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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수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 사진 출처 : 1999년 주식회사 경방 발행 <경방 80년>.
ⓒ <경방 80년>
"대의에 죽을 때에 황민의 책무는 크다"-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 논설문의 제목. 학병제를 고무하기 위하여 김성수가 쓴 논설문.
"나는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학병제를 고무하는 위 논설문 중에서.

친일청산을 방해하는 세력들은 하나의 심리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박정희를 존경하듯이 일본을 그렇게 존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능한 조선 정부보다는 일본 총독부가 조선 민중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으며, 일본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들이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내면적 신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강한 신념을 심어 주었을까? 그들에게 친일 신념이 생긴 시초는 1876년 개항 때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이후로 조선에서는 일본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일(對日) 미곡 수출로 재산을 축적한 일부 지주 계층이 바로 그들이다. '조선이 일본의 덕을 보았다'는 논리가 일제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처럼 개항 이후로 일본의 덕을 본 지주세력이 조선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국민총력조선연맹 기획위원 등을 지낸 김성수라는 대표적 친일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제시대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인 개항 시기 때부터 추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이 친일파들의 심리적 경향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기자 주>.


전라도 고부 지방에 처음 정착한 19세기 중반만 해도, 김성수의 할아버지인 김요협이 소유한 재산은 '약간의 전답'에 불과했다. '약간의 전답'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확실한 것은 당시의 김요협이 대지주가 아닌 평범한 중소지주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럼, 김요협이 사망할 당시에 두 아들에게 남긴 재산은 얼마나 되었을까?

인촌기념회가 1976년에 발행한 <인촌 김성수전>이나 동아일보사가 1991년에 발행한 <평전 인촌 김성수-조국과 겨레에 바친 일생> 등에 의하면, 김요협은 장남인 김기중(김성수의 양부)에게 1천석(石)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차남인 김경중(김성수의 생부)에게는 2백석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물려주었다.

조선 지주세력, 일본 자본주의는 동지 소작농은 적

그러므로 19세기 중반에 '약간의 전답'에 불과했던 김요협의 재산은 1909년에 대략 1천 200석 규모의 토지로 늘어난 것이다. 소위 천석군(千石君)이 된 것이다. 참고로, 과거 조선의 토지는 오늘날의 평(坪)이나 제곱미터처럼 절대 면적으로 측량된 게 아니라 '얼마만큼을 수확할 수 있는가' 하는 상대 면적으로 측량되었다.

그렇다면, 김요협, 김기중(1900년대에 용담·평택·동북군수 역임), 김경중(같은 시기에 진산군수 등 역임) 3부자가 이같은 경제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제1편 기사에서도 3가지 요인을 제시했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그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조선의 지주세력에게는 동지와 적이 하나씩 있었다. 동지라는 것은 일본 자본주의를, 적이라는 것은 소작농민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 조선에서 조선 지주계급은 일본 자본주의와 연대하여 소작농민층을 무력화시켰다(동학농민전쟁).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잘 활용한 지주들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김요협 3부자의 재산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그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김요협의 재산이 약간만 늘어났다면 개인적 노력의 소산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침략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재산이 급격히 늘어났다면 재산 축적에 관련된 사회적·시대적 조건을 반드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일본 함대. 사진 출처 : 1978년 동아일보사 발행 <한국백년>.
ⓒ <한국백년>
개항 이후 전북평야가 미곡 수출지대로 부각된 점은 김성수 집안이 대지주로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개항이라는 정세 변화는 조선 지주층 특히 전북 지주층에게도 '장밋빛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일 미곡 수출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1895년 일본에서 발행된 <일한통상협회보고>(日韓通商協會報告) 제3호에 의하면, 대일무역의 기지인 부산항의 수출총액에서 쌀·대두가 차지하는 비율은 1880년에 68.2%, 1881년에 93.5% 등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청나라에게 농산물을 수출하는 대신, 양국의 섬유제품을 주로 수입하였다. 조선이 두 나라의 상품시장 겸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통계 자료로는 2001년에 중국 측에서 발행된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부록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1899년에는 군산이 개항되었기 때문에 전북 지역의 대일 미곡 수출은 한층 더 활기를 띨 수 있게 되었다. 1935년에 군산부(群山府)가 발행한 <군산부사>에 의하면, 군산항 무역액은 1899년의 8198원(圓)에서 1900년에는 7만4811원으로, 1901년에는 25만 9011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개항 10년 뒤인 1909년에는 그 액수가 204만 9530원에 달하였다. 개항한 지 불과 10년 사이에 무역액이 25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군산부사>에 따르면, 수출품의 주류는 쌀이었다.

이와 같이 개항 이후 쌀이 핵심 수출품목으로 부각되고 또한 1899년부터는 군산항이 개항되었기 때문에, 김요협 3부자를 포함한 전북 지역 지주들은 경제적 급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 여건을 갖게 되었다. 이 지역 지주들은 시장 개방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 지주층 동반 상승

그런데 이 시점에서 김요협 3부자는 경영상의 중요 결정을 단행한다. 집안의 거점을 고부군 부안면에서 부안군 건선면(乾先面)으로 옮긴 것이다. 1907년과 1909년에 걸쳐 이 집안의 거점은 줄포항으로 이전되었다. 이러한 이전은 당시로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선면에 있는 줄포항은 군산항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김요협 3부자는 줄포항에 사업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미곡 수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 가지 이유다.

유명한 경제사학자이며 학술원 회원인 김용섭(전 연세대·서울대 교수)은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이라는 논문에서 또 다른 한 가지 이유에 관하여 흥미로운 추론을 했다.

