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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놈바켕 사원에서 내려다본, 끝없는 밀림의 지평선.
ⓒ 서부원
앙코르 와트로 대표되는 '앙코르'는 한때 동남아 전역을 호령하던 옛 크메르 제국의 도읍지입니다. 15세기 초 아유타야 왕조의 침략을 받아 메콩강 하구에 위치한 현재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으로 천도하면서 폐허가 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잊혀진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시엠립에서 고대 도시 '앙코르'의 심장부, 크메르 제국의 궁성(宮城)인 '앙코르 톰'을 찾아가는 길은 현재에서 과거로의 입체적 시간 여행입니다. 번화한 현재, 시엠립과 폐허인 과거, 앙코르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삐 서두르지 않고 순간순간을 음미하듯 거닐며 앙코르 톰을 향합니다.

정문에 다다르기 바로 전 왼편으로 제법 듬직한 언덕이 돋워져 있습니다. 중국 산동성의 태산(泰山)이 그렇듯 주변이 온통 평지뿐인 곳에서는 야트막한 언덕일지라도 유난히 높아 보이기 마련인데, 인공적으로 조성했다고 하니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산'입니다.

▲ 부재들이 널브러진 채 방치된 프놈바켕 사원의 일부. 복원의 손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 서부원
흙먼지 풀풀 날리는 산길을 감아 돌듯 오르니 맨 꼭대기에 하늘을 향해 기지개켜듯 열려있는 돌로 된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사각형으로 뻗어 올라가는 모습이 흡사 피라미드 같습니다. 가파른 돌계단을 기어오르니 신성한 조상(彫像)을 모셔놓았을 법한 중앙의 감실과 꽤 넓고 평평한 공간이 펼쳐져 있습니다.

'프놈바켕' 사원입니다. 이곳저곳이 허물어지고 부재들이 널브러져 있는 탓에 사원이라는 느낌은 없고, 외려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대 또는 제천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제격일 듯한 그런 곳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꼭대기에 올라서서 사방 어디를 내려다보아도 온통 끝없이 펼쳐진 밀림의 지평선입니다. 하늘의 코발트 색 푸른빛과 밀림의 진초록 푸른빛이 어울려 수평선이 주는 그것보다 훨씬 더 장쾌합니다.

사실 캄보디아의 지명에는 유난히 '프놈(phnom)'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입니다. 프놈은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원의 이름도 그렇거니와, 현재 수도인 프놈펜도 그렇고, 중국의 기록에서 보이는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 '부남(扶南)'도 프놈의 음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덕이 많은 곳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기보다는 언덕을 신성시하고 경외시한 까닭이지 싶습니다. 이곳에 서서 일출과 일몰을 함께 맞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장관이 아닐까, 상상만으로도 자못 장엄한 풍광이 그려집니다.

▲ 앙코르 톰의 정문(남문) 모습. 길 양쪽으로 27쌍의 석인상이 도열해 있다.
ⓒ 서부원
앙코르 톰의 수문장 격인 프놈바켕을 지나 곧장 가면 길 양쪽으로 각각 27기의 석인상이 도열하고 있는 정문에 다다릅니다. 두 쪽 모두 다두(多頭)의 뱀(나가)을 안고 있는 형상이지만, 한쪽은 평온하고 자애로운 얼굴로, 다른 한쪽은 위협적인 광포한 인상의 얼굴을 지닌 채 서 있습니다. 이를테면 선(善)인상과 악(惡)인상들이 나란히 입구를 지키고 선 모습입니다.

이곳 아래에는 폭이 100미터 쯤 되는 해자(垓字)가 만들어져 정사각형의 앙코르 톰 전체를 휘감고 있는데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석인상 27쌍이 같은 모양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높고 두터운 성벽과 넓게 판 해자로 이뤄진 앙코르 톰은 튼실한 궁성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다만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부처의 얼굴을 깎아 세워 둔 정문을 걸어 통과하노라면 영험한 불교의 도량에 들어서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도열해 있는 석인상 아래로 파놓은 인공 해자의 모습.
ⓒ 서부원
힌두교의 색채를 띤 앙코르 와트와는 달리, 이곳은 크메르 제국을 넘어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 받는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궁성이자 불교의 성지입니다. 그는 이전의 크메르 제국의 왕들과는 달리 불교를 숭앙하였는데, 신분제가 엄격했던 당시에 왕족 출신이 아니라는 태생적 한계를 불교를 통해 위로 받고 희석시키려 했던지, 건축물 곳곳에 엄격함과 자비로움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문을 지나면 궁성의 한 가운데로 수렴하는 곧은 도로를 만나게 됩니다. 과거 이 길 주변에는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을 테지만, 그 흔적조차 사라진 채 무심한 아름드리 나무들만 빽빽해 대낮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고 있습니다. 숲의 터널 사이로 단 한 번도 핸들을 꺾지 않은 채 내달린 버스는 과거 크메르 제국의 중심인 앙코르 톰에서도 한 가운데에 선 '바욘' 사원에 닿습니다.

