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증기자동차가 'The Town 1913' 시가지를 지나가고 있다.
ⓒ 이용규
사람마다 서로 개성이 다르듯 지역(region) 역시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이것을 지역성(regionalism)이라 말한다. 각기 다른 개성을 무시하거나 획일화를 강요하면 안 되듯이, 지역 역시 그 성격에 걸맞은 지역디자인(regional design)이 필요하다.

개발독재시대라는 표현이 있듯이 지난 세기 한국의 지역개발사는 지역성을 무시한, 말 그대로 '깔아뭉개고 다시 짓기', '지도에 줄긋기'를 반복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은 실재공간(real space)을 추상화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새로운 공간은 추상공간(abstract space)이다. 추상공간은 자본의 회전속도를 더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며 이 공간에서 사람은 단지 숫자(numbering)로 표현될 뿐이다. 그야말로 자본은 자신 앞에 거추장스러운 모든 인간과 사물을 뚫고 최종 이윤창출의 공간으로 나간다는 말이다.

추상공간에는 인간이 담겨있지 않다. 단지 좌표만 있을 뿐이다. 기자는 이러한 추상공간을 실재공간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지역을 주민에게 돌려주자는 말이다.

이러한 공간이 이른바 '지속가능한 공간'(sustainable space)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을 되살려주고 그 공간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하다.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말이다. 그 한 예가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을 활용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지난번 기사에서 산업유산을 활용한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산업유산을 활용한 박물관의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BRI@산업유산은 과거 산업 활동에 이용됐던 장치 내지는 시설과 문서자료들, 산업 활동이 이루어졌던 마을 혹은 지역을 포괄한다.

이 같은 산업유산의 활용은 산업혁명의 출발지였던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는데, 그 시초는 19세기 말 스웨덴의 아서 하젤리우스(Arthur Hazelius)가 설립한 스칸젠(Skansen)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민속박물관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사라져가는 전통풍습과 작업, 촌락의 생활양식을 단순히 전시한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 박물관'(open air museum)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영국의 프랭크 아킨슨(Frank Atkinson, 당시 Bow Museum 박물관장)이 박물관 자료를 수년에 걸쳐 수집하면서 1958년에 박물관 위원회를 조직, 1970년에 개관한 박물관이 이 글에서 소개할 빔미쉬 박물관(Beamish Open Air Museum)이다.

▲ 광부의 아들이 1825년식 증기기관차를 운전하고 있다.
ⓒ 이용규
빔미쉬 박물관은 과거의 잉글랜드 북동부 생활양식을 보존하고 이것을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다. 그러나 빔미쉬에는 스웨덴의 스칸젠을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빔미쉬는 카운티 카운슬(county council, 우리나라의 郡에 해당)이 연합하고 행정과 자본을 지원해 만든 것으로 산업, 도시와 촌락의 생활양식이 연계된 잉글랜드 최초의 '열린 공간 박물관'(open air museum)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이 한때 마호가니탄광(Mahogany Colliery)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장소성(place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빔미쉬 박물관은 특정 시기에 이뤄진 특정 활동의 포괄적 혹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박물관 내 '철도지역(Railway area)'에 있는 작은 N.E.R.역에는 대합실, 화물창고, 석탄저장고, 계량대, 승객이 건널 수 있는 다리, 철도신호소와 철도신호시스템이 완벽하게 재현돼 있다. 모든 것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며, 몇 가지 자료들은 북동부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그곳으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처럼 빔미쉬 박물관은 당시 상황을 완벽하게 재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의 직간접 체험을 목적으로 복원됐다. 이밖에도 '광산지역(Colliery area)', '촌락지역(Farming area)', '도시지역(Urban area)'이 이미 박물관 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방문객들은 이 공간에서 19세기 당시의 광산지역을 경험하게 된다.

빔미쉬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19세기 북동부 광산지역을 흥미롭게, 그리고 자부심을 느끼며 관찰할 수 있게 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되돌아보며 사람들은 오늘날 이 지역에 관해 무엇인가(something)를 이해할 수 있고 지역과 사람의 하나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아이들이 사탕 만드는 과정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 이용규
빔미쉬 박물관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이 거대한 수집품을 볼 것을 기대하는,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빔미쉬 관계자에게 들어보자.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철도신호의 발전사를 살펴보고자 하면, 요크(York)에 있는 국립철도박물관(National Railway Museum)에 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전성기에 운영되던 북동부 철도시스템의 살아 있는 듯한 일면을 보려면 빔미쉬를 방문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철도시스템 이외에도 철도공무원의 가정생활, 탄광의 석탄 공정, 농사일, 그리고 오래전 도시생활에 관한 사례들을 공시(空時)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전시관(exhibition)과 박물관(museum)을 혼동한다. 전시관에서 사람들은 보통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 안에, 그것도 유리관 안에 전시된 유물들을 그저 쳐다보며 주어진 동선에 따라 걷다가 건물 밖으로 나온다. 이러한 전시관에서 관람객과 유물은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은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할 뿐이다.

