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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와 노사모 회원들. 노사모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광주 돌풍이 일어나면서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새 시대는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인물과 조직을 낳는다. 2000년 대한민국의 노사모와 바다 건너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서클은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평범한 국민이 정치의 주역이며 실세'임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이들 두 조직의 출현은 21세기 벽두에 새로운 세기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선포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BRI@노사모와 볼리바리안 서클은 직업 정치인이나 정당원이 아닌 직장인, 학생, 주부, 자영업자, 실업자, 중소기업인 등 평범한 국민이 자발적 결사를 통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들고 기득권 세력의 반격으로부터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보호하며 개혁에 힘을 실어준 역사상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조직이다.

이 두 조직은 모두 21세기가 시작된 첫해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기성의 어떠한 정당과 정치단체들도 수행하지 못한 적극적인 정치 행동의 전면에 나서 정치공학적 분석으로는 절대로 생각해내지도 예측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정세를 창출하는 데 공헌한다. 두 조직의 좌표는 그러나 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엇갈리게 된다.

노사모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노사모는 2000년 4.13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 후보를 격려하던 네티즌들의 제의로 전국 6개 권역(수도권, 충청지역, 호남, 영남, 강원, 제주)의 지역별 모임을 거쳐 그해 6월 대전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5월에 팬클럽 창립을 협의하기 위해 모인 인원은 33명이었으나 창립 이후 회원이 급속도로 불어나 8월에 1천명을 돌파한다.

2001년 7월과 9월, 11월을 거치면서는 회원이 3천명, 4천명, 5천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2002년에 들어오면 확대 속도는 더욱 빨라져 노무현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공식 출마가 선언된 직후인 3월에 1만번째 회원이 탄생하고 이어 4월에 3만명, 5월에 4만2297명으로 불어난다.

노사모의 헌신적인 활동은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노무현 바람을 거세게 불러일으켜 노 후보를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짓고 여러 고비를 넘겨 16대 대선의 최종 승리를 일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키는 일도 노사모의 몫이었다.

▲ 2004년 3월 광화문에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 7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시위가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임기를 한 달 남긴 국회가 갓 임기를 시작한 대통령을 탄핵한 2004년 3월, 노사모는 선도적으로 탄핵 반대 시위에 나서 파렴치한 국회의 행태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결집했다. 그 연장선에서 치러진 4.15 총선은 열린우리당 원내 과반수 의석 확보로 귀결되었다.

한 달 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기각 판결을 내린다. 이 판결이 온전히 재판관들의 양심과 법률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국민들은 별로 없었다. 질풍노도와 같은 국민의 힘이 헌재의 판결을 강제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외부에서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노사모의 최대의 역할이었으며 정치적인 한 정점이었다.

권력은 시장에 있다는 대통령의 인식

홈페이지(nosamo.org)의 대문 정보에 따르면 2007년 1월 2일 현재 노사모 회원은 10만5844명. 그러나 이 가운데 실명 인증을 거친 회원은 1만564명이다. 즉 실명으로 자기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고 조직에 가입해 있는 숫자는 1만명 정도인 것이다. 2002년 국민경선 당시 회원수가 정확한 인증을 거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4만을 상회했던 것에 비하면 그 세가 상당히 위축되었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사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질 정도로 탄력적이었던 노사모 활동의 침체는 단지 회원 숫자의 감소만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노사모는 언론개혁 운동, 정치개혁 운동, 과거사 청산을 위한 운동 등을 제시했지만 노사모라는 정치 조직 자체의 이름을 걸고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 활력이나 열정은 현격히 수그러들었다. 중앙적 정치 이슈에 대응하는 외에 지역 단위에서 생활 정치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사실 침체의 징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된 바라고 할 수 있다. 당선 후 미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13일 워싱턴 캐피털 호텔에서 열린 교포 간담회에서 "선거 때에는 노사모만 사랑했지만 이제는 모두 다함께 사랑하겠다"면서 촛불 시위와 관련해 "그런 일로 미국을 비난해서 여러분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돌아가서 각별히 잘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은 대통령 신분으로 외국을 방문해 의례적으로 할 법한 말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후보 노무현을 '노짱'이라는 살가운 애칭으로 부르며 희망돼지 저금통을 모아 대선을 치른 노사모 회원들의 정치적 열정, 지향과는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을 준다.

