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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수 경기도지사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회변혁, 민주변혁, 반독점투쟁, 민족부르주아지, 착취, 노동계급, 자본가계급, 계급모순, 독재권력,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민중·민주·민족, 투쟁노선, 개량, 현장노동, 민중해방, 노동해방사상, 노동자정당…'(89년 3월)

'꿈, 열정, 혼, 우국충정, 헌신, 자유주의(자), 자기희생, 애국, 구국, 애민, 수구꼴통, 대처와 영국병, 도덕성, 박정희 대통령의 성취, 대한민국의 절망, 건국·산업화·민주화, 국가안보세력, 탈북자, 북한인권운동, 김정일 정권의 종말'(2005년 2월)

언어가 달라지면 철학과 이념이 달라진다. 노동운동가에서 보수정당의 유력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57) 경기도지사도 위에 열거한 언어의 차이만큼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지금은 점진적 발전론자... 혁명적·계급적 관점은 완전히 없어졌다"

@BRI@김 지사는 1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급진적 민중주의자에서 자유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당시 우리 시대의 과제는 반파쇼 민주화였지만 지금은 그런 말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이야기가 주류"라고 '시대의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그때 나는 혁명적, 계급적 시각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지금은 점진적 발전론자로 혁명적, 계급적 관점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력 중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민자당 입당'(94년)에 대해 "그때도 지금도 당시 민자당에 입당한 걸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그걸 후회한 적이 없다"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그는 "당시 민주당에서 입당 제안이 왔다면 민주당에 입당했겠지만 제안은 민자당에서 먼저 왔다"며 "민중당의 해산과정을 거치면서 급진적 변혁이나 혁명은 어렵고 점진적 민주주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정당의 실패에 이어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우리는 YS의 개혁드라이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았다"며 "이것은 일종의 좌절이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나는 연옥의 고통을 겪었다"며 "이후에도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굉장히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87년 6월항쟁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획이자 최대 분수령이었다"며 "그 과정은 민주화운동의 1단계 완성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국가기념일 지정에 대해선 과거와 달리 "통상적으로 무혈운동이 다 기념일이 되지는 않는다"며 "검토해봐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박정희 재평가'와 관련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위대한 업적이지만 민주화세력을 억압한 것은 허물이고 잘못"이라며 "근대화의 공이 워낙 크니까 민주화 세력을 억압한 것은 많이 묻힌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뉴라이트는 과거에 좌파였지만 현재는 좌파의 문제를 느끼고 우파가 됐다는 점, 속물이 아니라 운동가라는 점, 이상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 나와 코드가 맞다"며 "경험이 없어 미숙한 점이 있겠지만 잘 정진해 나가면 국가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마지막 꿈이 '대권 도전'에 있음을 시사해 주목된다. 그는 "여기 앉아 지방세가 어떻고, 하천을 어떻게 하고, 이런 것만 생각하는 운동권은 없다"며 "원래 젊었을 때 꿈과 과업도 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이야기가 주류"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올해는 87년 6월항쟁 20주년인데 20년 전 6월항쟁 당시에는 어디에 있었나?
"목포 교도소에 있었다."

- 그때 분위기 생각 나나?
"교도소 안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이 안됐다. 그래서 주로 교도관들한테 목포의 분위기만 많이 들었다. 그때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되는 줄로 알았다. 워낙 압도적이라고 했으니까. 당시 목포 산정동 교도소가 1914년에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감옥이었다. 밖에서 데모하는 데모대가 '김대중, 김대중' 하고 지나갔다. 교도관도 압도적으로 이길 것이라고 하고 4자 필승론이라고 해서 나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까보니까 떨어지고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 됐더라. 교도관에게 목포의 분위기만 듣다 보니 사실과 안맞았던 것이다."

-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87년 6월항쟁을 어떻게 평가하나?
"당시로서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큰 획이다. 그야말로 민주화과정의 최대 분수령이었다. 6월항쟁의 과정이 민주화운동의 1단계 완성이었다고 본다."

- 89년 3월 <사회와 사상>이 마련한 김형기 교수(경북대 경제학)와의 대담에서는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의 노동운동이야말로 진정으로 노동계급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대중적으로 광범하게 진출한, 양적, 질적 발전기"라고 평가했는데, 아직도 이 평가엔 변함이 없나?
"그때 나는 혁명적, 계급적 시각이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점진적 발전론자니까 완전히 혁명적, 계급적 관점은 다 없어졌다. 두 개의 관점만 빼면 평가는 그대로다. 객관적으로 노동운동 측면에서 그때는 양적인 대폭발이었다. 그 이전부터 노동운동을 한 사람이 볼 때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천국이었다."

- 당시 대담에서 김 지사는 "민주변혁의 과제는 반제반독점"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
"당시에는 민중민주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자유민주의자다. 완전히 다르다. 당시 우리 시대의 과제가 반파쇼민주화였다. 내가 (노동현장에) 들어갈 때 (주요 운동이념이) 삼민, 즉 민족·민주·민중이었다. 지금은 그런 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이야기가 주류다."

