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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은 오늘날 경제대국 중국을 건설한 덩샤오핑이 사망한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3억 중국 인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중국을 미국과 필적하는 패권국으로 변모시킨 덩. 오마이뉴스는 덩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광안(廣安)시를 방문한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 기사를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 덩샤오핑은 황제였다. 중국 현대사에서 황제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마오쩌둥과 덩 밖에 없다. 사진 오른쪽부터 덩샤오핑, 마오쩌둥, 류사오치, 천이, 저우언라이, 주더.
ⓒ 모종혁

미국의 세계적 언론인이자 중소문제 전문가인 해리슨 솔즈베리는 1992년 일생일대의 역작을 한 권 출판했다. <새로운 황제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에서 솔즈베리는 두 명의 공산주의 중국 황제를 해부해 나갔다.

11세기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에는 "폭력을 방지하고 해악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며, 선행을 보상하고 악행을 벌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자―이런 사람이라면 가히 황제로 불릴 만 하다"고 정의했다.

솔즈베리는 중국 현대사에서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장쩌민(江澤民) 등은 이 개념에 부합되는 황제로 모자람이 많고 오직 마오와 덩만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국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농민혁명으로 농민·노동자제국을 건설한 마오와 그 후계자 덩. 그들은 공식적으로 황제는 아니었지만 봉건 제국의 여느 황제만큼 절대적인 권력과 막강한 권한으로 중국을 장기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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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①]더이상 그를 그리워하지않는다

▲ 광안 덩샤오핑 옛집에 보존된 그의 방. 덩은 집안의 장남으로 혼자 방을 쓰면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 모종혁
공산 중국의 두 황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BRI@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쓰촨성 광안시 시에씽진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주변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쓰촨 동부지방과 충칭시는 중국 인민해방군 지도자인 주더(朱德)와 천이(陳毅)의 고향이기도 하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덩 집안은 객가의 핏줄이 닿는 가문이었다. 덩의 아버지 덩원밍(鄧文明)은 머슴과 소작인을 둔 소지주로, 네 명의 아내까지 있었다. 덩원밍이 둘째 부인에게서 큰 아들인 덩샤오핑을 얻었을 때,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경찰서장 역할까지 하면서 위세를 자랑했다.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덩은 아버지의 권유로 15세에 충칭의 프랑스어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근공검학(勤工儉學, 일하면서 공부한다) 운동에 호응하여, 덩도 1920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힘들고 고된 프랑스 노동현장에서 덩은 마르크시즘에 눈을 뜨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자가 됐다.

프랑스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에서 큰 영향을 미친 이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다. 덩은 프랑스에서 5년 3개월 동안 체류했다. 이를 통해 덩은 외국생활이 전혀 없는 마오쩌둥과 달리 드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나라의 이점을 배우지 않는다면 결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재직시 덩샤오핑이 거주한 숙소의 복원현장.
ⓒ 모종혁
▲ 덩이 베이징에서 근무했던 사무실도 검소하다. 그가 쓴 일상용품과 사무용품은 광안 덩샤오핑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 모종혁
팔로군 정치위원으로 군부인맥을 다지다

1926년 프랑스를 떠나 신생 사회주의대국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수학한 덩샤오핑은 1927년 긴 해외체류를 끝내고 귀국하여 본격적인 공산혁명의 길에 나섰다. 중국에 돌아온 뒤부터 10년 간 덩은 중국 공산당의 한 젊은 간부에 불과했다.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결혼에 2번 실패한 것과 1933년 당내 권력투쟁에 의해 쫓겨나고 투옥까지 된 것이었다. 덩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의 실각과 복권을 되풀이 하는데, 이 때가 처음이었다. 가정적으로 불행하고 정치적으로도 순탄치 않은 그 시기 덩은 마오쩌둥의 정치노선을 줄곧 지지함으로써 중요한 권력적 토양을 다진다.

1936년 여러 신화들로 포장된 홍군의 대장정을 덩도 무사히 완주했다. 이 때부터 사회주의 중국 건국까지 덩은 관료가 아닌 군인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류보청(劉伯承)이 사단장으로 재임한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으로, 덩은 중일전쟁 시기 모든 시간을 전선에서 보냈다.

중요한 군사작전에서 여러 번 승리하여 이름을 날린 129사단의 정치위원 생활은 덩에게 일생일대의 분기점이었다. 그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의 말처럼, 군사와 정치의 긴밀한 관계를 정확히 파악했다. 또한 자신이 정치 지도자로 확고히 발돋움하는데 기여한 군부인맥을 형성했다. 1940년 평생 반려자인 쭈오린(卓琳)을 만나 결혼한 것도 행운이었다.

▲ 서남지방을 통치하는 당 제1서기로 재직할 시기 덩은 일생 중 가장 권세를 부리며 호화롭게 지냈다.
ⓒ 모종혁
"저 작은 친구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1946년부터 49년의 국공내전 시기 덩샤오핑의 군대는 연전연승의 빛나는 업적을 이뤘다. 류보청과 덩의 제2야전군은 중국 화중, 화남, 서남지방 등을 잇달아 해방시켰다. 그 공로로 덩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식전에 참석했고, 쓰촨·꾸이저우(貴州)·윈난(雲南)·시캉(西康, 티베트) 등 서남지방 4개성을 통치하는 당 제1서기에 올랐다.