노 대통령은 연이어 열린 우드로 윌슨 센터와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공동주최 만찬에서는 한국의 반미감정에 관한 질문을 받고 "미국에 대해 다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 중 나를 지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설득하겠다"고 언급해 한결 뜻을 분명히 했다.

노사모는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고 대통령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조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노사모는 대통령으로부터 '설득'당해야 할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노사모 홈페이지는 노사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노사모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의지로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노무현이라는 대안을 통해 실천해 가고 있습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자발적 참여로 이를 실천하겠다는 선언은 20세기 현대사의 격변과 87년 민주항쟁, 1997년 수평적 정권교체 경험을 거치며 한껏 고양되고 자각된 우리 국민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의사 표시이자 대한민국이 정보통신 혁명을 거치며 세계사적 변화의 선두에 선 21세기 들머리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사모에게는 '노무현이라는 대안을 통해'라는 아킬레스의 약점이 있었다. 노사모가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는 매개체였던 노무현은 정작 당선된 후부터는 '국민의 미숙한 판단'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는 '모든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면서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대자본과 기득권 질서 앞에 한없는 무력함을 토로한다. 나아가 2005년에는 대연정에 합의해 준다면 한나라당에게 '권력을 통째로 넘길 수 있다'며 노사모의 정신을 정면 부인하는 발언에까지 이른다.

볼리바리안 서클 "국민의 참여 요구에 차베스가 답하다"

▲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각지의 혁명 수호 소모임들이 차베스 정권에 적극적인 지역 자치활동 및 사회 개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해줄 것을 요구하자 차베스는 이들의 요구를 전격 수용한다. 볼리바리안 서클이 전국으로 확산된 계기다.
ⓒ venesuelanalysis.com
볼리바리안 서클은 차베스의 대통령 당선 이전에도 단초적인 형태는 있었지만 직접적으로는 2000년부터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2001년 말부터 본격화되며, 2002년과 2003년에 이르는 반혁명 쿠데타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대규모로 확산된 자발적 정치조직이다.

1998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차베스는 공약대로 제헌의회를 소집해 대다수 국민들의 소망과 지향을 담은 신헌법을 제정한다. 신헌법은 그 근본정신부터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만들자는 목적을 담았고 국민투표를 거치며 승인을 받아 많은 국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강령적 원칙이자 방침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전문을 포함해 모두 350조의 방대한 내용은 소책자 한권 정도의 분량이며 여기에 당면한 베네수엘라의 각종 사회 정치경제적 현안을 풀어갈 정신이 담겨 있기에 헌법을 공부하면서 갓 개혁을 시작한 차베스 정권을 지원하고자 하는 자생적 모임이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진다.

이들 공부 모임은 학습에서 나아가 헌법 정신을 살려 국지적인 공동체 개선 프로젝트에 자원봉사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동질한 이념적 기반에 근거한 모임이 실천활동을 통해 경험이 더 풍부해지면서 각 서클은 의료나 교육 등 더 큰 문제, 점차로 지역공동체 전반의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것을 희망하게 된다.

2001년에 차베스 대통령은 이들의 요구에 답하여, 참여방식으로서 볼리바리안 서클을 창설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자생적인 스터디 모임들이 차베스의 요청 이후 볼리바리안 서클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범위에서 조직되기 시작한다.

차베스가 공식적으로 볼리바리안 서클을 조직하자고 민중에게 요구한 2001년 시점은 헌법에 근거해 49개 개혁 법률을 전격 공표하면서 반혁명 세력의 조직적 반발, 쿠데타 기도의 위협과 일전 불사를 각오해야 하는 시기였다. 볼리바리안 서클 구성원들도 당면한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리바리안 서클은 빠르게 조직되어 2002년 4월, 실제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차베스 복귀를 요구하는 대중 시위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나아가 그해 말 자본파업 시기에 서클 멤버들은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석유산업시설을 방어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서클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등 투쟁 과정에서 단련되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숙해졌다.

