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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세게, 체중을 실어서!"

11월 25일 오전 10시. 서울 상계동의 한 태권도 도장에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허잇!"하는 기합을 넣고 있다. 그런데 도복에 새겨진 선명한 글귀는 뭐람?

'Women's Fighting Spirit'

'여자들의 싸우는 정신'이라니 대체 이게 뭔 말인가. 지나칠 수 없어 도장 문을 열었다.

[태권도장] 웬 여자들이 점프해서 때리고 발로 차고...

▲ '주말도장' 참가자들이 대련을 하고 있다.
ⓒ 김홍주선
발목잡고 돌려주기, 가볍게 달리기, 옆으로 달리기, 이삭줍기, 점프해서 때리기, 살살 몸 풀기부터 시작하더니 미트(복싱 훈련시 사용하는 작은 주먹) 번갈아 치기, 체중실어 발차기…. 점점 과격해진다.

여성들은 이어 몸통보호대와 투구를 착용하더니 실제 대련에 들어갔다. 사범이 이들을 북돋는다.

"더 세게 치세요! 더 세게! 체중을 실어서!"

여자 인생 25년, '더 약하게, 더 가볍게, 더 부드럽게 보이라'는 말은 무수히 들어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이다. 구경하는 이의 손에도 왠지 모를 기운이 모이며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이 '수상한 훈련'은 바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난 10월부터 시작한 '자기방어훈련'의 다섯번째 시간이다. 총 10번으로 구성된 이 훈련장의 이름은 '자기방어 훈련 주말도장'. 한국여성태권도연맹의 회원인 임미화 관장이 이들을 가르친다. 임 관장은 여성 첫 경호원으로 알려져 있다.

"실전 위주로 여러 격투기를 섞었어요. 원래는 발차기 하나 제대로 하는 데에도 1년을 연습해야 해요. 기본부터 가르치면 좋겠지만, 열 번의 제한된 시간에 평소 몸이 단련되지 않은 여성이 배울 수 있는 기술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어설픈 호신술을 하는 것보다 실제 상황에서는 자신있게 한 방 날리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임 관장의 목소리에도 힘이 넘친다. 실제 여성들을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한 듯하다. 임 관장은 "이런 경험은 나도 처음"이라며 "지도자로서 새로운 열정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여건이 된다면 여성 전용 도장을 꾸려보고 싶어요. 여성 태권도 연맹의 회원이 40여명이예요. 아직 많지 않죠. 하지만 찾아보면 여자 사범님도 많이 있답니다."

성폭력을 당하면 "죽을 때까지 저항하라"며 여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터무니없는 주장은 이젠 옛말. 그러나 아직도 '여성의 힘으로는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폭력'이라는 등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콱 박혀있는 듯하다.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은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고 여성들이 '반격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계획됐다.

여성들이여, 이젠 반격할 때

▲ 대련이 끝난 후 서로를 껴안으며 인사하는 모습. '주말도장' 수업시간은 시종일관 웃음이 함께 한다.
ⓒ 김홍주선
성폭력 상담소에서 활동하며 2004년 '으랏차차 청소녀를 위한 호신 가이드'를 펴내는 작업에도 참여한 오매(별칭)가 기획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성폭력이 '사건'으로 의미가 축소되고 피해자는 무기력해하는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본'을 뒤집을 눈과 통제력이 필수. 몸을 지킨다는 '호신'의 의미를 확대해 일반 여성에게는 자신의 공간에서 일상적인 방어능력을 키워주는 훈련이라는 설명이다.

뿐만 아니라 흔히 피해자임을 자처하게 되는 성폭력 피해여성에게도 피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몸을 움직임으로써 힘을 받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즐겁게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합기도 도장을 다니며 여성 격투기를 연구, 2년여 간의 논문 작업을 완성한 허은주씨도 주말도장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에서 자기방어(self-defense)를 연구해 펴낸 < Real Knock Out(반격 : 자기방어의 힘, 번역 예정) >이라는 책이 도움이 됐다.

한국에서 격투기를 배우는 여성은 종종 특이하다거나 여성스럽지 못한 여성으로 인식된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그랬다. 잠재적 공격자를 대상으로 자기 방어 훈련을 하는데 남성들은 이를 두고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훈련자의 졸업식장에서 실제 겨루기와 격파 시범을 본 이후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대신 격려해주는 남성들도 많았다.

그녀의 '겨루기 체험'을 물었다. "때려야 하고 맞을 수도 있어요. 실전 싸움에 자신을 놓아두면서 겨루기에 적응하는 거죠. 멍들었는데 3일이면 낫는구나 이렇게 알아가면서."

남성 문화의 공격성을 답습하는 '부작용'은 없을까. 그녀는 "없다"라고 명확히 대답한다. 연약한 존재로서의 '소녀규범'을 넘어서 강함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한계점을 긋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발차기를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선택과, 애초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르잖아요?"

[체육훈련] 조신한 여자? 땀흘리는 여자

▲ 현직 체육교사인 김장효영씨
ⓒ 김홍주선
10대 청소녀의 '몸'을 위한 체육훈련 프로그램도 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구상하고 있는 '땀흘리는 청소녀를 위한 체육 시간(가칭)'이 그것. 일종의 청소녀 체육 개발 프로그램이다. 민우회는 지역 체육관과 연계해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학교에도 수업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차로 체육 수업 실태조사가 끝난 상태.

이에 이어 수원의 한 중학교 교사인 김장효영(25)씨가 혼성학급 농구수업 18차 지도안 구상을 맡았다.

김장씨는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한 청소녀 대상 '호신캠프'에서 합기도·유도 등의 훈련을 지도하기도 했다. 초심자를 대상으로 '막혀있던' 힘을 표현하고 분출하도록 하는 훈련이었다.

