신부도 구속됐다.

▲ 회색빛의 부산근대역사관.
ⓒ 김대갑

한미관계를 근본적으로 뒤돌아보는 시발점, 부미방 사건

1945년 2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이 땅에 해방자로 처음 등장했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였다. 적어도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군 작전권을 상납해도, 수천만 평의 땅을 미군이 무상으로 사용해도, 우리 '누이'들이 미군들의 성 노리개로 전락해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매트릭스에 편안하게 묻혀 살면 그만이었다.

부미방 사건은 이 매트릭스에 반기를 든 최초의 사건이자 남한에서 일어난 공개적인 반미투쟁이었다. 당시 사건 현장에 뿌려진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부미방 사건이 던져준 첫 번째 충격은 한미관계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부미방 사건의 원류는 2년 전에 일어난 광주항쟁이었다. 당시 광주는 미국이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항공모함을 파견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친미'적이었다.

그러나 광주가 무참하게 짓밟히면서 이런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군 작전권을 행사하는 미국의 동의가 없으면 신군부는 결코 군대를 광주로 출동시키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광주는 미국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광주의 인식 변화는 곧바로 반미행위로 이어졌다. 1980년 12월 9일 밤에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은 체계적인 반미투쟁은 아니었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올바른 한미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마음에서 방화했다고 고백했다.

반면에 부미방 사건은 처음부터 '반미'를 선명하게 내걸었다. 부미방 사건은 이후 이 땅에 봇물처럼 터진 반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82년 4월에는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소각 사건이 벌어졌고, 1983년 9월에는 대구 미 문화원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985년 4월에는 부산 미 문화원 투석사건이 발생했으며, 1985년 5월에는 서울 미 문화원이 73명의 대학생에 의해 점거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까지 반미운동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짙었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틀이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반미운동이었다. 이런 반미운동은 1985년에 등장한 사회구성체론에 힘입어 체계적인 사상으로 정립돼 갔다.

1985년 하반기에는 '반제민중민주주의혁명론(AIPDR)'이 등장했으며, 1986년에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이 등장했다. 그리고 1986년 공개적으로 등장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일명 자민투)에 의해 반미운동은 하나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결국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부미방 사건은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반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 전시관 내부.
ⓒ 김대갑

25주년에 다시 부미방 사건을 반추한다

2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 사건의 주역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또한 당시 사건에 관계했던 변호사와 검사들 중에는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35세의 청년 변호사였던 노무현 대통령과 상고심 대법관이었던 이회창도 있었다. 담당검사였던 최병국과 신광옥, 피의자였던 이창복 등은 국회의원이 됐다. 사상 최고의 변호인단과 가장 유능한 공안검사가 법정에서 치열한 법리논쟁을 벌였다.

부미방 사건은 역사의 고비마다, 역사의 변화마다 새롭게 평가받아야 하는 역사적 스테디셀러임이 분명하다. 단순히 반미투쟁의 시발점이 아니라 21세기의 한미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교훈으로 자리매김 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이다. 이제는 전향적으로 한미관계를 생각해야 하고,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자세에서 당당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의 이익을 위해, 우리 민족의 화합과 번영을 위해 미국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연구해야 한다.

부미방은 25년 전에 철부지 대학생이 우연히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생물학적'인 사건이었다. 아울러 21세기의 한미관계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역사적 장치이자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을 위한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질곡의 흔적 간직한 '부산근대역사관'

오이케 정미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미군장교 숙소, 미국 문화원, 미국 영사관, 그리고 부산근대역사관….

부산 중구 대청동에 있는 448평의 3층 슬래브 건물은 오늘도 오고가는 사람들을 무연히 쳐다보고 있다. 겉모습은 초라하고 어설프게 생겼다. 그러나 일본풍의 이 건물에 진득하게 묻어 있는 역사는 결코 예사롭지 않다. 1929년 처음 건립된 이 건물은 처음에 정미소였다가 이후 토지 수탈로 악명 높은 '동척'의 부산지점이 됐다.

그리고 해방 후, 당연히 우리 민족에게 돌아와야 할 건물이 미군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말았다. 이후 미국은 무려 50년 동안 이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하면서 미국문화원을 설치했다. 1970년에는 한국으로 소유권이 이전됐지만 미국은 건물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부미방을 계기로 잇달아 벌어진 사건과 부산 시민의 적극적인 반환요청에 힘입어, 1999년 마침내 우리 손에 반환돼 부산근대역사관이 됐다.

무려 70년 만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넘어온, 통한의 역사가 겹겹이 서린 근대역사관은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25년 전 그날,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아픔을 겪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민족의 아픔과 애환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근대역사관은 오늘도 말없이 이 땅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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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