- 6월항쟁은 지금 김 지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저도 그 덕택에 석방돼 나올 수 있었다.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도 다 그 수혜 때문에 하는 것이다. (석방되지 않았다면)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른다. 내가 38살에 출소했다. 그때까지 혁명적 관점이 있어서 내가 (나이) 40살 넘어서까지 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근데 살아 있잖아. 60살이 다 됐는데 살아 있으니 엄청난 수혜지."

- 6월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금연을 했다고 하던데.
"자책이라기보다 좀 억울했다. 그 어마어마한 격동기를 나는 갇혀 지내서 (직접) 체험을 못했다. 나는 체험을 중시하는 현장주의자다. 어떤 이론보다 실제, 현실, 현장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난 리얼리스트(realist)다. 현실주의, 실증주의, 실사구시 등에 관한 생각이 강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이론투쟁하고 있을 때 난 공장에 가서 현장 노동자들과 같이 생활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감옥도 현실이지만 운동현실과 격리돼 있어서 이 공백을 메우기 어렵더라. 3년 쯤 더 살려면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3년쯤 더 살려고(웃음)…."

- 직접 나와서 87년 민주화를 체험하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6월항쟁) 이전에는 책(출판)이나 발언이 불가능했다. 당시 내가 가장 경이롭게 생각한 게 심야토론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 심야토론이란 게 처음 생겼다. 교도관들이 밤 12시 넘겨서 새벽 2시까지 생방송 토론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늘 보도통제를 받아서 (교도관에게) '그게 가 진짜냐, 나가서 아무 소리나 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 센 소리도 막 한다'고 했다. 나와 보니 진짜 그렇더라.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한 게 그때다. 우리가 쟁취한 것이다."

"6·10 등 무혈운동이 다 기념일이 되는 건 아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국회에 진출한 이후 6월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국가기념일 지정은 검토해봐야 한다. 지금 휴일은 아니지만 기념은 하고 있다. (6월항쟁은) 4·19(혁명)이나 5·18(민중항쟁)과 다른 것 같다."

- 그럼 6·10 항쟁이 4·19나 5·18보다는 격이 낮다는 얘기인가?
"격이 낮다기보다 6월 민주화운동은 그 참여자도 많았고 운동의 의의도 굉장히 컸다. 그 이후에도 여러 과정이 있었다. '87년체제'라 부르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헌, 진정한 1인 1표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노조 설립과 노동3권 완전보장, 언론출판의 완전한 자유, 정당정치의 완전한 자유 등 획기적인 질적 도약이 계속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6·10이라는 날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일련의 과정이 중요하다."

- 국가기념일 지정은 더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인가?
"좀더 검토해봐야 한다. 5·18은 희생자가 많았다. 통상적으로 무혈운동이 다 기념일이 되지는 않지만 유혈운동은 기념일이 된다. 6·10은 승리의 과정이다. 근데 미완의 승리다. 진정한 정권교체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점을 따져 봐야 한다."

- 지금 이렇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건 민중민주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변신한 것과 관련이 있나?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처지에서도 6·10은 굉장한 의미가 있다. (다만) 국가기념일 제도에 대해서 따져봐야 한다. 휴일로 지정할지, 기념식을 할 것인지, 어느 정도 격으로 할 것인지 등을 따져 봐야 한다."

- 앞서 언급했던 <사회와 사장> 대담과, 2005년 2월 <월간조선>이 마련한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와의 대담을 비교해보니 구사한 언어가 무척 다르다. 예를 들자면 89년 대담에서는 '변혁-노동계급-반독점투쟁-착취-민중·민주·민족-투쟁노선-개량-현장운동' 등의 용어가 많은 반면, 2005년 대담에서는 '꿈-열정-혼-우국충정-자유-애국-구국-애민-북한인권' 등의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달라진 언어는 결국 철학이 달라졌음을 의미하는데.
"철학이 많이 달라졌다. 철학이라기보다 추구하는 이념이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때는 급진 민중주의자이고 지금은 자유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지사의 발언의 톤은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투사의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공인이다. 사인으로서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공적 자치를 중시한다. 그 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꼭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대통령이 돼야겠다', 이런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중심으로 살지는 않는다."

- 그럼 어떤 중심으로 사는가?
"공익적인 것, 국가, 민족, 공공의 질서 등 이런 것들을 상당히 중시한다. 인간, 휴머니즘, 인권, 평화 등 공공의 가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한다. 그런 점은 변하지 않았다. 옛날에도 공익적 가치를 중시했다."

- 변하지 않았다?
"공익적 가치를 중시하는 건 장점이 되겠지만 개인주의가 충분히 발달이 안됐다. 그게 함정이 될 수 있다. 내가 (개인주의에) 어둡다. 공공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개인의 취향, 사리의 추구, 사적 관심, 이런 것에 약하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가치 아닌가. 사적인 여러 가지 센스가 중요한데 난 그런 데 약하다."

