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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와 관련, 오늘날 한국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의 지식인들이 양심적인 자성(自省)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피해자인 한국의 지식인들이 일제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나서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식민통치 시절에 일제와 친일적 지주 사이에 존재했던 공생적 공범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일제 통치를 그처럼 결사적으로 옹호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일본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본과 공범이 되어 조선 민중을 수탈한 이들의 후손이 아직도 한국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와 친일적 지주들의 공생적 공범관계를 파헤치는 것은 비단 과거사를 정립하는 차원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의 의미도 갖는다.

이번 글에서는 1922~1926년 사이에 사이토 총독과 13번이나 면회하고 1924년부터 일제 당국의 자금지원에 힘입어 경성방직을 회생시키는 데에 성공한 김성수가 1920년대의 농업공황 속에서 소작농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자 주>


@BRI@1920년대에 김성수는 언론인 겸 기업인인 동시에 대지주였다. 종래에는 그가 일제 막바지부터 친일 노선을 걸었다는 시각이 보편적이었으나, 제4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친일적 노선을 걸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3·1 운동 이후 6년간 면담한 839명의 조선인 중에서 그 면담 횟수가 31위(1922~1923년) 및 46위(1924~1926년)를 기록할 정도로 김성수는 '조선총독이 만나보고 싶어 하는 조선 지도층'이었다.

평생 비밀에 부치고 싶었던 그 '부적절한 만남'의 횟수를 사이토 총독이 자신의 기록으로 남기고 만 것은 김성수 측에게는 애통한 일이겠지만 사이토 총독에게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성수에게는 그것이 '친일의 흔적'이겠지만, 사이토에게는 '애국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시기의 김성수가 단지 일제 당국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공업 경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농업정책에 편승해 소작농을 이중적으로 수탈하는 데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공업 경영에서는 일제의 자금을 받고 농업 경영에서는 일제의 정책에 편승한 셈이다. 이 점은 김성수 집안이 1920년대에 소작료 수취방식을 어떻게 변경하였는지를 검토함으로써 잘 알 수 있다.

김성수 집안과 일제의 농업정책

▲ 중년 시절의 김성수.
ⓒ <경방 80년>
제3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9년만 해도 김기중(김성수의 큰아버지 겸 양부)의 토지는 1천석(石)에 불과했다. 평년작을 기준으로 할 때, 1천석 토지는 대략 1600마지기(두락, 斗落) 또는 100정보 정도다.

그런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 김기중-김성수-김재수 3부자 명의의 토지는 1만 1707마지기가 된다. 6년 뒤인 1924년에는 그 규모가 1만3606마지기가 된다.또한 1923년경을 기준으로 할 때, 김성수 3부자의 땅을 갈고 있는 소작농은 총 1978명이었다. 김성수의 법적 사촌이며 친동생인 김연수 쪽의 토지 규모는 1909~1924년 사이에 90배가량 증가하였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럼 이 시기에 김성수 집안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소작료를 수취하고 있었을까? 김용섭의 연구에 따르면 김성수 집안에서는 정액제(정조제, 定租制)와 집조제(執租制)라는 2가지 방식을 병용하고 있었다.

정액제란 풍흉에 관계없이 고정된 소작료를 징수하는 것이고, 집조제는 수확 전에 예상 수확량을 간평(看坪)하여 소작료를 약정하는 것을 말한다. 집조제는 풍흉의 영향을 받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농업이 불황이거나 흉작일 때에는 집조제보다는 정액제를 선택하는 것이 지주에게 유리하다.

참고로, 김용섭은 서울대·연세대 교수에 이어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을 지내고 있는 경제사(經濟史) 학자로 오늘날 일본 및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 의해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 글에서 나오는 농업 수치(數値)는 김용섭의 논문인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다. 여기서 '고부 김씨'는 김성수 집안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918년 당시 이 집안은 밭에 대해서는 정액제를 주로 채택하였고, 논에 대해서는 정액제와 집조제를 병용하고 있었다. 김성수 집안의 농업경영 문서인 1918년도 <도조부>(賭租簿)에 의하면 김성수 3부자 명의의 논에서 정액제와 집조제의 비율이 30.16 대 69.84로 나타났다. 논에서는 정액제와 집조제가 대략 3:7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그럼 정액제와 집조제 중에서 어느 쪽이 김성수 집안에 더 유리했을까? 위 <도조부>에 따르면 정액제가 적용된 소작지에서는 1마지기당(當) 14.586두(斗), 집조제가 적용된 곳에서는 마지기당 12.588두의 소작료가 들어왔다. 정액제로 거두는 수입이 많았던 셈이다.

정액제로 할 경우에는 소작인으로부터 지세(地稅)·수세(水稅)·두세(斗稅)까지 거둘 수 있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이익이 된다. 당연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지세는 지주가 국가에 납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액제인 경우에는 소작인이 지주의 세금까지 부담할 수밖에 없다.

