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의 지배인 홍순언은 고려영화사와 손잡고 청춘좌의 대표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로 제작할 계획을 세운다. 고려영화협회의 기술진과 동양극장의 배우들이 어우러지면 배우들이 힘들게 전국을 돌며 공연할 필요 없이 돈을 긁어모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1939년 3월 17일,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했다. 임선규가 자신의 극본을 시나리오로 각색했으며 동양극장 무대에 섰던 배역 그대로 출연했다. 홍도역의 차홍녀, 철수역의 황철, 시어머니역의 김선초, 시누이역의 김선영, 시아버지역의 변기종이었다. 연출과 편집은 영화 초기부터 카메라맨으로 이름이 높던 이명우가 맡았다. 이명우는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유성영화) <춘향전>을 감독했던 인물이었다. 그 외 스태프도 <춘향전>을 만든 이명우 사단으로 채워졌다. 촬영은 이명우의 처남인 촬영기사 최순흥, 조명과 현상은 이명우의 제자 유장산, 녹음은 조선 최초의 카메라맨인 이명우의 형 이필우였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939년 최악의 영화로 꼽혀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스틸사진. 왼쪽부터 남편역의 김동규, 시어머니역의 김선초, 홍도역의 차홍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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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은 단지 스크린 속의 배우가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화젯거리여서 작품의 질에 상관없이 흥행이 됐지만 4년이 지난 1939년, 관객은 질적으로 충실한 영화를 기대했다. 영화로 만들어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녹음이 실패하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평단과 관객의 시선은 싸늘했다. 영화배우이자 극작가인 김태진은 주저 없이 이 작품을 1939년 최악의 영화로 꼽았다. 무대 위에서의 과장된 연기에 익숙한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연기 또한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영화평에는 "연기에 있어서는 차홍녀 양이 그중 나은 편이요, 황철 군은 표정이 너무 딱딱하고 그늘이 없다. 김선영 양은 불량성을 띠인 핏기 없는 모던 걸로 밖에 안 보이고 김선초 여사는 능란한 도가 지나치지 않았을까?"라며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혹평했다. 동양극장에서 4년간 찬사만을 받아왔던 차홍녀에게 실패한 영화에 출연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러나 제작자인 동양극장은 4000원이라는 큰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얼마 후, 흥행의 귀재라고 불리던 동양극장 지배인 홍순언이 죽었다. 최독견이 그 뒤를 이어 지배인이 되었으나 경영은 날로 어려워졌다.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던 최독견은 중국으로 도망가고 동양극장 주인이었던 배구자는 채권자들에게 동양극장을 넘겼다.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 소속 유명배우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배우들이 극장의 채무관계 때문에 소유권이 바뀌듯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황철을 중심으로 동양극장을 탈퇴한 이들은 대숲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랑의 일편단심의 마음을 기리는 뜻에서 새로운 극단의 이름을 아랑으로 정했다. 극단 아랑의 주요 무대는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이었으며 연출가 박진과 극작가 임선규를 비롯하여 황철, 차홍녀, 김선초 등 동양극장의 유명배우들이 망라되었다. 해방 전 최고의 인기 배우 황철과 차홍녀
 동아일보에 실린 차홍녀의 부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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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아랑은 배우들이 만든 극단이기에 확실한 경영주가 있었던 동양극장 시절처럼 느긋하게 연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 순회공연도 많이 다녀야 했다. 특히 차홍녀가 출연하지 않는 공연은 표가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연극에 주역으로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강행군이었다. 1940년 겨울, 극단 아랑은 북선 지역인 함경도, 평안도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마지막은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에서 공연된 <청춘극장>이었다. <청춘극장>의 주인공을 맡은 차홍녀는 1년여 동안 강행군으로 지칠 데로 지쳤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쓰러질 정도였다. 지친 그녀의 몸에 천연두 균이 파고들었다. 평소에도 몸이 허약하여 단원들의 애를 먹이던 차홍녀는 쓰러졌고 여배우로서 견딜 수 없는 흉측한 모습으로 죽었다. 사망일은 1940년 12월 24일 오전이었으며, 불과 22세의 나이였다. 해방 전 최고의 인기 배우는 문예봉도 나운규도 아니었다. 황철과 차홍녀였다. 황철은 월북했고 차홍녀는 너무 일찍 세상을 등졌기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차홍녀가 천수를 누렸다면 한은진, 황정순, 최은희처럼 한국영화를 환하게 밝히는 배우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차홍녀와 같이 무대에서 호흡을 마쳤던 황철이 1941년 잡지 삼천리에 쓴 <곡 차홍녀군>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짖는다. 차홍녀군과 필자의 무대 모양을 연상한다면 누구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기생 홍도를 생각하게 되고 그의 오래비 황철수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또 <춘향전>의 컴컴한 옥중에서 큰 칼을 쓰고 '열녀불경이부'를 외치며 신관 사또의 골을 올리던 춘향이의 애끓는 모양을 생각하면 누더기의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춘향모와 청승을 떨든 이도령도 연상하게 될 줄 압니다. 어쨌든 홍녀군과 나와는 혹은 아내, 혹은 누이로 오라비로 남편으로 불과 두 석자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상대를 했기 때문에 이는 곧 무대의 동지요, 또 연극의 아내요 길동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득한 먼 길을 절반도 다 못 걷고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많은 죽음에 어찌 슬프지 않은 죽음이 없으리오 만은 홍녀군의 죽음은 내게 있어서 보다 더 슬프고 애석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연극에서 살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연극에서 죽었습니다. 마치 힘 있는 병사가 총을 메고 전장에 나아가 시뻘건 피를 흘리고 조국을 위하야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이... 홍녀군이 이 세상에서는 늘 같이 연극을 하던 나를 버리고 갔으나 그는 지금 천국에서 그립던 동지들을 많이 만났을 줄 압니다. 우선 차홍녀 전에 비극의 여왕이라고 하든 이경설군도 만났을 것이요, 가까이 왕평군도 이백희도 만났으리라. 그래서 옥황상제 앞에서 연화무대에 구름을 타고 태양조명에 훌륭한 연극을 할 줄로 압니다. 어쨌든 홍녀군의 생애는 짧고 거칠었으나 가장 빛나고 가장 보배로웠습니다. 끝으로 홍녀군이여 천국에서 혹시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났거든 세상에 남기고 간 아들의 문안이나 좀 전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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