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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리 동천석실 입구의 돌다리를 건너는 중
ⓒ 김창오
2007년 1월 29일 오후 1시 서울, 인천, 김해, 광주 등지에서 8명의 늦봄학교 아이들(1기· 2006년 중 1입학생)이 전남 해남터미널에 모였다. 3박4일 섬기행에 함께 할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의논하여 모둠장, 글, 살림, 요리, 치료, 통신 등의 일꾼을 정하고 기행을 준비해 왔다. 방학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은 반가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볼을 비벼대기까지 한다.

해남읍에서 학교 봉고차를 타고 30여분, 연희가 멀미 때문에 구토를 하고 말았다. 창문을 열 틈도 없이 옆자리의 섬강이가 오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친구들은 가지고 있던 휴지를 모아 섬강이의 옷을 닦아주었다. 섬강이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기숙사 공동생활을 하면서 쌓은 우정 덕택이리라.

@BRI@보길도행 배를 타자 아이들의 얼굴에는 들뜬 표정과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도착할 때까지 내내 객실 밖 난간에 기대어 다도해 풍경을 감상한다. 섬과 섬 사이에 뱃길만 빼고는 온통 부표들이 바다를 뒤덮고 있다. 아이들은 저게 뭐냐고 묻는다. 미역과 톳을 키우는 양식장을 처음 본 것이다.

넙도를 거쳐 장사도를 지나 4시경에 보길도 청별항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지도를 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일정을 정했다. 먼저 통리해수욕장을 거쳐 예송리까지 가기로 했다. 신발 끈을 동여매고 걷기 시작했다. 썰물로 너른 갯벌이 드러나 있는 해변 따라 아이들은 무거운 배낭도 아랑곳 않고 웃고 재잘대며 길을 걷는다.

도시에서 자라온 아이들에게 시골의 학교생활은 힘들었을 것이다. 늦봄학교에서 보낸 지난 1년은 바로 거친 자연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한 적응 기간이었다. 땅을 일구어 농작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수업을 한다.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생기고 흙과 자연의 소중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또 기행수업은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더 넓은 세상과 만나게 해준다. 혼자서 하는 여행도 좋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모둠기행은 책임감과 공동체성을 길러주기도 한다.

그동안 몇 차례의 기행과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섬기행도 '걷기'이다. 차창 밖으로 휙휙 사라지는 숲만 바라보는 '차타기'에 비해, 걷고 있는 이 아이들은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본다. 나무 아래 숨어 자라는 들꽃도 보고, 호수에 이는 잔물결과 수면 위에 비치는 하늘과 구름과 햇빛을 감상하고 있다.

아이들은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갈대의 서걱거림을 들으면서 걷고 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들려주는 섬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봄을 기다리는 왕벚나무의 꽃망울과 낭창하게 늘어져 있는 가로수 나무 가지를 만져본다. 나무 몸통의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만한 영성과 감성의 훈련이 있을까?

통리 해수욕장에 이르자 아이들은 배낭을 집어던지고 바닷가로 뛰어간다. 하얀 모래 위에다 친구들 이름을 새기거나 조개껍질을 줍고, 조약돌을 주워 물수제비 놀이를 하며 바다와 논다. 한참을 이렇게 놀다가 예송리를 향한다. 예송리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길이 험한 대신에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언덕길을 오르는 아이들의 호흡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잠시 쉬어 갔으면 했으나 아이들이 계속 가자고 한다. 이왕 걷기 시작했으니 목적지까지 쉬지 말고 가야 한다나?

예송리를 알리는 입석을 보고 정자마루에 짐을 내려놓자 동쪽으로 탁 트인 남해바다, 언덕 아래 예송리 갯돌 해수욕장이 초승달 모양으로 내려다 보인다. 선경이다. 아이들은 입을 벌려 그 장관을 맞는다. 글(기록)을 맡은 아이는 부지런히 뭔가의 감상을 쓰고 사진을 맡은 아이는 풍경을 담는다.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느낄까?

▲ 예송리 바닷가에서 해맞이 명상을 하고 있는 아이들
ⓒ 김창오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예송리 바닷가로 나갔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해변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통리와 중리의 해수욕장은 하얀 모래인데 이곳은 둥글둥글한 조약돌(몽돌)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몽돌 해변가를 걸었다. 둥근 달이 무인도 위로 둥실 떠 바다를 흰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달빛 어린 밤바다를 마주하고 섰다.