▲ 2004년 반혁명 세력이 주도한 대통령 탄핵 투표가 부결된 뒤 기뻐하는 차베스 지지자들. 자신들이 창출한 정권을 적극 지원하고 지켜낸 공통점이 발견된다.
ⓒ venesuelanalysis.com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 파업이 끝나가는 2003년 5월이면 서클 회원이 무려 220만에 달하게 된다. 전체 인구 2650만명 가운데 정치적 의사표시 가능한 연령대의 10% 정도 수준이다. 대통령 당선 후 오히려 침체에 빠진 노사모와 달리 볼리바리안 서클은 대통령과 개혁을 함께하며 조직의 규모와 경험, 질을 높여나갔다.

차베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정권을 이끌고 있기에 베네수엘라의 사회 개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정권을 장악하고서도 반대파는 물론이고 정부 조직의 관료성과 보수성 때문에 차베스는 개혁 미션 수행에서 기존 정부 부서를 배제시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는 개혁의 일차적 동력은 직접적인 국민의 참여와 주도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 볼리바리안 서클이 존재한다. 실로 이들의 무한한 혁명적 에너지와 헌신적인 활동이 없었다면 베네수엘라 혁명은 결코 지금과 같은 궤도를 밟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21세기적 정치활동의 가능성

16대 대선 과정에서 노사모의 활동은 민주주의 선진국을 자처하는 외국의 언론과 정치권에까지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결사가 어떤 수직적 위계조직보다 일사불란하고 응집력 강하게 그리고 동시에 유연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특히 IT강국답게 노사모는 활동의 많은 부분을 인터넷을 통해 펼쳤다. 매번 실천해야 할 과제를 홈페이지에서 토의하고 인터넷 여론을 조성했다. '자율적 인간의 평등한 상호 연대'라는 고전적 가치는 2002년 한국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 볼리바리안 서클 내부 구성원은 차베스 지지자, 체게바라 지지자, 모택동주의자 등 다양하지만 헌법과 혁명을 수호한다는 공통성을 지닌다.
ⓒ venesuelanalysis.com
볼리바리안 서클 또한 민주주의의 향후 발전 방향을 분명히 시사해준다. 7명에서 10명 정도로 구성되는 각 서클의 구성원은 완전히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자율적 조직으로 출발해 전국 단위의 정치적 과제를 수행해야 할 시점이 되자 아래로부터의 기반에 근거해 단위 서클-지역 조정자-광역 조정자-전국 조정자 체계를 만들어갔다.

'조정자'라는 특이한 명칭이 짐작하게 해주듯이 이러한 계통체계 역시 수직적 위계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공통성과 전국적 임무의 통일성을 부여하는, 말 그대로 코디네이션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노사모가 지역 단위나 중앙 단위의 대표자, 상근자에게 '일꾼', '대표 일꾼' 등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서클이 전국 단위로 퍼져나간 뒤에도 볼리바리안 서클은 여전히 집권 정당인 MVR과 별도의 조직으로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어떠한 정부 지원도 재정적 뒷받침도 받지 않고 있다.

여러 공통점은 볼리바리안 서클과 노사모가 20세기 인류가 거둔 민주주의와 지식기술의 발전 성과를 아우르고 역사적 경험, 국민들의 높아진 의식수준과 정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이들을 시대정신을 담보한 새로운 유형의 조직이라고 보는 이유다.

엇갈린 항로, 중대한 차이점

그러나 새로운 조직이라고 해서 언제나 새로운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노사모와 볼리바리안 서클의 항로는 어디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을까?

노사모에 비한다면 볼리바리안 서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초 서클들이 생활 단위, 지역 단위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각 서클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요구를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서클이 공동체 과제에 참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미션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 지역의 인프라 수리, 문화 행사 개최, 주민 교육 심지어 영세한 빈민들이 조합을 구성하는 것을 돕거나 은행 대출을 받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까지 한마디로 주민 생활을 개선하고 지역과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모든 과제가 서클의 자기 임무다.

