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국보 제226호인 창경궁 법전인 '명정전'
ⓒ 서종규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창경원이다. 서울에 있는 동물원인 것이다. 코가 엄청 길다는 코끼리도 있고, 목이 너무 길어서 하늘을 찌른다는 기린도 있는 곳이다. 동물의 왕 사자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곳이라고 늘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그냥 동물원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을 알았겠는가. 일제가 궁궐을 짓밟아 동물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냥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동물원으로만 알았던 것이지. 그래서 더욱 3·1절이 되면 창경궁에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짓밟힌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기라도 해야 그 부끄러움이 씻겨질 테니까.

▲ 보물 제384호인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 서종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말까지 창경궁은 그대로 창경원이었다. 동물의 울음소리, 배설물 냄새, 벚꽃놀이, 오락 기구 등 유흥지로 흥청대던 창경원은 바로 일제에 의하여 짓밟힌 우리나라의 궁궐이다.

작년 도쿄에 있는 일본 천황이 사는 집에 가 본 일이 있다. 천황의 집은 약 4km 정도의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반인들은 그 연못 밖에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 천황이 사는 집은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1년에 2번인가 개방을 한다고 하는데, 모든 외래인은 접근을 막고 있다.

자기 나라 왕이 사는 곳은 그렇게 철저하게 일반인 접근까지 막은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의 궁궐은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땅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짓밟아 놓으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치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 보물 제386호인 창경궁 '옥천교'
ⓒ 서종규
창경궁은 처음에 '수강궁'이었다. 1418년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생존한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궁궐이다. 그 후 성종 15년에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 등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으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던 것을 광해군 때에 다시 복원하였다.

이러한 우리의 궁궐 '창경궁'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일제의 지배하에 놓인 1909년에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고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였다. 1911년에 일제는 궁내에 박물관을 설치하면서 '창경원'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가 파괴하고 변형시켜 동물원과 유기장으로 사용되었던 조선왕궁인 '창경궁'을 1981년 '창경궁 복원 계획'에 의하여 1983년 12월부터 1986년 8월까지 '창경원'을 원래의 모습인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중창공사가 진행되었다. 궁내에 있던 동물원과 놀이터 시설을 철거하고,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월랑 등을 중창하면서 조선궁궐의 옛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 창경궁 명정문 행각 기둥
ⓒ 서종규
지난 25일(일) 오후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찾았다. 보물 제384호인 홍화문은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다시 광해군 때(1616년) 재건된 것이다. 2층으로 된 이 문은 기세가 굳세고 장중미가 살아 있어서 창경궁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느끼게 하여 주었다.

홍화문으로 들어가면 처음 나타나는 것이 '옥천교'이다. 궁궐을 지을 때 정문과 법전 정문 사이에 하천이 흐르게 한단다. 이것을 '금천'이라고 하였는데, 백성이 사는 구역과 임금이 사는 구역을 경계하는 상징성이 있고, 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몸가짐을 삼가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금천에 놓은 다리가 보물 제386호인 '옥천교'이다.

▲ 창경궁 명전정 천장 장식
ⓒ 서종규
'명정문'을 지나면 바로 국보 제226호인 '명정전'이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명정전'은 성종 때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1616년) 다시 재건되었다. 창경궁의 으뜸가는 건물로 현존하는 궁궐의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임금의 즉위식 등 중요 행사가 열린 곳이다.

명정전 내부를 볼 수 있는데, 임금이 앉아서 집무를 보는 용상이 아직도 화려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용상 뒤에는 해와 달의 그림이 있는 '일월곤륜도'가 정교한 필치와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여 장중한 모습으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천장의 여러 장식들도 그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는데 손색이 없었다.

▲ 창경궁 문정전
ⓒ 서종규
명정전을 지나 차례대로 궁궐들이 나타난다. 창경궁 편전으로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문정전', 임금의 경연이 이루어지던 공간으로 학자들이나 관료들과 함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 '빈양문'을 지나 임금이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던 신하들을 만났던 '함인정'이 있는 광장으로 나간다.

함인정 앞에는 약 300여년이나 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바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간다'는 '주목'이다. 그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많이 늙어 보였다.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의 기둥은 나뭇잎이 약간 남아 서 있었으나, 하나의 기둥은 거의 기운 상태에 나뭇잎도 없었다.

▲ 창경궁 함인당 앞에 있는 300여년된 주목
ⓒ 서종규
함인정 옆에 '경춘전'이 서 있고, 함인정 뒤에 '환경전', '통명전', '양화당'이 있다. 그 아래에 영조가 거처하던 '영춘헌'과 '집복헌'이 있다. 창경궁의 내전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왕비가 생활하였던 '통명전'은 내부가 공개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살펴본 궁궐들이 대부분이다. '영춘헌' 뒤로 올라가면 보물 제846호인 '풍기대'가 있다.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하여 세운 받침대이다. 풍기대 옆에 성종의 태를 묻었던 석실인 '성종태실'이 있다.

성종태실에서 내려가면 '춘당지'가 나온다. '춘당지'란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의 연못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은 '권농장'이라는 논이 있어 임금이 경작하고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가늠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일제는 이곳에 큰 연못을 파고 일본식 정원으로 바꾸어 놓았단다. 그 뒤 1986년 창경궁 복원 공사 때 우리의 전통 조경수법으로 다시 조성한 연못이다.

▲ 왕비가 생활하였던 창경궁 '통명전' 내실
ⓒ 서종규
연못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아직은 메마른 모습이었지만 가지가 약간 봄기운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춘당지 주변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경궁을 산책하다가 잠시 쉬었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이 된 것이다.

춘당지 위에는 식물원이 있다.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식물원이다. 일제가 조선의 궁궐에 세운 동물원과 식물원 중 남아있는 잔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100여 년 전의 건물이 된 것이다. 식물원 내의 식물들은 세월을 앞서가서 화려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 창경궁 춘당지
ⓒ 서종규
식물원을 돌아 '종묘'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다 보면 보물 제851호인 '관천대'가 있다. 조선시대 천문관측대로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관천대는 숙종 때(1688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일제 때 한 번 이전된 것을 1970년대 후반이 이곳에 옮겨 왔다는 것이다.

창경궁 유물을 답사하는 발걸음은 아쉬움과 그리움을 밟고 지나왔다. 일제의 짓밟은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 짓밟힌 역사가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궁궐들은 모두 유물이 되어 관리만 되고 있었다.

▲ 보물 제851호인 관천대
ⓒ 서종규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