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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이 보길도에 남긴 글씐바위
ⓒ 정윤섭

@BRI@고산 윤선도(1587∼1671)의 별서(別墅)지 라고도 할 수 있는 남해의 진섬 보길도에 가면 동쪽 해안어귀 바위에 ‘글씐바위’가 있다. 이 글은 우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 가는 길에 잠시 머무르며 남긴 글이라고 한다.

송시열(1607∼1689)은 당시 서인의 영수이자 정치인으로 파란 많은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는 오랫동안 집권을 한 서인들의 영수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지만 그 역시 당쟁에 의해 말년에는 노구를 이끌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곳 보길도는 윤고산이 은둔생활을 하며 ‘어부사시사’라는 국문학 상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곳으로, 정치적 여정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이 보길도라는 고도에 남긴 인연은 어떤 역사적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고산과 우암은 각각 남인과 서인에 속하며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적관계였다. 또한 두 사람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으며 당 시대인으로는 드물게 80을 넘게 살면서(우암은 83세, 고산은 85세)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두 사람간에 벌어진 치열한 예송논쟁은 당시의 극명한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나이로 본다면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났고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산이 20세 더 많은 셈이었다.

예송논쟁

▲ 글씐바위가 있는 보길도 동쪽 해안
ⓒ 정윤섭
조선은 성리학(유학)을 이념으로 한 왕조국가였기 때문에 주희의 성리학은 모든 정치이념과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는데 이는 특히 사림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라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지켜야 할 필요조건으로 내세워져 명분론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청나라에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던 병자호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 명분론은 수대에 걸쳐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만큼 중요한 것이었는데 피 터지게 싸워야 했던 예송논쟁 또한 어떻게 보면 명분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인과 남인은 3차에 걸친 예송논쟁을 벌이는데 이때마다 집권당이 바뀔 만큼 그것은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였다.

우리나라는 조선중기에 들어서면서 임란과 명·청 교체기의 큰 전환기를 맞이한다. 특히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조선에서 명·청 교체기는 새로운 역사적 시험대에 오른 시기이기도 하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집착한 중신들로 인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다.

그런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두 왕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의식과 행동은 매우 달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있는 동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며 세계를 지향하는 의식을 가졌던 반면 봉림대군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루빨리 볼모생활에서 벗어나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물리칠 생각에 대한 집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서로의 차이는 소현세자가 정세의 흐름을 읽고, 북경에서 독일인 선교사 샬 폰 벨[湯若望]을 만나 그로부터 서양 역법과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 받고 천주교를 소개받는 등 당시 실용적인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의 운명은 반청파와 아버지 인조로부터 미움을 사서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비극적 종말을 고해야 한다.

이로 인해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후 내내 종통에 대한 시비로 예송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원인이 되어 이후 예학에 대한 이론적 집착이 소모적인 정치싸움으로 흘러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인조의 대를 이어 반청파의 힘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른 이는 소현세자가 아닌 봉림대군으로 이후 적장자에 대한 시비로 소위 ‘예송논쟁’이 불붙게 되는 것이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인 조선사회에서 주희의 말은 절대적인 권위가 되었다. 그런데 적장자(종통)에 대한 문제는 정통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여 왕위계승에 있어 매우 예민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이 적장자에 대한 시비는 왕이나 왕족이 죽고 난 후 누구는 적장자이니까 3년 복을 입어야 하고, 누구는 적장자가 아니니까 1년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판단하게 하였는데 어찌 보면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 왕실에서 선물한 내역이 기록된 은사첩
ⓒ 녹우당
이 같은 예송논쟁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이 남인에 섰던 윤선도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로, 예송논쟁이 당시 집권을 향한 가장 뜨거운 사상적 논쟁의 구심점이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윤선도와 송시열은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다같이 스승이었다. 이 같은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효종은 왕위에 오른 후 이들을 등용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서로의 당파적 견해로 인해 집권을 하거나 밀리면서 서로의 간격만 확인하게 된다. 녹우당에 가면 효종의 사부였던 인연 때문인지 왕실로부터 하사 받은 선물들의 내역들이 쓰여 있는 은사첩(恩賜帖)이 전해져 오는데 주로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었던 42세 이후의 것들이다.

