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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 안내 표시도 양귀비의 얼굴로
ⓒ 조수영
여행 2일째(8월 4일) 다음 일정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인 화청지(華淸池 : 화칭츠)이다. 화청지로 가는 길엔 그들의 이야기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으로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다. 며느리인 셈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가 죽자, 시아버지란 체통도 망각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를 시킨 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음악에 관한 취미가 맞았던 게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BRI@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夜半無人和語時 야반무인화어시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次恨線線無絶期 차한선선무절기

7월 7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끝없이 계속 되네


이렇듯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궁지에 빠진다.

당시 서안에는 왕의 근위병 4천여 명이 있을 뿐이었기에 현종은 서쪽의 사천성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들이 지금의 마위파 부근에 왔을 때, 이번엔 같이 가던 호위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호위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맬 비단천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는 37세였다. 지금도 마위파의 그 자리엔 양귀비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흥미있는 사실은 흙무덤의 높이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으로 팩을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예뻐진다는 믿지 못할 소문을 듣고 무덤의 흙을 마구 가져갔기 때문이란다. 하는 수 없이 지금은 돌로 봉분을 싸버렸다.

한편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귀양까지 보낼 정도면 이태백의 시가 아마도 맞았던가 보다.

역사의 영욕이 서려 있는 곳 '화청지'

화청지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30여㎞ 떨어진 여산 기슭에 세워진 일종의 별궁이다. 뛰어난 자연환경과 천연온천으로 인해 서안에 도읍을 정한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모두 이곳을 좋아했다.

전해지는 역사에 의하면 서주 시대에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여산탕(驪山湯)이라 하였다. 당나라 현종 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華淸宮)이라 고쳤다.

현종은 745∼755년 사이에 매년 10월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양귀비 자매와 측근 대신들과 함께 화청지로 와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야 장안으로 돌아갔다. 당나라의 시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문학적 소재가 되기도 했다.

▲ 양귀비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모습의 높이 3m의 입상
ⓒ 조수영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화청지를 황폐화시켰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크기의 7분의 1 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된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하며 다량의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한다. 양귀비가 장기간 미모를 유지한 것과 당태종이 육칠십에도 여전히 정력이 왕성했던 것은 화청궁에서 장기간 약수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곳은 또한 1936년 12월에 시안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이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 여산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그러고 보니 화청지는 역사의 영욕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했던 '장생전'

▲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한 장생전
ⓒ 조수영
입구에 들어서자 그들이 사랑을 맹세했던 장생전(長生殿)이 있다. 장생전 안에는 당시 여산 주변의 풍경을 상상한 모형과 이곳에 남아있었던 궁터의 사진, 발굴된 엽전, 기둥, 온천물이 흘렀던 도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장생전내에는 당시의 화청지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원래 크기의 7분의 1정도만 복원한 것이다.
ⓒ 조수영
또 음력 7월 7일 양귀비의 생일잔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주변 각국의 사신들이 선물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높은 지위를 짐작하게 한다.

▲ 음력7월7일 양귀비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각국의 사신들의 모습. 그녀의 지위를 알게해 준다.
ⓒ 조수영
뒤로 이어지는 정원을 돌아서면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 목욕탕 유적박물관이 있다. 그 중심에 흰색의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반라의 양귀비 입상이 있다. 여우 가죽을 걸치고 몸을 반쯤 노출한 양귀비가 약간 머리를 숙인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 해당탕(海棠湯).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으로 이곳에 한약재와 꽃잎 등을 탕 속에 넣고 목욕을 했다고 한다.
ⓒ 조수영
맨 먼저 들른 곳은 해당탕(海棠湯)으로 귀비지(貴妃池)라고도 하는데 양귀비가 전용으로 목욕을 하던 곳이다. 양귀비는 이곳에 한약재와 꽃잎 등을 탕 속에 넣고 목욕을 했다고 한다. 바닥의 옥돌에는 그 주인이 그녀임을 알려주는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하나 내려가서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온천수로 채워져 있었을 해당탕은 관광객이 던진 동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 연화탕(蓮華湯)은 현종의 전용 목욕탕. 해당탕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 조수영
옆에 있는 연화탕(蓮華湯)은 현종의 전용 목욕탕이라 한다. 해당탕에 비해선 약간 단조로우나 웅장하고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황제는 다른 사람과 절대 혼탕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수영장만 한 탕 안에서 혼자 심심하지 않았을까?

나오면서 왼쪽에 있는 정자가 양귀비와 현종이 머리를 말리며 여산의 낙조를 감상하던 양발대(凉髮臺)이다. 뒤에 있는 석가루(夕佳樓)는 온천의 발원지로 당태종이 목욕하던 곳이고, 그 옆의 성신탕(星辰湯)은 노천온천으로 밤에 하늘의 별을 보며 온천목욕을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그 위에 건물을 짓고 안쪽 벽면에 현종과 양귀비에 대한 그림을 붙여놓았다.

▲ 상식탕의 바닥에 파여 있는 구멍은 황제의 음식을 요리하는 이들이 손으로 자신의 발을 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조수영
옆의 상식탕(尙食湯)은 상식관들이 목욕하던 곳이란 뜻으로 아마 함께 따라왔던 신하, 요리사, 후궁들이 목욕하던 대중탕이었던 듯하다. 상식탕의 바닥에 파여 있는 구멍이 독특한데 황제의 음식을 요리하는 이들이 손으로 자신의 발을 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천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화청지에는 따뜻한 온천수가 나온다.
ⓒ 조수영
화청지에는 지금도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온천탕 입장권을 팔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양귀비의 피부를 가지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 비익조 - 암컷과 수컷이 날개가 한 쪽뿐이어서 짝이 없으면 날 수 없는 전설의 새.  

* 연리지 -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 비익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 안사의 난 - 755년에서 763년에 이르기까지 약 9년 동안 당나라를 뒤흔든 난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등이 주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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