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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2월 26일 가게를 접던 날의 열쇠
ⓒ 김현자
지난해 2월 26일. 16년째 해오던 가게를 접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경기가 풀릴까? 지금만 견디면 나아지겠지…'

이렇게 1년 반 동안 지루한 희망을 되풀이 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라 솔직히 후련했다. 그리고 1년. 가게를 붙잡고 있을 때보다 생활은 더 궁핍해졌고, 궁핍한 만큼 매사에 짜증이 날 때도 많지만 놓지 못하고 계속 붙잡고 있었다면 더 많이 곪았을 거라는 생각이 하루하루 힘든 날의 위안이 되고 있다.

화재로 신혼 단꿈은 무참히 깨지고

신혼 9개월 째, 시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 불이 났다. 1991년 3월 31일. 봄바람이 유독 심하던 날이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가족이 직장에 나간 텅빈 집에 난 불이라 입은 옷 외에 우리 가족이 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혼의 단꿈이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희미한 불씨로 가물거릴 뿐이었다.

마실 나간 제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라면을 끓여먹는다고 이웃의 여섯 살짜리가 낸 불이었다. 3가구가 전소했는데 또 다른 이웃에도 그날따라 할머니만 집에 있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남편은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첨가제를 수입하여 카센터 등에 납품하던 중이라 창고에 있던 물건까지 모두 타면서 화재의 손실은 훨씬 컸다.

직원이 낸 인명사고 보상 문제로 신경을 쓰던 끝이라 살던 집터까지 팔았지만 우리 부부에게 남은 빚은 1억3000만원. 내가 갚아야 하는 빚은 상대편 장부에 살아있고, 내가 받을 수 있는 돈의 근거가 되는 장부는 대부분 타고 없는 처지였다. 우리가 받아야 할 돈보다 더 적은 돈을 내밀면서 우기는 사람도 있었고, 화재 소문을 듣고 수금을 미루는 카센터도 생겼다.

▲ 힘든 작업을 하던 중에 마시던 커피 한잔
ⓒ 김현자
직장인들의 초봉이 40~50만원선이었던 1991년 당시, 1억이 넘는 빚은 엄청난 압박이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우리 부부는 겨우 누울 정도의 사글세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 년 후 막노동 등으로 어렵게 모은 돈으로 남편은 자동차용품 노점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동전치기 군것질거리나 싼 옷, 포장마차 정도가 노점의 주요품목이어서 우리의 장사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 자동차 보급률은 낮았고 자동차용품이란 말조차도 없었다. 카센터 등에서 향수나 핸들카바, 브러쉬, 전구 등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가 국내 자동차용품 노점의 시작이고 '자동차용품'이란 말의 원조다. 여하간 장사는 뜻밖에 잘 됐고, 전국에 자동차용품점 붐이 일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모방했고 남편에게 찾아와 자동차용품 배선 등을 배워갔다.

그렇게 몇 년 고생한 덕분에 자동차 한대와 물건값 50만원으로 시작한 자본은 보유 물건 5000만원대에 이르렀고 단골도 많이 늘었다. 빚도 점점 줄어들었고 사글세를 전세로 옮길 무렵 둘째가 태어났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폼이 나지 않는 노점이었지만 어지간한 점포보다 훨씬 많은 단골손님이 있었다.

자동차용품점이나 카센터 등에 납품까지 하다 보니 남편 혼자서만 할 수 없는 처지라 잘 아는 동생을 직원으로 썼다. 하지만 몇 달 후 동생이 그만두었을 때 쓰라린 배신을 맛봐야만 했다.

받아야 할 물건 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아 웃돈을 챙기고, 인근에 자동차용품점을 낸 뒤 지점이라며 단골을 끌어가버렸다. 직원이 필요했지만 사람을 쓴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인건비를 줄여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내가 직접 일을 돕기로 했다.

IMF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던 그 해, 1997년 2월 24일. 첫째는 5살. 둘째가 15개월이 되던 무렵이었다.

제일 바빴던 1997년

▲ 돈을 참 많이 벌어준 작업대
ⓒ 김현자
'빚을 좀 미루고 가게를 낼까? 아니,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노점에서 좀 더 고생하는 거야. 남들 보기에만 번듯하면 뭐해. 내 실속이 중요하지.'

형편에 따라 어머니 댁과 이모에게 맡겨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장사를 할 수 있는 점포를 내고 싶었다. 우리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훨씬 번듯한 가게를 낼 때마다 마음이 우울하고 가게를 내고 싶어 마음이 흔들렸지만 있는 빚에 다시 빚을 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편 혼자 물건 매입부터 소매, 납품까지 하다 보니 문 여는 시간이 불규칙했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매달리면서 문을 여닫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남자들도 하지 못하는 작업을 여자인 내가 꼼꼼하게 해준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만큼 단골도 늘었다.

하루 종일 땡볕에 까맣게 그을리다보니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모습이 돼 갔다. 매일 되풀이 되는 험한 작업으로 손도 거칠어졌다. 자동차 용품을 판매하는 곳이 주변에 많이 생겨 경쟁자가 늘었음에도 손님은 갈수록 늘어 1997년 IMF무렵부터 3년 동안 제일 많은 돈을 벌었다.

IMF. 어음 부도를 내고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도망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는 사람 중에도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사업 실패로 술만 마시다가 죽었다며 부음소식이 오기도 했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회사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그리고 1999년 2월. 남편이 그렇게 내고 싶어 하던 가게를 열었다.