잔잔히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결을 따라서 뒤척이는 몽돌 구르는 소리가 감미로운 선율로 다가온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겨울 밤바다를 응시한다. 친구들과 서로 장난치고 재잘대던 좀 전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이 아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이 섬은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인데 이렇게 밤에 바닷가를 거닐어도 무섭지 않을까?" "무섭지 않아요" "마음이 편안해요" "왜?" "친구들과 함께 있잖아요." 그렇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할지라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좋은 이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최고의 명당이리라. 아이들은 잡은 손을 더욱 꼭 쥔 채 다정스레 걷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두들 바닷가에 나갔다. 바다 저 멀리 태양이 머리를 구름 위로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 지난 밤이 달맞이 명상이라면, 오늘 아침은 해맞이 명상이다. 쏴∼아∼쏴∼아 파도소리, 차르르르 차르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를 다시 들으며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주홍빛으로 물든 아침 바다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적자산 정상인 격자봉(430m)을 넘어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곡수당터와 낙서재터가 있는 부용리를 가기로 했다. 산행에 앞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산행을 할 때는 여유로움을 잃어서는 안 된다. 빨리 도달하려고 욕심 부리면 조급해지고 피로가 빨리 온다. 정상 정복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산과 친해질 때까지 호흡을 가다듬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이렇게 1시간 정도 지나면 몸이 가벼워지면서 비로소 산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적자산은 보기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등산로가 험했다. 워낙 가파른 산이라 10분 남짓 걷자 아이들이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연희가 숨쉬기가 곤란하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른다. 그 후로는 10분 걷고 5분 쉬는 산행을 했다. 1시간 넘게 걸었는데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도중에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온 비옷을 꺼내 입었다. 그런데 비옷을 입고 조금 걷다 보면 구름이 걷히고 다시 햇빛이 난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변덕이 심한 바닷가 날씨에 투정을 부리면서도 뒤로 처지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다. 2시간 남짓 걸었을 즈음에 2개의 조그마한 돌탑이 있는 봉우리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아뿔싸, 수리봉(406m)이었다. 정상까지는 아직 멀고 아이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격자봉으로 가는 대신에 수리봉에서 큰길재를 지나 부용리로 가기로 했다.

내리막길이라 힘은 덜 들었지만 길이 미끄러웠다. 한참 내려가니 짙푸른 동백나무숲이 우리를 반긴다. 휴식을 취했다. "애들아, 라면 5봉지가 있는데 생으로라도 그냥 먹을까?" 살림꾼인 준혁이다. "그거 오늘 저녁에 부대찌개 재료잖아?" "배가 고프니 그거라도 먹고 힘내자" 아이들은 숲 속에 앉아 생 라면을 우두둑 우두둑 뜯어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큰길재를 지나 부용리에 가까워지면서 아이들은 점점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오래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말을 잃게 된다. 깊은 고요함 속에 있을 때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오솔길을 걷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숲 속을 지나는 바람소리와 화음을 맞춘다.

아이들은 직접 밥도 짓고 마을산책도 하고...

▲ 백도리 솔개를 넘어 송시열 글씐바위를 향해 걷고 있는 아이들
ⓒ 김창오
산행 4시간만에 부용리 들목에 도착했다. 윤선도의 자제 학관이 살았다는 곡수당 집터가 마을 초입에 있고 실개천 너머 격자봉 아래 산기슭에는 윤선도가 말년을 보내다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낙서재(樂書齋)터가 있다. 고산 윤선도는 51세가 되던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에 심한 풍랑으로 제주를 가지 못하고 보길도에 상륙했다. 보길도(甫吉島)에 정착한 고산은 정착지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짓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낙서재(樂書齋)라는 집을 지어 살다가 85세에 눈을 감았다.

밭두렁을 한참 걸어 내려가 울창한 동백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부용동을 만난다. 산세가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윤선도가 지은 이름이다. 큰 후박나무 아래 평상에 짐을 풀었다. 종한이와 산하는 민가에 가서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다른 아이들은 마을을 산책한다. "오늘 점심 뭐니?" "볶음밥이요." 입학 처음에 산하와 종한이는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 종한이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 기발한 발상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며, 산하 역시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농담도 잘한다. 큰 돌 위에다 당근과 감자를 올려놓고 칼로 채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머금어지며 대견스러운 생각이 든다.

섬강이는 샘터에서 물을 떠 왔다. "이 물먹을 수 있어요?" "물맛 좋은데. 마셔도 괜찮겠다" 이 말에 물통을 들고 가서 물을 가득 채운다. 연희, 소정, 재경, 송현, 준혁이는 동네 외양간에 있는 송아지를 보고 신기해한다. "엄마소와 송아지, 와 예쁘다!" "지푸라기 줘 봐" 아이들은 지푸라기를 소 입에 넣어주려 애썼지만 부용리의 소들은 낯선 늦봄나그네들을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송아지는 큰 눈을 굴리며 엄마소 뒤로 몸을 숨긴다. 아이들은 애가 닳아 송아지를 부르고 또 부른다.

