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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국적이 있는가, 없는가? 한국인이면서 일본 전통시 와카(和歌)에 능했던 손호연과 한국인이면서 서유럽 전통성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수미의 경우는 같은가, 다른가? 또 그들은 합당하고 동등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아닌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을 이렇게 먼저 던진 것은, 이제 풀어 보려고 하는 내용이 그러한 질문에 대한 개개인의 관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 대단히 흥미로울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다. 일제시대 말기인 1940년대에 한국인이 한국어로 부른 일본 전통음악, 바로 조선어 나니와부시(浪花節)와 그 일인자 최팔근이란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 최팔근이 녹음한 조선어 나니와부시 음반 <설중매>
ⓒ 이준희
나니와부시는 샤미센 반주에 맞춰 서사적 내용을 노래하는 일본 전통음악으로, 흔히 한국의 판소리와 유사한 것으로 설명이 된다. 다양한 일본 전통음악 갈래들 가운데에서도 일반 대중의 인기를 가장 많이 모았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나니와부시 같은 것도 불렸던 것이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관제(官制) 창가나 유행가 등에 당시 일본 음악의 영향이 상당히 짙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일본 음악은 일본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서유럽에서 발원한 것을 일본이 수용한 것이었으므로, 일제시대 창가나 유행가를 두고 일본 전통음악의 영향을 운위할 수는 없다. 오랜 기간을 두고 형성된 민족적 감수성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 일본 전통음악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어 나니와부시는 일본 전통음악이 식민지 조선에 직접 수용된 흔치 않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냥 수용된 정도가 아니라 일본 전통음악을 한국어로 소화했으니, 나름대로 '토착화'까지 이루어 낸 셈이다.

조선어 나니와부시의 실례는 이미 1930년대 초반에도 흔적이 확인된다. 아직 음원이 공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유계성이란 인물이 녹음한 조선어 나니와부시 <춘향전> 음반이 1931년에 발매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어 나니와부시가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40년에 최팔근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최팔근은 1940년 3월에 조선방송협회와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조선에 나니와부시를 보급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했다. 귀국 당시 그는 도쿄에서 '일본낭곡(浪曲·나니와부시를 달리 이르는 말)학교'를 설립했다는 최영조라는 인물과 동행했는데, 정황상 최영조가 설립한 학교에서 나니와부시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성이 같은 것으로 보아 최팔근과 최영조는 어쩌면 혈연관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총독부 위촉이라는 화려한 배경으로 등장한 최팔근은 우선 라디오 방송을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한 해 동안 수차례 '신작발표회' 방송에 출연해 조선어 나니와부시를 소개한 기록이 확인된다. 이 때 발표한 <칠복의 출세> 등 작품은 이후 음반으로 제작되어 다시 발표되기도 했다.

1942년부터는 최팔근의 조선어 나니와부시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는데, <백제의 칼>, <장렬 이인석 상등병>, <칠복의 출세>, <설중매>, <부평초> 등이 현재 확인되는 것들이다. 이 가운데 ‘內鮮一體의 理念을 藝術化한 斷然 新記錄의 絶唱’으로 선전된 <백제의 칼>이나, ‘志願兵의 忠烈碑! 浪花節로 읊어진 忠義兵丁의 記錄알범’, ‘昭和 十二年 以後 朝鮮의 同胞는 志願兵을 戰線으로 보냈다. 大東亞의 人材 李仁錫의 忠魂은 드듸어 圓盤藝術로 出現’이라는 광고 문구가 붙은 <장렬 이인석 상등병> 등은 일제 말기 시대상을 반영한 친일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칠복의 출세>는 ‘무식하야서 죽을 땅에 나아가든 七福이가 관악산 중에게 지도를 받아 십년 작정을 하고 학업에 힘을 써 크게 성공을 하엿다는 성공미담’이라는 방송 내용 해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표면적으로는 친일적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음원 일부가 확인된 <설중매>는 내용 판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는 하나, 역시 친일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연이은 방송, 음반 활동으로 일약 조선어 나니와부시의 일인자가 된 최팔근은 무대공연에도 또한 활발하게 참여했다. 1941년에 연주자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작곡가 손석우는 공연 일행 가운데 최팔근이 있었음을 증언한 바 있다. 확실치는 않으나, 최팔근의 조선어 나니와부시 공연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인이 조선어로 부르는 나니와부시는 내용 여하를 떠나 내선일체를 선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례였을 것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최팔근의 행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는지, 갔다면 일본에서 계속 나니와부시를 불렀는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최팔근이라는 이름은 60여 년 쌓인 세월 속에 덧없이 묻히고 말았다.

퇴적된 시간을 헤집어 최팔근 이야기를 더듬어 본 것은 일단 조선어 나니와부시라는 현상이 충분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른바 친일 시비야 사람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겠지만, 그것이 거의 전무후무하다시피 한 이례적인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최팔근과 조선어 나니와부시는 가시적인 현상으로서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의문을 유발하는 문제로서도 의미가 있다. 글머리에서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 이어 보자. 과거의 최팔근과 오늘날의 조수미는 무엇이 같고 다른가? 개인의 민족적 정체성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과 어떤 관련이 얼마나 있는가? 일본과 일본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특수한(?) 감정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

아무래도 모두가 동의하는 모범답안이 나오기는 어려운 질문인 만큼, 여기서 더 밀고 나아갈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가능한 일은 아마 아니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한번 물어 보고 싶다. 조선어 나니와부시의 일인자였던 최팔근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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