서클은 정치적 자격도 행정적 지위도 없이 움직이지만 혁명을 진전시키는 동일한 목적을 지닌 공동체의 일반 주민, 노동조합 간부, 협동조합 구성원 등이 참여하기에 실질적으로 지역의 여러 과제를 조정하고 지역사회와 기업, 조합의 상충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중재하는 정치 역량을 발휘한다.

▲ 미국 LA시의 볼리바리안 서클 주도로 열린 규탄 집회. 베네수엘라에 대한 간섭 정책을 중지하고 손을 뗄 것을 촉구하고 있다.
ⓒ venesuelanalysis.com
이처럼 생활단위에서 주요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일한 정치적 방향성을 가지고 조직활동을 하기에 볼리바리안 서클은 지역 자치적 생활 정치 활동부터 전국과 중앙 단위의 정치 활동, 나아가 반혁명을 제압하고 개혁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는 운동까지 소화해냈던 것이다. 10명 단위의 개별 서클이 전국에 20만개나 조직되어 생활 기반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때 베네수엘라 혁명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생명력이 강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중대한 차이는 볼리바리안 서클은 특정 개인을 지지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다. 태동부터 그러했듯이 볼리바리안 서클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한 새로운 국가건설 아젠다를 위한 조직이다. 한마디로 헌법을 배우고 헌법 정신을 실천하며 헌법을 수호하는 조직이다.

노사모는 한 정치인의 팬클럽으로 출발한 배냇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배냇 정서는 친근하고 포근하나 스스로를 좁은 틀에 가두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한 개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의존은 노사모 초기의 신선한 시대정신을 퇴색시킬 수 있다.

물론 볼리바리안 서클도 구성원 다수는 차베스를 지지하지만 그것은 차베스가 헌법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며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볼리바리안 서클의 한 지역 조정자의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차베스가 아니라 헌법과 혁명을 지지한다. 차베스가 혁명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혁명을 강화할 새로운 지도자를 내세울 것이다." 이미 혁명은 차베스의 혁명에서 베네수엘라 전체의 혁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21세기 전망을 보여줄 거인은 누구인가?

20세기 초반만 해도 인류 대다수는 지극히 미약한 교육과 인권, 보건 수준에 민주 정치의 경험도 부족했다. 이런 조건에서는 시대를 선도하는 역사적 인물이 출현하여 민중들은 그 거인의 어깨를 딛고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특정 인물의 그러한 역할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지금은 국민이라는 거인의 어깨에서 시대와 미래를 조망해야 하는 시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국민의 요구에 답한 차베스와 국민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설득하거나 가르치려 한 노무현의 차이다.

차베스 정권은 국민의 힘을 신뢰하고 그 자발적 에너지를 결집해 반신자유주의 대안 사회를 성큼성큼 구성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갈 방도는 신자유주의의 선두인 미국과 FTA를 체결하는 길뿐이라는 주문을 왼다.

대통령 차베스는 국민의 요구를 수렴해 헌법을 아예 새로 만들어 개혁의 물꼬를 튼다. 대통령 노무현은 한미FTA와 같은 중차대한 사안을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요구에 '법적으로 필요성이 없다'고 답한다.

▲ 정부의 각종 여론 조성정책에도 불구하고 거센 반대에 직면한 한미FTA는 노무현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지난해 11월 청와대 부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기자회견.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미 두 조직의 항로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21세기 초엽 공히 시대정신을 담보한 조직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양국의 국민적 역량과 지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사모의 취지는 결코 볼리바리안 서클에 뒤지지 않는다. 국민의 정치의식 수준과 민주주의 투쟁 경험에서도 한국은 베네수엘라보다 나으면 낫지 못할 리가 없다.

베네수엘라에서 가능한 것은 한국에서도 가능하다. 우리 국민들은 볼리바리안 서클보다 한층 진전된 정치 운동을 언제고 만들어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김병권 기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입니다. 

 


태그:#차베스,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서클, #노사모,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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