산을 오를 때와는 달리 아이들은 피곤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빽빽한 동백나무숲으로 들어서니 빨간 꽃들이 땅 위에 수북히 쌓여 있다. 동박새 지저귀는 소리가 숲 속에 가득한데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 동백꽃 하면 고창 선운사나 강진 백련사를 떠올리겠지만, 보길도 부용동과 세연정의 동백꽃은 가슴 떨리게 아름답다. 말 그대로 동백(冬柏)꽃이다. 한겨울인 1∼2월에 만개하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의 또 다른 별장 동천석실(洞天石室)로 발걸음을 옮기며 빨간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꽃길을 지난다. "동백꽃이 다른 꽃들과 다른 점이 뭘까?", "겨울에 피는 꽃!", "또?", "...", "벌과 나비도 없는 이 겨울철에 도대체 수분(受粉)을 어떻게 할까?"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동박새!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꽃 속에 부리를 넣고 꿀을 따먹지. 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기지. 그러면서도 꽃을 손상하거나 향기를 빼앗는 법이 없지" 아름다운 공생관계이다.

동천석실 정자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부용동의 형세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적자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영락없이 한 송이 연꽃 생김새이다. 아이들은 짙은 초록색으로 채색된 부용리을 내려다보며 탄성을 지른다. 뒷산은 온통 소나무 숲이고 마을 안쪽은 울창한 동백 숲이다. 마을 앞 들녘은 짙푸른 보리와 마늘, 그리고 자운영 등이 어우러져 마치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 도대체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이다. 5시가 넘어 산을 내려가 부황리 세연정으로 향한다. 길가에 보이는 여러 식물들의 이름을 묻고 답하며 한참을 걸었다. "이렇게 걸으니까 진짜 기행을 하는 느낌이 들어요" 소정이의 말이다.

고산에 대한 아이들의 다양한 평가

▲ 명사십리 해변에서 해맞이 명상을 하고 있는 아이들
ⓒ 김창오
세연정은 주변 지형의 특색을 그대로 살려 자연스러움을 훼손시키지 않은 원림이다. 세연정은 3월말의 풍경이 뛰어나다 한다. 이 때면 보길도의 동백꽃들이 저가는 때다. 게다가 비가 흠뻑 내린 다음 날이라면 세연정 주변을 돌며 흐르는 시냇물이 넉넉해진다. 이 때 붉은 동백꽃들이 연못 위로 뚜욱뚝 떨어진다. 수 천 송이의 붉은 꽃들은 연못에 담긴 물의 흐름을 따라 연못 주변을 붉게 물들인다. 세연정은 황원포구에서 내린 방문객이 고산의 낙서재가 있는 부용동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길목에 있다. 윤선도는 심혈을 기울여 이 원림을 가꾸고 정자를 지었다. 세연정 주변에 무희들이 춤을 출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인 동대와 서대를 만들고 회수담이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의 수량을 조절하면서 다리 역할을 하는 판석보(굴뚝다리)를 만들었다. 재력도 재력이지만 풍수와 조경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 없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원림을 조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고산은 이 세연정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고. 음악을 연주하며 어부사시사를 가사로 노래를 부르게 했으며 기생들에게 군무를 추게 했다. 아이들은 세연정에 대한 설명 글을 읽어가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조시인 고산 윤선도와 화려한 누정에서 기생들의 춤을 바라보며 호사로움을 만끽하던 윤선도의 모습이 중첩되는 듯 하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들은 보길도 고산 유적지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당시의 세도가인 이이첨에게 대든 것이 대단하다. 그 당시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아니었겠는가'(종한, 재경) '할 일이 없었나보다. 말년에 그렇게 호사스럽게 산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연희) '은둔 생활을 하기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했어야 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섬강) '똑똑하고 정의로운 면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많은 재산으로 가난한 민중들을 도왔더라면 더 훌륭했을 것이다'(소정) '그 시대에 그처럼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나도 재미있게 놀았을 것 같다'(산하) '대단한 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호사로운 생활을 한 것이 맘에 걸린다'(송현)