효종은 청을 치려는 북벌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하여 북벌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데 이때 효종이 최고의 참모로 내세우고 지원한 인물이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북벌계획에 명분과 책략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효종과 송시열을 비롯한 반청정권은 청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북벌은 이들의 중요한 명분이었다. 효종은 송시열에게 전권을 주었고 송시열은 효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추진했다.

3년 복이냐 기년 복이냐

그런데 예송논쟁의 과정에서 약간 의아한 것이 효종이 사망했을 때 윤선도 등 남인들이 3년 복을 주장하는 것에 비해 송시열은 기년 복(1년 복)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기년 복을 주장한다는 것은 종통을 부인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어서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 남인들은 서인에 대한 반격의 정치공세로 예송논쟁을 제기하고 나서 예송논쟁은 뜨겁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남인은 서인들이 효종의 적통을 부인한 역모로까지 몰고 가는데 당시의 왕조사회에서 종통이 부인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송시열이 효종과 매우 친밀한 군신관계이면서도 기년 복(1년 복)을 주장하는 것을 놓고 성리(예학)의 원칙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정도전이 신권정치를 주장하고 태종이 강력한 왕권정치를 펴려 하면서 왕과 신하의 밀고 당기는 권력(힘, 기)싸움이 계속되었듯이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가 이때도 계속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송논쟁의 과정을 보면 1차 예송논쟁은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집권당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리되면서 서인들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는 더 큰 논쟁을 잠복시키는 결과만 가져오는데 적통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듯이 남인들은 정치적 대 반격을 가하는데 예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고산이다.

고산은 광해군 때 이이첨 일파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때도 송시열이 주장하는 기년 복의 주장이 종통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과격한 상소를 올린다. 잘못하면 죽음이나 최하 유배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직설적으로 이런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고산은 한마디로 중용이나 타협보다 곧바로 밀어붙이는 꼿꼿한 선비의 기질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명분론에 지나치게 집착한 사림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이었던지 아니면 의기로운 선비의 기질 때문이었는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시간은 흘러 현종이 집권을 하고 있을 때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므로 인해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남인들로 인해 서인들이 정권에서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는 철저하게 서인들로부터 탄압 받았던 남인들의 서인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으며 일종의 만년 야당인 남인이 모처럼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도 서인들과 남인들은 또다시 집권을 놓고 쟁패를 거듭하는데 서인의 영수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도 숙종 때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숙종 시대에는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적통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 왕실이 고산에게 선물한 내역
ⓒ 녹우당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통해 얻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데 이 원자에 대한 정통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인 셈이었다. 이를 놓고 보면 송시열이 효종 때부터 기년 복을 주장한 것은 왕권보다는 신권에 무게를 둔 성리학(예학)의 원칙주의자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당시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은 죽음을 걸어야 했던 것으로 송시열은 공신에 대한 예우(송시열의 지지세력에 대한 두려움 등의 속사정도 있었지만)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오던 도중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것은 왕권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었거나 성리학(예학)적 명분론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그가 제주도 유배 길에 평생 정적으로 상대해야 했던 고산 윤선도의 별서지인 보길도에 들렀던 것은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진한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한다. 송시열은 이곳 보길도의 동쪽해안 암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여든 세 살의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인데, 초구에는 옛 은혜 서려 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짓네”

고산은 현종 12년인 1671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송시열은 숙종15년(1689년) 82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둘은 서로 다른 당파로 인해 치열하게 싸우다 가는데 고산은 마지막에 보길도 자연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숨을 거둔다. 고산이 죽음을 앞두고 자연 앞에서 느낀 것은 세상사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생각이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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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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