'이제 이만하면 된 거야. 그래,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덜 힘들 거야.'

2004년. 남편은 그동안 고생한 내게 차 한대를 사주겠다며 견적을 뽑아 보기도 하는 등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자만했던 걸까?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만한 적이 없는데. 4월 18일 일요일 낮 1시 30분. 다시 화재가 났다. 결혼 이후 두 번째의 화재였다.

고생한 보람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 2006년 2월 26일 접은 가게 일부
ⓒ 김현자
전소. 이번에도 이웃집 잘못으로 화재가 났다. 가진 것이라곤 입은 옷에 119에 신고를 하면서 들고 나온 전화기 하나. 14년 전의 화재 후에 간신히 일어났던 남편은 쓰러졌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에 화재를 한 번 겪을까 말까하다는 데 두 번이나 화재를 겪는 것을 본 주변 사람들은 혀를 찼다. 몇 년 간 노점, 땡볕과 모진 비바람 속에 고생한 것이 너무 억울했다. 주변에서는 식구 모두 건강한 것이 다행이라며 위로했지만 헤치고 나가야 하는 현실은 하루하루 혹독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하는 현실이 있었다.

처음 화재 이후 빚 갚는데 몰두하다보니 크게 저축한 돈이 없어서 싹싹 긁어 복구비를 마련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복구비를 최대한 줄이려고 남편이 직접 복구현장에 있다 보니 나 혼자 가게를 해나갔다. 시동 경보기 작업 등 섬세하고 복잡한 차량배선작업을 내가 하지 못하다보니 손님은 점점 줄어들어 매출은 형편없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두 달 만에 복구가 끝나고 우리 가족이 한집에 살게 되었지만 수세미 하나부터 아이들 학용품까지 처음부터 새로 갖추어야 하니 들어가는 돈은 끝이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훨씬 많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없는 돈을 쪼개 가족들 옷을 사야 하는 처지라 늘 조바심뿐이었다. 화재로 한번 어긋난 돈의 양은 더 많은 틈을 벌리며 더욱 크게 어긋날 뿐이었다.

화재로 인한 공백으로 기운 가게는 계속 기울고 그에 따라 돈에 대한 압박은 훨씬 커졌다. 우선 급한 불을 꺼보려고 한번 받기 시작한 현금서비스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있었다. 한 달 두 달 돌려막기를 하면서 줄여보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소방차 경적 소리만 나면 멀쩡하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리면서 건강도 바닥을 향했다. 실낱같은 희망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깜박 졸기라도 하여 놓치고 말면 영영 헤어나지 못할것 같은 아득한 날들이었다. 이제 고백하건데 몇 번이나 삶을 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삶과 운명에 대한 오기가 치솟았다. 밤새 숨죽여 울다가 그렇게 다시 모질게 일어나는 아침이었다.

임대료와 관리 비용을 계산해보니 한 달 평균 120만원에서 150만원. 휴일에도 아이들만 두고 번 돈의 대부분을 카드 수수료 등으로 만지지도 못한 채 흘리고 있었다.

"가게 접자. 지금은 좀 쉬었다가 훗날 다시 시작하자."
"그래, 150만원 남에게 주지 말고 덜 벌고 그만큼 아이들과 함께 있자. 건강이라도 챙기자."

우리는 1년 전에 그렇게 가게를 접었다. 가게를 접은 지 지난 2월 26일이 꼭 1년. 가게를 할 때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수입이 없다보니 늘 돈에 쪼들렸다. 하지만 가게를 공연히 접었다는 후회는 없다. 남편도 같은 눈치다. 적게 벌지만 몸이 덜 힘들다.

바닥을 경험했더니 희망이 비로소 보이더라

▲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간판
ⓒ 김현자
불이 나면서 우리의 경제사정은 5년 전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제 불황속의 화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첫 화재를 겪었을 때의 불황은 엄살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IMF때보다 훨씬 극심하다는 이 경제 불황에 하루하루가 위태롭지만, 2004년 4월 영영 놓아버리고 싶었던 희망을 우린 다시 붙잡고 있다.

17년 전의 화재가 나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었다면 3년 전의 화재는 삶과 세상의 가치와 깊이를 가르쳐 주었다. 깨질 만큼 깨져 보니 남는 것은 어떻게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남 때문에 두 번이나 세상의 가장 밑바닥까지 넘어져 보니까 반대로 나에게는 훨씬 모질어지고 남에게는 훨씬 관대해지는 것 같다. 세상과 삶의 깊이는 절망 속에 있었던 걸까?

내가 살아 온 내력을 모르는 친구나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나이 40 넘은 내가 지금처럼 사는 것이 한심스럽다는 눈치다. 글쎄? 아직 나에게 남은 삶과 기회는 충분하니까. 힘든 만큼 크고 강하게 얻은 이 자신감을 화려하게 꽃피울 날을 기대하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이 희망을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절망 속에서 만든 빛나는 이 희망을, 절망 속에 서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알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살아 온 모습을 지켜보았던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절망을 느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는 단 한번도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음을, 이야기를 몇 번이고 망설였던 이유는 제 남편에게는 저와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내 이야기를 풀어 놓는 이유는 지금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제가 절망속에서 놓지 않았던 희망은 작은 용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태그:#IMF, #화재, #1997년, #자동차용품점,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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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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