▲ 당시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상을 담은 바욘 사원 내부에 새겨진 벽화.
ⓒ 서부원

▲ 바욘 사원은 54개의 불탑이 세워져 있는데, 불탑 하나에 사방으로 네 면의 부처 얼굴을 조각해놓았으니, 총 216면이다.
ⓒ 서부원

▲ 바욘 사원의 불탑 내부 모습. 장난감 블록 조립하듯 돌을 엇갈려 쌓아올렸는데 맨 꼭대기는 트여 있다.
ⓒ 서부원
바욘 사원은 앙코르 와트 등 여느 앙코르 유적보다 규모 면에서는 비록 작지만, 개성이 뚜렷한 석조 유물입니다. 사원 내부는 미로처럼 좁은 길이 얽혀있고, 가는 길목마다 벽면에는 당시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상을 새겨놓은 부조가 지천이며, 곳곳에 쌓아올린 탑마다에는 서로 다른 표정의 부처의 얼굴이 도드라져 있는 '미니 박물관'입니다. 또, 시시각각 방향이 달라지는 햇볕에 사면불(四面佛)의 그림자가 질라치면 다양한 표정들이 각기 제 얼굴을 뽐내는 화려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둘러본 사원을 나오며 아이들의 장난감 블록 맞추듯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이 많은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온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바욘 사원과 걸어서 5분 거리의 이웃한 곳에 그 답을 알려주는 유물이 놓여 있습니다. 이른바 '코끼리 테라스'가 그것입니다.

▲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오후, 그림자 깊은 바욘 사원 전경.
ⓒ 서부원
사실 코끼리는 기적과도 같은 수많은 앙코르 유적군을 일궈 낸 '일등 공신'이기에 앞서 크메르 제국,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전개시켜 온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끼리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가 곧 나라마다의 경제력과 국력의 지표였으며,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무기이자 군수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앙코르 유적군의 벽면마다 그 한 가운데에 코끼리들이 새겨져 있고, 이곳에서는 야트막한 성벽에 아예 코끼리 '떼'를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가까이에서 만지듯 쳐다보면 그저 돌로 만든 박제화된 부조일 뿐이지만, 멀리서 볼 때라야 제대로 된 진면목을 느낄 수 있습니다. 100여 미터쯤 떨어져 먼발치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보면 진군의 나팔 소리에 맞춰 '우~후' 소리를 내며 무리지어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 먼 발치에서 보면 떼지어 어디론가 몰려가는 듯 보이는 '코끼리 테라스' 부조.
ⓒ 서부원

▲ 입체적으로 깎아놓은 '코끼리 테라스'의 일부.
ⓒ 서부원
상아(象牙)의 아래위로 늘어뜨리거나 뻗어 올린 긴 코와 육중한 발의 조각을 보면 잘 훈련된 코끼리 같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들의 힘을 빈 엄청난 규모의 사원 건축 현장은 어쩌면 유용한 군사 훈련장은 아니었을지.

당시의 왕들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겁니다. 자신의 신성과 정통성을 부각시켜 줄 건축물을 세우면서 자신의 권력을 지켜줄 정예병을 훈련시키는 '일석이조'의 전략. 하물며 무지렁이 백성들의 생각을 한 데 묶어줄 종교 건축임에랴.

말라버린 땅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가는 듯한 코끼리들의 행진을 따라 갈 곳은 영화 <툼 레이더>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타프롬' 폐사터입니다. 그곳이 이번 앙코르 와트 여행의 종착지가 될 것입니다. 앙코르 와트를 거쳐 이곳 앙코르 톰과 바욘 사원에서 앙코르 예술의 장중함과 화려함을 만끽하였다면, 세월의 더께 속에 스러져 가는 폐허의 스산함도 놓쳐서는 안 될 여행의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앙코르 와트에 신비롭고, 장중하고, 화려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진짜 앙코르 와트는 바로 이곳 앙코르 톰 주변입니다. 이곳에는 크메르 제국의 역사에서부터 당대 사람들의 삶과 종교, 예술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볼거리들이 빼곡하기 때문입니다. 수박 겉 핥기 '관광'이 아니라면 하루라는 시간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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