"민중당은 운동하듯이 정치를 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자신의 삶을 바꾼 중요한 계기를 꼽는다면?
"난 개인적으로 상당히 굽이굽이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철이 든 이후 주요한 역사적·민족적·국가적 문제에서 관심을 떼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는 한일회담, 고등학교 때는 3선개헌, 대학 때는 유신과 민청학련, 전태일, 그 다음에 5·18과 6·10 등 여러 (역사적) 과정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살아 왔다. 그래서 (내 삶을 바꾼 계기가) 하나만 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원래 사회의식, 공공의식이 아주 강했다. 그 사회의식을 내 실천과 등치시키는 성향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당히 부자유스러운 독재체제에서 희생의 선봉이 됐다. 툭하면 희생을 많이 당했던 게 사실이다. 그 다음에 민주화되고 나니 그게 오히려 사회적으로 볼 때 계급장이 될 수도 있다. 그 뒤로 중요한 것은 공인으로서 공익을 위해서 뭔가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성실하게 일해왔다.

국회활동이나 지역구 활동을 성실하게 한 것이 나름대로 평가받아 도지사가 됐다고 생각한다. 내가 특별히 잘생긴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지역토박이도 아니다. 부천 소사구에서 연거푸 재선 한 사람이 없는데 나는 (내리) 3선을 했다. 최고 득표율도 올렸다.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정직하게, 겸손하게 했다는 것 외에 내가 내세울 게 없다."

- 제가 보기에 88년 10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이후 가장 큰 변신은 '노동운동가'에서 '정당활동가'로 변신한 점일 것 같은데.
"맞다. 그때 고민이 많았다."

- 89년 대담에서도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당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이렇게 정당활동으로 선회한 배경은?
"(감옥에서) 나와 보니 현장 노동운동을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 팽창을 했다. 내가 거기서 더 이상 기여할 게 없었다. 15년 이상의 대선배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서 그 후배들을 도와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중당을 했는데 실패했다. 다시 노동인권회관 소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치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있어서 민자당에 입당했다. 국회에 들어간 이후 6년 동안 환경노동위에서 일했다. 6년 연속 환경노동위에서 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 민중당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그때는 워낙 기반도 약했지만 우리도 정치가 뭔지 몰랐다. 투쟁만 알았지. 정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투쟁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 정치를 몰랐던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인가?
"요즘은 '민주노동당' 하면 국민들이 알지만, 그때는 우리도 정치를 모르고, 사람들도 우리를 몰랐다. 당시에는 정당 하면 민주당이나 민자당이지 제3정당이 있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 94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경기도 부천소사 조직책에 임명됐다. 당시 참여개혁론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민자당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가 있었나?
"첫번째 이유는 제안이 민자당에서 왔다는 점이다. 그때 민주당에서 (입당 제안이) 왔다면 (민주당에 입당)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민중당만 했다. 정당을 하더라도 기성정당과 다른, 진보정당 외에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의 해산과정을 거치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점진적 민주주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급진적인 변혁이 혁명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일종의 좌절이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사회주의권 몰락도 겹쳤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개인적인 진보정당의 실패…. 우리는 당시 YS의 개혁드라이브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았다."

- 당시 재야 쪽에서는 "노동형제를 버린 배신자"니 "변절자" 하는 비판이 쏟아졌고, 민자당 내부에서도 "우리 당이 빨갱이를 영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심정이 어땠나?
"요즘에는 그게 덜 이상하지만 나도 굉장히 갈등이 많았다. 민자당에 입당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과 토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정도였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연옥의 고통을 겪었다.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았다. 이후에도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나는 정치를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생각했다"

- "연옥의 고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힘들었던 것인가?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지만 운동하듯이, 수도를 하듯이 했다. 특별히 방탕한 생활도 안한 것도 그런 에너지가 크게 작용했다. 보통 정치권에 가면 흥청망청하고 기름기도 좀 끼고, 골프채도 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정치를 이렇게 해보지 않았다. (나와 그런 사람들의) 정치입문과정이 다르다. 나는 정치를 하나의 운동과정, 삶에 대한 헌신으로 생각했다."

- 그런데 아직도 '변절자'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나?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좀 있다. 그들은 나를 (여전히) 그렇게 본다."

- 민중당 시절 '구국의 결단'이라는 '3당합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민자당 입당은 결국 3당합당을 인정해주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내가 지금 내세우는 가치는 건국세력과 근대화세력, 민주화세력의 통합을 통해 선진화, 세계화 과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 떨칠 수 있다. 대통합의 정치, 대통합론, 대수도론도 다 그런 맥락이다. 지역·계층·이념의 대통합을 통해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 94년 민자당 입당은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하나?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잘했다고 했다. 그걸 후회한 적이 없다. 진짜 잘하기 위해서는 뭔가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선진국까지 진입시키고 선진대열에서 추락시키지 않도록 하는 게 내 목적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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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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