국내의 경우, 몇몇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박물관의 이름을 단 채 전시관 노릇을 하고 있다. 반면 박물관의 경우 개방된 공간에서 관람객은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유물들은 관람객과 분리되지 않고 일체가 된다.

빔미쉬 박물관의 '타운 1913'(the Town 1913) 지역의 경우, 전차 레일을 중심으로 좌우에 상점과 은행이 늘어서 있으며 당시 모습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 인쇄소의 경우 여전히 과거의 식자판과 인쇄기술을 이용해 신문 내지는 팸플릿을 자체적으로 찍고 있었으며, 자동차 정비업소는 과거의 자동차 부품을 활용해 여전히 정비업을 하고 있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좋아하는 사탕가게의 경우 사탕을 제조, 판매하는 전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며 직접 먹어볼 수 있게끔 되어 있어 인기를 끌고 있었다.

▲ 갱도 체험. 갱도에 들어가기 전, 전직 광부가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 이용규
또 다른 장소인 '광산촌 1913'은 20세기 초 광산 활동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옛 광부사택과 갱도 체험은 물론 석탄 채굴에서 제련, 운반에 이르는 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은 갱도체험이다. 이곳은 전직 혹은 퇴직광부가 직접 관람객을 인솔해 막장까지 들어가는 체험공간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유산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으며 전시된 유물들이 관람객과 분리되지 않고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게끔 돼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이 고향이기도 한 한 전직광부의 말을 들어보자.

"폐광 이후 일자리를 잃어 다른 직장을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곳에 취직하게 돼 정말 기쁩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게 돼서 좋고, 관람객들에게 경험자로서 설명하니 관람객들도 좋아하고…. 아무튼 이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빔미쉬 박물관이 교육현장 기능뿐 아니라 이렇게 고용까지 창출하며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에 기자는 놀랐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자기 지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난 기사에서도 밝혔지만, 석탄유물보존위원회에서 그 많은 유물을 수집, 보관하고 있는데도 추운 겨울에 방치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산업유산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반대로 사라져가는 유물들을 찾아내어 훌륭하게 박물관으로 탈바꿈시켜 활용하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을까'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 갱도 체험. 갱도에 들어가기 전, 전직 광부가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 이용규
빔미쉬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역 출신이거나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광부의 후손이다. 또한 이들은 매년 7월 첫째 주가 되면 각 갱구별로 브라스 밴드(brass band)를 조직해 광부축제(Durham Miner's Gala)를 연다.

백년 넘게 이어온(1871년 시작) 이 광부축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그 자녀들이 어우러져 각 지역별로 만든 깃발(miner's banner)을 들고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춰 행진을 시작하면서 절정을 이룬다. 이 행사는 지역유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이 축제를 위해 각 지역은 공동 작업을 통해 정체성과 연대(連帶)를 확인한다.

왜 이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일, 즉 사라져가는 유산을 버리지 않고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에 오래전부터 그토록 정열을 쏟는 것일까? 기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전직광부의 말이 고민에 빠진 기자에게 실마리를 제공해줬다.

"석탄은 우리 고장의 정체성입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탄가루와 같습니다. 그 탄가루가 우리들 가슴에 쌓이고 쌓여 진폐증에 걸리고 또 그렇게들 갔습니다. 쌓였던 탄가루가 결국 화석이 되어 우리 가슴에 남아있는데 어찌 우리가 그것을 잊겠습니까."

▲ 박물관 내부를 순환하는 전차.
ⓒ 이용규
산업혁명이 시작된 영국, 그 산업혁명의 동력이던 석탄산업. 3년 전 북동부의 한 탄광을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석탄 산업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탄광의 기억마저 사라지게 하진 않았다.

영국 곳곳에 무려 900여개의 크고 작은 석탄박물관들이, 사라진 탄광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을 통해 지역주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를 통해 마을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박물관은 폐광에서 비롯한 '절망의 공간'(space of hopelessness)을 주민이 더 이상 고향을 떠나지 않게 만들어주는 '희망의 공간'(space of hope)으로 자리매김해, 교육의 장으로 혹은 관광자원으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다.

영국의 사례는 우리의 탄광지역 발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방치되고 있는 우리의 산업유산을 그냥 바라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이다. 강원랜드의 관심을 기대한다.

▲ 인쇄소. 사진 속 할아버지(71)는 19살에 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 이용규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선 한국에서 산업유산을 이용한 박물관의 가능성과 한계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용규 기자는 희망제작소 뿌리센터 비상임연구원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