구한말 이래로 고부지방을 포함한 전라도 서남 지역에서는 농민 항쟁, 화적(火賊) 출현, 의병활동이 심했는데, 지주들이 이런 위협으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려면 일본 군경(軍警)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줄포에는 바로 일본 군대가 있었다.

김요협 3부자가 미곡을 수출하는 지주로서, 항구와 일본 군대가 있는 줄포항으로 이전한 것은 적어도 경영 측면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 김씨 집안의 줄포농장. 사진은 줄포농장의 사무소와 정미소다. 사진 출처 : <수당 김연수>.
ⓒ <수당 김연수>
이처럼 개항 이후 쌀이 대일 수출품목으로 부각되고 또 줄포항·군산항 등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 김요협 3부자의 재산을 늘리는 데에 기여한 핵심 요인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요협 3부자를 포함한 지주층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표현이겠지만, 당시 일부 지주층은 일본 자본주의의 조선 진출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 지주층이 동반 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 지주층의 동반 상승에는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작농민층의 저항이었다.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 지주층의 동반 상승은 조선 민중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전에도 조선의 농민들은 지주계급에게 저항하고 있었다. 1811년 평안도 지방의 농민항쟁, 1862년 삼남지방의 농민항쟁을 포함하여 이 시기에는 무수한 항조운동(抗租運動)과 민란이 발생하였다.

그들의 정치적 성장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다. 그들이 극단으로 내몰린 것은 지주계급의 수탈에 더해 일본 자본주의까지 침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심지어 전주성까지 함락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치적 분노를 정치적 조직화로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소작농민층이 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에 정치적으로 급성장한 소작농민층은 일본 자본주의와 조선 지주층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전라도 고부는 소작농민층과 지주세력 간의 대립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소작농민층의 정치적 도전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일본군과 ▲조선 지주층을 대변하는 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 관군이 단독으로 상대하기 힘들었던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공세에 의해 비로소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대-친일정권-지주계급의 3각 연대가 농민군대를 진압했다는 점은, 조선 지주층이 일본 자본주의와 공동운명을 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친일파들이 나왔다.

▲ 한성으로 압송되는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위와 같이 개항 이후 일본으로 미곡을 수출하고 또 일본과 연합하여 농민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에 조선의 일부 지주층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토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얼마간의 전답'만을 갖고 있던 김요협 3부자가 1909년 당시 1200석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은 이같은 사회적 배경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축적한 재산이 훗날 김성수의 사회적 활약에 밑바탕이 된 것이다.

간절한 일본 사랑, 이유는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

그런데 이 부분에서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지주가 일본 자본주의에 편승해서 돈을 번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인가?' 물론 실정법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될 뿐 법률적 판단의 대상은 못 된다. 또 그 문제를 갖고 친일 여부를 재단할 수도 없다.

그럼, 친일과 직접적인 관계없는 개항부터 1909년까지의 이야기를 왜 거론한 것인가? 그것은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조선 친일파의 시원(始原)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그들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헌신적인 황국 신민이 될 수 있었으며, 오늘날 그 후손들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처럼 적극적으로 친일청산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한말 때부터 일본 덕분에 돈을 벌게 된 사람들'의 역사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맨 앞부분에서 일본식민지 시기 김성수의 문장 두 대목을 살펴보았다.

"대의에 죽을 때에 황민의 책무는 크다."
"나는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


이러한 발언들은 대단한 '애국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1910년 이전에도 조선에는 무수한 애국자들이 있었지만, 저렇게 멋진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1945년 이후에도 많은 애국자들이 있었지만, 저처럼 확신에 찬 '애국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저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조국'으로부터 무언가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민족적 분노를 느끼기 훨씬 이전부터 일본에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발언들이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게 은혜를 느낀 사람이라면 1910년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개항 이후로 조선 정부 안에 친일파들이 성장하였다는 점, 일본제국주의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조선을 쉽사리 강점하였다는 점은, 개항 이후의 조선 내부에 일본과 제휴하는 세력이 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인 동시에 또 이들의 내응(內應)이 조선 강점에 기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을 상품시장 겸 원료공급지로 만들겠다는 일본 자본주의의 한반도 전략에 편승하여 일본에 쌀을 판매하고 그로 인해 고도의 경제적·정치적 성장을 거듭한 세력이 이미 개항 이후에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쉽사리 강점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 덕분에 우리는 잘살게 되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동포들에게는 해악이 되는 일본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된다는 점, 자신들이 일본 군대의 힘을 빌려 소작농민층을 분쇄하는 데에 참여했다는 점, 자신들의 친일적 경향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점, 일본과 협력하되 어떻게든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

이러한 점들은 한국 친일파들의 내면 심리를 이해하고 또한 그들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개항 이후로 형성된 이러한 심리적 경향은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럼, 개항 이후 천석군으로 성장한 김성수 집안은 1910년대에는 얼마나 더 많은 재산을 축적했을까? 이어지는 제3편 기사에서, 불과 10여년 사이에 엄청나게 불어난 그들의 재산에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1891년에 김경중의 4남으로 출생한 김성수는 3세 때인 1893년에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1903년에는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1905년 창평 영학숙(英學塾)에, 1908년 군산 금호학교(錦湖學校)에 입학한 김성수는 같은 해 10월 18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집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김성수가 1914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하는 사이에, 그의 양부와 생부는 엄청난 양의 부동산 축적에 성공한다.

덧붙이는 글 |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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