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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서울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몽양 여운형
ⓒ 여운형 기념사업회
“오늘은 그 이름을 몽양 여운형 선생이 생후 121년만에 서거 후 60년만에 그의 특출 위대한 인간과 삶이 무한대의 축복을 받는 뜻 깊은 날입니다. 과시 경천동지(驚天動地)파천황(破天荒)의 날이라 하겠습니다. …중략… 몽양선생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비록 2등급이지만 서훈을 받은 것은 재작년 2005년입니다.

그때까지 60년동안 선생은 잘못된 정권과 보수언론 때문에 빨갱이 공산당 폭도라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써왔습니다. 이 비열한 냉전용어는 8.15해방 전 일제가 즐겨 써온 적색이란 말의 변용으로 대표적인 일제산재 말입니다.…중략… 하지만 지금 을사오적의 후예들인 친일친미수구배들은 4천만 민족이 쌓아올린 모든 민주화 투쟁 결실물을 뒤집어엎으려고 발광하고 있습니다.

민족과 역사의 바른 전진을 가로막는 반역망동은 반드시 무위참패로 끝날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이 그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몽양 선생의 비서를 지낸 이기형 시인이 그의 수상을 축하기 위해 쓴 헌시(獻詩) ‘위대한 거성의 빛’처럼 몽양은 죽는 순간까지 민족을 위해 일하고도 60여년 가깝게 누명을 쓴 채 역사의 어둠 저편에서 억지로 망각되어 있었다.

그런 몽양이 (사)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등 항일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단체들로 구성된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로부터 신간회창립80주년을 기념하는 민족공동체상의 첫 수상자로 결정되어 15일 오전11시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이 상을 받았다.

몽양이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해방 후 좌우합작을 통한 단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서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찰악대가 ‘독립군가’를 연주로 시작된 이날 행사에서 몽양을 대신해 이 상을 받은 여인영씨(여운홍(몽양의 동생)의 손자)는“돌아가신 당시부터 오도된 역사 속에 숨죽인 채 말도 못한 채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큰할아버지(몽양)가 200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 2급을 추서받으면서 비로소 역사의 양지로 나온 이후 오늘 민족공동체 상이라는 큰상을 받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몽양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르린 올림픽의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실어 민족정신을 새롭게 일깨우는 등 조국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제와 싸워왔다.

해방전에는 ‘건국동맹’을 조직해 독립된 조국을 준비했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사회 혼란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가 극심한 분열을 하자 좌우통합을 위해 진력을 다하던 중 1947년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6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몽양은 일찌감치 술과 담배를 배워 그의 주량이 근동에 소문이 날 정도였으나 ‘을사늑약’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술, 담배를 않겠다며 딱 끊었다고 한다.

독립이후 친지들이 이젠 마시라며 권했지만 나라가 통일된 다음에 마시고 피우겠다며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알려지고있다. 그는 조국을 위해 기호품까지 멀리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다그쳐 온 것이다.

신간회 창립8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장인 김원웅(열린우리당) 의원은“우리나라가 평화강국으로 우뚝 서고 세계발전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민족의 대통합과 상생을 요구한다”며 “몽양은 일찍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몸소 실천한 선각자로 ‘민족공동체상’의 첫 수상자로 수상하게 된 것은 매우 뜻 깊고 당연한 일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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