"여자들에게는 흔히 몸가짐도 조신하게 하라고 하죠. 여성들은 일상적인 몸놀림조차 차단 받는 경험이 많습니다. 그것을 깨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평소에 삼킬 법한 일들에 대해 소리 지르기부터."

즐거운 놀이로 '탱탱볼 축구' 같은 게임을 했는데, 공을 던져주면 무작정 따라가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공'이 아닌 '공간'을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주차할 때나 그럴 때 흔히 여자들이 공간 지각력이 떨어진다고 하죠. 그럴 수밖에 없어요. 공간 점유 훈련이 안 되어 있으니까요. 자기 방어라는 것도, 팔을 벌려 자기 공간을 방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

"뚱뚱하건 말랐건, 내 몸을 받아들여라"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자각은 때로는 화로, 속상함으로 그를 고민하게 했다. 몸에 대한 경험이 삶을 확장시키는데, 얌전하게 참으라는 주문은 얼마나 여자들의 삶을 좁히는가. 교육 현장에서 혼성 학급을 지도하면, 남녀의 차이는 없다가도 뚜렷이 드러난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한 예로 아시아 체육 교육,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는 농구에서 여학생에게만 '투 핸드 슛'을 가르치는데, 교육선진국에서는 일부러 안 가르치는 기술이다. 힘이 약하고 박진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원 핸드 슛'으로 통일해도 문제가 없는데 고민없이 문제있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가르친다.

팔을 흔들거나 하는 동작으로 뛰는 건 "기집애같이" 뛰는 것으로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놀림감이 된다. 그러면서도 여자애는 여자애처럼 뛰어야 한다고 은연 중에 강요한다. 이같은 기존의 환경에서는 체육시간에 여학생들은 교사가 잠깐만 눈을 떼도 땅 파고 그림 그리거나 수다를 떨게 마련이다.

체육기술을 알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중요한 일. 그런데 마땅한 역할모델이 없다.

김장씨는 "축구 경기를 시킬 때 <슈팅 라이크 배컴>을 틀어줬더니 아이들이 자극을 받아 신나하더라, 자연스럽게 실제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며 "결국 동기 유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체육시간 혼성수업이 오히려 '성별 맞춤교육' 저해

@BRI@우선 덤비는 데' 능숙한 남학생에 비해 여학생들은 사회적 시선에 민감하다. 남성들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흔히 배가 나와도 '이제 좀 넉넉해 보이신다'는 식의 긍정적 피드백을 받게 마련이다.

반면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출산중심의 담론이나, 미디어에서 상업적으로 조장하는 과장된 다이어트가 일반적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여성들이 다양한 몸의 체험을 하는 걸 두렵게 만든다. 이런 성차 때문에 그는 분리수업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운동장을 분리 할당하여 제공해야 한다, 당분간만이라도. 그것이 제도의 힘이 아닌가."

'성 역차별'이 거론되진 않을까. 안경 뒤로 동그란 눈이 단호해진다.

"아니, 운동장을 반으로 가르자는데, 그게 무슨 역차별인가요? '남학생들이 여지껏 점유했으니 몇 년 동안 운동장 쓰지 말아라' 그렇게 해야 역차별이지.

미국에서는 20년 전 여성 평등 체육 기회를 제공했죠. 각 대학 정부 지원금, 여학생 쿼터제나 운동 팀 성과 시합우승 등을 통해 훈련 트레이닝 등에 필요한 경제 지원을 했는데 이제 성과가 나오고 있어요."

짝수 토요일이면 여성들의 축구모임을 한다는 그는 앞으로도 여학생들의 보다 폭넓은 체육 참여를 위한 교수법을 연구할 계획이란다.

인터뷰의 말미, 잊을세라 덧붙이는 말에서 교사로서의 따스함이 일견 날카롭게 스민다.

"높이뛰기를 할 때 앞머리를 잡는 여학생을 보며 안타깝죠. 움직이는 몸보다는 보여지는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받아들인다는 점 말예요. 교사로서 바라는 거요? 다른 게 있겠어요. 아이가 뚱뚱하건 말랐건, 키가 크건 작건, 가슴이 흔들리건, 실력이 없건, 성별이 무엇이건 간에 상관없이 아이가 자신있게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는 거죠."

"이젠 밤길이 무섭지 않아요"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 참여자들 "내 안의 힘을 느낀다"

▲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 포스터
"우리 아예 순찰대 만들어서 동네 한바퀴 돌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자기방어훈련 주말 도장'에 참여한 여성들은 농반진반 이렇게 말한다. 한 참여자는 "밤길을 걸을 때 예전처럼 공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처음엔 안됐는데 세 번, 네 번 하니까 힘이 '쏠리는' 게 느껴진다"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물론 훈련에 적응하기 힘든 점도 있다. 한 참여 여성은 "힘을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굳이 공격을 학습해야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고, (누군가에게) 맞는 상황도 어색했다"고 털어놨다.

배운 '기술'을 써볼 기회는 없었을까. 또다른 참여자는 "전철에서 (훈련 때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안 밀리고 버텼다"며 "한 친구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아침마다 침대에서 주먹을 쥐어본다고 한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은 원래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면서 성폭력과 무관하기란 쉽지 않은 법. 지금은 여성주의 커뮤니티나 상담소 홈페이지의 홍보 포스터를 보고 오거나 알음알음 연락을 해 찾아온 여성 등 모두 21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말도장'은 지난 해에 이어 올해가 두번째다. 총 10주간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상계동의 경희튼튼체육관에서 진행된다. 참가비는 3만원.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이름과 연락처, 참가동기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 신청하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올해 '주말도장'은 신청이 끝난 상태. 다음 주말도장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한국성폭력상담소(www.sisters.or.kr·02-338-2890)에 하면 된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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