셋째 날 아침, 세연정을 다시 산책한 후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는 백도리를 향했다. 부황리 동구 밖을 지나는 참에 몇 분의 할머니들을 만났다. 어린 학생들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동정 어린 말씀을 한마디씩 건넨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우리 마을을 찾아줘서 참말로 고맙소이. 그란디 짐이 무거워서 으짜까이" 주민들 말과는 달리 백도리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어촌은 한가로운 모습이다. 따뜻한 양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을에서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묵묵히 걷고 또 걷는다. 2시간 가까이 걸으니 백도리를 알리는 입석이 나오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앞으로도 더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시 청별항까지 걸어간다면 도저히 2시 배를 탈 수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일정을 논의했다. "4시 배를 타면 어떨까?" 차라리 차분히 걷자는 내 제안이 몹시 서운했던지 그 동안 힘들어하던 연희가 기어이 울음을 비치고 말았다. "그것은 처음 계획과 다르잖아요. 갈 때는 걷지 말고 차를 타요." 순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기행은 때로 힘든 상황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여유롭고 즐거워야 한다. 기행이 고행(苦行)과는 다르지 않는가? 결국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꽤 경사가 있는 솔고개를 넘어가니 아담한 마을이 나온다. 가까이 가서 보니 10호 정도 되는 마을인데 그 절반은 폐가가 되어 있었다. 농어촌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동네 앞의 산기슭을 끼고 10분 정도 걸으니 탁 트인 바다와 가파른 절벽이 나온다. 맞은편에 소안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는 깎아지른 바위 아래에 평평하고 넓은 너럭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송시열 글씐바위’이다.

조선 숙종15년(1689년) 때 왕세자 책봉 문제로 당파간에 논쟁이 심화되었을 때, 반대 상소문을 올린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 길에 보길도를 지나다 이 곳 백도리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83세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이때는 윤선도가 낙서재에서 운명한 지 18년 후였다.

우리를 성숙하게 함 보길도 기행

▲ 보길도 적자산을 오르다 잠시 쉬는 중
ⓒ 김창오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당대의 두 논객의 흔적이 보길도에 남아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몹시 흥미롭다. 두 사람은 봉림대군의 사부를 지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80이 넘은 나이에 한 사람은 보길도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고, 또 한 사람은 귀양길에 잠시 들러 흔적을 남겼다. 송시열은 부용동 맞은 편 끝에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시를 지으면서 먼저 떠난 윤선도를 생각했으리라. 정적의 무릉도원이 있던 곳을 머물다 가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이 노 정객은 제주도에 유배된 지 1년도 못되어 다시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는다. 80이 넘은 노인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는 권력의 비정함이여!

하지만 정작 송시열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 허무하다. 이것을 보려고 이 고생하면서 여기까지 걸어왔는가?" 아이들의 허무하다는 볼멘소리를 듣다보니 문득 묘한 느낌이 든다. 물론 성격은 다르겠지만, 400년 전 송시열이 느낀 허무함과 지금 그가 써놓은 시를 보러온 아이들이 느끼고 있는 허무함 사이에 어떤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청별항,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세연정에 찾아온 육지 손님들을 배웅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아이들 역시 보길도 기행을 마치고 청별항을 떠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언젠가 다시 청별항을 찾게 되리라. 그러니 지금의 이별은 청별이 아니라 정별(情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보길도에 정을 두고 떠나는 이 아이들이 커서 다시 올 때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보길도를 만날 것이다.

완도에 도착하니 늦봄학교 슬기둥 선생님이 마중을 나와 계신다. 선생님의 안내로 신지도 바닷가에 도착하니 마침 노을이 지고 있다. 백사장도 넓고 바다도 넓었다.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새털구름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손을 맞잡고 인적하나 없는 광활한 백사장에 서서 쪽빛 남해바다와 붉은 서녘하늘을 바라보면서 명상에 잠겼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밀려오면 반드시 밀려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가르치기라도 하듯이 파도는 쉬지 않고 우리 발 밑을 오간다.

아이들은 금방 피로를 회복하고 술래잡기를 하며 마구 뛰며 내달린다. "섬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다녔다는 것, 넓은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것이 좋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랜 시간 걷는 게 힘들었지만 끝까지 해냈다고 생각하니 뿌듯합니다"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식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꼭 부모님을 모시고 오렵니다" 아이들은 함께여서 행복했다.

섬은 우리를 보다 성숙하게 했다. 섬은 우리 아이들이 인생의 여정에 지쳐 있을 때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아늑한 쉼터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내일 아침 섬을 떠날 때면 틀림없이 우리 아이들 마음의 수평선 위로 맑고 밝은 태양이 솟아오르리라.

▲ 부용리 동백나무 숲 길을 산책하고 있는 아이들
ⓒ 김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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