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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바람이 불고 눈 소식에 영하의 꽃샘추위까지 몰려와 온 세상이 웅크리고 있는데, 서울에 히어리가 피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되었네요, 대답을 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그동안 즐겨 찾아가던 히어리 밭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 2003년, 히어리꽃.
ⓒ 김해화
▲ 2005년, 훼손되기 전의 접치재 히어리 숲.
ⓒ 김해화
히어리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입니다. 그래서 환경부에서도 히어리의 보존가치를 높게 평가해 멸종위기보호식물 2급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 근처에서 처음 발견돼 기록되었기 때문에 송광납판화로 불리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조선납판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납판화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관련 자료에는 지리산이 주요 서식지로 기록돼 있지만, 실상 히어리의 최대서식지는 히어리가 처음 발견된 순천지역의 조계산과 모후산을 중심으로 한 산기슭들입니다. 그곳에선 수백 평, 또는 수천 평에 이르는 산기슭에 히어리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 2003년, 히어리 단풍.
ⓒ 김해화
▲ 2007년 2월, 지름이 5cm가 넘지만 잘려나간 히어리 밑동.
ⓒ 김해화
지난해 순천시는 '정겨운 순천, 숲다운 숲 가꾸기'라는 사업을 시행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보여주기 위한 사업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업안내 세움간판이 순천시 서면과 주암면의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산기슭 두 군데에만 있을 뿐 아니라, 고속도로 주변에만 그 사업을 시행한 흔적이 남아있었으니까요.

숲다운 숲 가꾸기 사업이라는 것이 숲에 있는 잡목을 제거하고 바르게 자라는 나무만 남겨두는 것이었나 봅니다. 숲에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을 마치 면도하듯이 깔끔하게 베어버렸더군요.

사업을 시행한 곳에 히어리, 생강나무, 진달래, 철쭉은 잡목으로 분류돼서인지 한 그루도 남지 않았습니다.

▲ 2007년 2월, 무더기로 쌓여 있는 잘린 히어리 나무.
ⓒ 김해화
▲ 2007년 2월, 훼손된 접치재 히어리 숲.
ⓒ 김해화
히어리는 조록나무과의 떨기나무입니다. 진달래나 생강나무, 철쭉도 마찬가지지요. 떨기나무(관목)는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와서 모여 자라기에 원줄기와 가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키가 크게 자라지 않기 때문에 깊은 숲이나 그늘에서는 자라지 못하고 햇볕이 잘 드는 산기슭에서 주로 자라지요.

순천시가 훼손한 히어리 군락지 중에서 주암면의 접치재 지역은 모든 산기슭에 히어리가 폭 넓게 자라고 있어서 그 규모가 수천 평에 이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히어리 단일 군락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숲의 주인은 당연히 히어리였지요. 그런데 곧게 자라는 나무 위주로 숲 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그 숲에서 주인인 히어리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런데 순천시 담당공무원과 통화를 했더니 희귀종인 히어리가 분포되어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순천시 담당자는 8일 "숲 가꾸기 사업을 하기 전에 사전설계와 현장조사를 하는데 히어리 분포 상황이 확인되지 않았다"며 "희귀종의 경우 분포된 것이 확인되면 (숲 가꾸기 사업을 하는) 산림업체에 주지시켜 보호 조치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숲이 무엇인지, 생태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공무원들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만들고, 역시 숲이 무엇인지, 생태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숲을 가꾸겠다고 나서서 국가가 지정해 보호하는 귀한 식물을 수백 그루나 함부로 베어내 버린 것입니다.

▲ 2005년, 훼손되기 전의 접치재 히어리 숲.
ⓒ 김해화
▲ 2007년 2월, 훼손된 접치재 히어리 숲.
ⓒ 김해화
히어리는 떨기나무인 탓에 줄기가 굵게 자라지 않습니다. 땔감나무가 농촌지역의 주요 연료이던 시기에 산기슭에서 자라던 히어리가 땔감나무로 큰 몫을 했기 때문에, 접치재의 히어리 숲은 연탄이나 기름보일러로 연료가 바뀐 1970년대 후반부터 30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베어내 버린 밑동의 지름이 약 5∼6cm 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서식지가 마을 우회도로로 쓰이고 있는 옛 고속도로 주위여서 접근성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서식 밀도도 매우 높기에, 쉽게 다가가서 히어리의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곳이었습니다. 히어리가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단 하나 뿐인 식물이니 접치재는 알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히어리 집단서식지였던 셈입니다.

보호지역으로 지정해 적절한 보호시설을 갖추고 널리 알리기만 해도, 접근성이 뛰어나서 관광 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뛰어난 생태자원을 순천시가 스스로 나서서 나랏돈을 들여 파괴해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2007년 2월, 히어리가 잘려나간 텅빈 숲.
ⓒ 김해화
환경부에 부탁드립니다.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돼 있는 히어리 군락지를 훼손한 순천시에 대해 적절한 책임을 묻고 책임자들을 처벌해주십시오. 그리고 순천시 조계산과 모후산 일원에 히어리 서식 관련 생태조사를 실시해 적절한 보호조치를 취해서 더 이상 히어리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이미 순천시에 의해 훼손된 주암면 접치재 지역과 승주읍 조계산 지역의 히어리 자생지도 다른 나무를 심기 위해 뿌리를 파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베어내고 남은 밑동에서 자라는 새순들이 다시 숲을 이루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도, 잃어버린 숲을 되찾는 데는 다시 30년쯤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 2005년, 접치재 히어리의 환한 꽃등불.
ⓒ 김해화
히어리가 피었다는 전화가 왔지만 내겐 히어리를 보러갈 곳이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쓰인 사진들은 순천시가 숲가꾸기 사업으로 훼손해버린 순천시 주암면 접치재 히어리 자생지에서 찍은 것입니다.


태그:#김해화, #히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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