소작료 뿐 아니라 지주 부담까지 농민에게 전가

그런데 1920년대에 농업경영이 어려워지자, 김성수 집안에서는 소작료 수취 방식을 변경한다. 이 시기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경기가 불황 혹은 공황으로 접어들던 때였다. 여기에 더해 1920년대 들어 쌀값이 폭락했기 때문에 지주들의 경영 여건은 한층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수 집안은 고통을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럼, 김성수 집안은 어떤 방법으로 소작농에게 고통을 전가했을까? 그것은 바로 집조제의 비율을 낮추고 정액제의 비율을 높임으로써 가능했다. 이 점은, 1918~1924년 기간 동안 변함없이 김성수 집안의 토지로 남아 있던 9717.2마지기의 논에서 소작료 수취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18년 이 9717.2마지기의 논에서 정액제와 집조제의 비율은 29.13 대 70.87이었다. 그런데 1924년에는 그 비율이 43.09 대 56.91로 바뀐다. 불과 6년 사이에 정액제의 비율이 29.13에서 43.09로 급상승한 것이다. 이는 이 집안의 소작농들이 경제불황의 악조건 속에서도 더 많은 소작료 부담을 떠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액제로 할 경우에는 소작농이 지세·수세·두세 부담까지 떠안게 되므로 경제불황 속에서도 소작농들의 부가 김성수 집안으로 이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김성수 집안의 농민들은 소작료만 더 많이 부담한 게 아니었다. 지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도 소작농들이 가외(加外)의 손해를 더 입어야 했다. 세금은 본래 금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지주들은 자신들의 몫인 지세를 소작농에게 전가하면서 그것을 현금 대신 현물로 거둬들였다.

그런데 쌀값 즉 현물의 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는 '고정된 세금'에 상당하는 현물의 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20년대의 미가 폭락 상황 속에서 김성수 집안의 소작농들은 더 많은 소작료를 부담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지세를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지주들은 소작농에게서 현물로 지세를 받은 뒤에 국가에 대해서는 현금으로 지세를 납부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소작농들이 부담을 떠안은 셈이다.

실제적인 수치 자료를 보아도 김성수 집안에서 소작농들로부터 거둬들인 지세의 금액이 훨씬 더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당시 김성수 집안에서 소작농들에게 거둬들인 지세는 2084.35두였다. 그런데 1922년에는 그 세금이 6236.6두로 늘어났다. 쌀값이 폭락하고 농업경영이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김성수 집안은 '국가에 바칠 세금'이라면서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지세를 거둬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1922년만 해도 6236.6두로 늘어난 지세가 1923년에는 갑자기 118.5두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김성수 집안에서 지세를 갑자기 적게 거두어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김용섭의 연구에 의하면, 김성수 집안에서는 국가에 내는 지세 명목을 대폭 축소하는 대신에 소작료를 더 늘렸다. 결과적으로 소작인의 부담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김성수 집안에서 지세 명목을 대폭 축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짐작케 하는 것이 바로 1920년대의 소작쟁의다. 이 시기는 농민의 저항이 심해지던 시기였다. 지주가 소작료를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몫인 지세까지 소작농에게서 떠넘기는 것은 분명 소작농들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명목상으로 지세를 줄이고 소작료를 늘려 외형상 농민들의 분노를 줄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1918~1924년의 농업공황 속에서 김성수 집안은 소작료 수취방식을 바꿈으로써 소작농들에게 더 많은 소작료·지세 부담을 전가했다. 김성수 집안은 이런 방식으로 1920년대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3.1운동과 일제의 농업정책

▲ 3·1운동 당시 동대문을 메운 시위대.
ⓒ <한국백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농민 수탈이 당시 일제의 농업정책에 편승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3·1운동의 경제적 측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민중이 순수한 독립심의 발로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낭만적인 접근법일 것이다.

주로 소작농들로 이루어진 조선 민중이 총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맨주먹으로 일제에 항거한 것은 그들이 일제의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리 외세의 통치라 할지라도 그 밑에서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었다면, 조선 민중이 그처럼 대대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191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이 수탈농정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94년도 서울대 박사학위논문인 '일제의 한국 농지정책'에서 정연태는 1910년대 일제의 농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소작계약과 관행규범을 정책적 의도에 맞게 무단적으로 조정하는 동시에 소작쟁의에 대해서는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조기에 억제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에서 1910년대 농지정책은 증산 위주의 지주적·반농민적인 것이었다. 이 같은 정책의 결과는 상품화폐경제의 급속한 전개와 맞물리면서 지주의 농사 개입과 소작료 수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대의 조선 농민들은 일제의 수탈농정 속에서는 도저히 생존을 기약하기 힘들었다. 그처럼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맨주먹으로 3·1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때 조선인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문서 자료를 내놓으라"고 말하지만, 3·1운동 때에 전 조선 민중이 일제에 대항하여 일어났다는 점만큼 더 확실하고 실증적인 증거는 없다.

이렇게 조선 소작농들의 분노가 3·1운동으로 표출되었는데도 김성수 집안에서는 1918~1924년 기간에 소작료 수취방식의 변경을 통해 오히려 소작농 수탈을 강화하였다. 조선 소작농들의 분노가 조직적으로 일어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성수 집안이 소작농에게 불리한 소작료 수취방식을 채택했던 셈이다.

공교롭게도 일제 역시 3·1운동 이후 한동안은 소작농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는 1924년경에 들어서야 소작 관행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919년의 민중운동을 경험하고도 일제는 1924년경에 가서야 소작관행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다시 말해 1924년까지는 소작농 보호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수 집안이 3·1운동에도 불구하고 소작농을 한층 더 수탈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이후의 소작농정책이 1924년경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1920년대 초반에 친일적 노선으로 전향한 김성수는 공업 경영에서는 일제의 자금 지원을 받고 농업 경영에서는 일제의 소작농 수탈정책에 편승하였다. 그들은 1920년대의 농업공황 속에서도 오히려 소작농에게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소작농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자신들에게 이전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일제 치하에서 일본제국주의와 호흡을 맞춰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있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서는 '일제가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논리가 생명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조건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마지막 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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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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