1952년 마오쩌둥의 부름으로 베이징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덩은 실질적인 중국 서남지방의 왕으로 거주지인 충칭에서 권세를 부리며 호화롭게 지냈다.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덩은 마오와 류사오치(劉小奇), 저우언라이의 후원 아래 중국 최고지도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마오는 일찍이 덩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1957년 소련을 방문한 마오는 흐루시초프에게 동행한 덩을 소개하면서, "저 작은 친구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는 장제스 정예군의 1백만 군대를 궤멸시킨 사람이오, 저 사람 앞에는 밝은 미래가 있소"고 말했다.

▲ 덩샤오핑이 말년 내내 타고 다닌 홍치(紅旗) 자동차.
ⓒ 모종혁
그러나 1958년 마오가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중국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다주자, 덩은 이를 치유하기 위해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제시했다. 원래 쓰촨의 속담이기도 한 흑묘백묘론은 1962년 덩이 공산당 중앙서기처 회의석상에서 처음 제시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덩의 실용주의정책은 곧 마오의 미움과 질시를 받게 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오자 처절한 보복을 당한다.

세 번 쫓겨나고 컴백하여 황제가 되다

1968년 만 62세의 나이에 장시(江西)성 생산건설병단의 노동자로 하방당한 덩샤오핑은 자신이 따랐던 류사오치와 달리 죽음은 면했다. 두 번째 정치적 실각이었던 이 시기 덩은 일생 최대의 고난과 아픔을 인내하면서 보냈다. 1973년 파탄에 이른 경제 상황을 염려한 마오쩌둥의 의해 복권된 덩은 베이징으로 되돌아왔다.

▲ 문화대혁명 시기 덩샤오핑은 62세의 나이에 하방당해 일생에서 가장 고난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 모종혁
덩은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되살리기 위해 실용주의정책을 실시하지만, 다시 마오의 눈밖에 나서 세 번째의 실각을 하게 된다. 1976년 공산주의 중국의 건국 황제 마오가 죽자, 이듬해 덩은 세 번째 복권을 하면서 명실공히 마오의 뒤를 잇는 황제로 등극했다. 그 뒤 덩은 흑묘백묘론에서 한발 더 앞서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과 선부론을 내세워 중국을 변혁시켰다.

덩은 무소불위의 황제이자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후계자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을 단칼에 내쫓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정통성 유지를 위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던 마오에 대한 평가를 "공로 7할, 과오 3할"로 하여 여전히 공산주의 중국의 '국부'로 자리매김시켰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장쩌민을 내세우고 21세기 지도자로 후진타오(胡錦濤)까지 발탁할 만큼 용의주도했다. 그는 황제가 죽은 뒤 권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무상함을 깨닫고 자신의 신격화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공산당 1당 독재와 100년 흔들림없는 경제발전을 위해 1989년 텐안먼(天安門)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총과 탱크로 진압했다.

▲ 1992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의 완수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남방지역을 다니면서 장쩌민을 다그쳤다.
ⓒ 모종혁
남순강화로 개혁완수하고 후진타오를 발탁하기도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학살한 텐안먼사건 5개월 뒤 덩샤오핑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텐안먼사건후 보수세력이 시장경제의 싹을 죽이려 하자, 1992년 1월 덩은 남방지역을 방문했다. 덩은 더욱 강력한 개혁개방을 촉구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발표, 장쩌민으로 하여금 개혁드라이브를 추진토록 압박했다.

덩은 죽음을 앞두면서 홍콩의 반환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으로부터 평화적인 방법에 따라 되찾은 홍콩의 대지를 걸어 자신의 또다른 업적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1997년 2월 19일 덩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공산주의 중국의 황제였던 덩이 자신이 집무했던 베이징에서 붕어(崩御)했을 때 기자는 그 현장에 있었다. 덩의 죽음을 알리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순간, 베이징은 적막과 슬픔의 도시로 변했다. 흥청대던 술집, 유흥업소는 순식간 문을 닫았다. 가게, 상점, 식당도 적잖이 철시에 들어가거나 문을 연 곳은 먹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숨죽이며 침묵을 지켰다.

떠들썩했던 거리는 고요했고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도 웃는 낯빛으로 다닐 수 없었다. 13억 경제대국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이 한 인물을 그처럼 추모했던 것은 마오쩌둥 사망 이래 전무후무했다. 덩샤오핑, 그는 정말이지 진정한 황제였다.

▲ "샤오핑, 안녕하세요?" 1984년 중국 국경절 퍼레이드 당시 베이징대학생들이 덩에게 바친 소박한 헌가. 13억 중국인들은 여전히 덩에게 이런 헌가를 바칠 것인가?
ⓒ 모종혁

태그:#덩샤오핑, #황제, #10주기,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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