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인생'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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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과 흑인이 결혼한다면 아이의 피부색은?

초등학생 아들이 생일파티에 흑인 여자친구를 초대한다. 당연히 예쁘장한 백인소녀를 기대하던 엄마는 당황한다. 소녀의 엄마는 영어학원 백인 원장. 원장의 배우자가 흑인이라는 아들의 말에 엄마가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한 질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ㆍ제작한 옴니버스영화 <세번째 시선> 중 '험난한 인생'의 한 장면. 스크린에 이 장면이 비쳐지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같은 의문을 품은 이가 영화 속 엄마만은 아닌가보다. 실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비슷한 질문들이 몇 페이지에 걸쳐 주르륵 뜬다.

그렇듯 <세번째 시선>으로 묶인 여섯편의 단편영화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당혹스러울 만큼 실제 우리의 현실을 닮았다.

<세번째 시선> 속 각 단편의 '시선'은 외국인 노동자, 소녀가장, 인종차별, 가정 내 성차별, 청소년 동성애, 비정규직 노동자 등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 인권. 달리 풀면 '차별'과 '편견'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다.

<세번째 시선>은 인권위의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하나로 <여섯개의 시선>(2002)과 <다섯개의 시선>(2005)에 이은 세번째 작품. '인권 감수성 향상'을 위해 기획됐다. '인권'이란 단어에 지레 주눅들 필요는 없다.

주제는 딱딱하지만 영화는 딱딱하지 않다. 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감독의 개성만큼 각 작품들도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다. '튀는 세상'을 그렸듯이 영화도 적절히 튄다. 그 덕분인지 먼저 선보인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7일 기자시사가 끝난 뒤 간담회에서 전체 기획을 맡은 이현승 감독은 예상관객수를 묻는 질문에 "1300만명이 넘는 영화도 나오는데, 그 영화의 1%만 들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한편으로 세상이 바뀌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같은 작업이 덧쌓일 때 세상은 조금더 풍요로워지고, 우리의 삶도 그만큼 넉넉해지지 않을까. 독특한 영화 한 편 본다는 편한 마음으로 당신의 시간 가운데 106분(<세번째 시선>의 러닝타임)을 투자해보기를 권한다.

아래 <세번째 시선>을 채우고 있는 여섯 작품을 소개한다. 기자시사회 때 밝힌 각 작품에 대한 감독들의 설명도 덧붙인다. 영화는 11월 23일 개봉.

<잠수왕 무하마드>...무하마드는 왜 마스크를 쓰지 않을까

외국인 노동자 무하마드. 유독성 가스공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일하는 그는 '깜씨'로 조롱받고 '꼴통'으로 구박받는다. 그가 고향바다를 그리며 유일하게 안식을 얻는 곳은 대중목욕탕. <말아톤>으로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장윤철 감독은 횟집 어항 속 물고기 신세와 같은 불법체류 노동자의 일상을 판타지를 섞어 담담하게 풀어낸다. 퀴즈 '무하마드가 마스크를 쓰지 않는 까닭은?'.

"단편영화 좋아하지만 내 돈으로 찍기엔 돈이 많이 들고…(웃음). 평소 관심 갖고 있던 프로젝트라 참여하게 됐다. 외국인 노동자를 소재로 택한 것은 이제 외국인노동자도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회 일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말아톤> 시나리오 작업을 안산 시화단지에서 했는데, 그곳에서 본 외국인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소녀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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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사라졌다>...아나운서를 꿈꾸지만 말 못하는 소녀가장

소녀가장 선희의 장래 희망은 아나운서다. 그러나 정작 짝사랑하는 교회오빠 앞에선 아무 말도 못한다. 선희를 눈물짓게 하는 건 전기가 끊긴 차갑고 어두운 방도 그녀의 꿈을 비웃는 담임선생도 아니다. 그녀를 '동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주변 등장인물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의 섬뜩함이란! <원더풀 데이> <도로 눈을 감고> 등 독립영화로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김현필 감독 작품.

"이 영화에서 소녀가장은 소재일 뿐이다. 인권이란 인식의 문제다. 그런데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어찌될까. 아직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어린 소녀가장을 통해 인격 침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또 그것에 대해 항의를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다루고 싶었다."

<험난한 인생>...아들의 흑인 여자친구를 맞는 '황당한 시추에이션'

어느날 초등학생 아들이 흑인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온다면? 영어공부에 목숨을 걸면서도, 그같은 상황을 '황당한 시추에이션'으로 받아들여 반응하는 이율배반성을 꼬집는다. 생일케이크를 뒤집어쓴 흑인소녀의 눈망울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상을 남긴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물림된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노동석 감독은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인종차별이란 주제를 경쾌하게 다루고 있다.

"인권이란 단어 자체의 무게감으로 부담이 됐던 게 사실이다. 일단 아이들과의 작업을 생각했다. 일산의 한 사립초등학교를 모델로 취재했고, 출연한 아이들, 그 어머니들과 얘기하면서 영어학원, 생일파티라는 소재를 떠올렸다. 또 생일파티에 외국인 친구가 놀러오면 어찌될까를 생각해 그 아이디어를 영화에 담았다."

 '당신과 나 사이'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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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

가사와 육아는 누구의 책임일까. 아내의 책임? 남편의 책임? 아니면 공동의 책임? 그도 아니면 사회의 책임? 정답은 뻔할 듯싶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출산 후 직장을 그만뒀던 아내는 다시 일을 시작하려 하고, 남편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을 덧씌움으로써 그것을 막으려 한다. <버스, 정류장>의 이미연 감독이 연출했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김태우와 <정글쥬스>의 전혜진이 부부로 출연한다.

"아무래도 여성감독이다보니 여성 문제에 더 관심을 갖고 소재를 선택했다. 가족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소단위지만 가정 내 사소한 일들이 차별의 첫걸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찍었다.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부부싸움처럼 그 안에는 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있는 문제와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함께 있다."

< BomBomBomb >...'우정'과 '왕따' 사이에서

동성애자(로 낙인찍힌) 고교생과 그의 친구, 또 그 반 친구들의 얘기. '우정'과 '왕따'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이 선택하는 길은? 닫힌 교실문을 비웃듯 베이스와 드럼으로 폭발하는 두 주인공의 록 사운드가 슬프고 통쾌하다. 이미 충무로에서도 익숙해진 퀴어 문제를 남고 교실을 배경으로 변주한다. <반변증법> <자본당선언 :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 등 주로 실험적인 작품활동을 해온 쌍동이 김곡ㆍ김선 감독의 공동연출작.

"동성애 문제에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특히 영화기획단계에서 퀴어영화를 즐겨본 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은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권이라는 것이 인간 사이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고민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뤘다."

<나 어떡해>...노동자에겐 두 종류가 있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노동자에겐 두 종류가 있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도씨는 어머니가 위독해도 휴가를 낼 수 없고, 사내도서관에서 성경책을 빌릴 수도, 노조사무실에서 조합원용 낱말풀이용지도 집어갈 수도 없다. '한국의 켄 로치' 홍기선 감독 연출에, <왕의 남자>의 정진영이 도씨의 절망적 상황을 연기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오지혜도 도씨의 여동생으로 나온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취재하면서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새롭게 알게 됐다. 사실 영화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보다 더 하기도 하지만…(웃음). 영화 속 이야기는 한 대기업의 실제 사례다. 에피소드들도 실제 에피소드로, 다만 시간을 하루 상황으로 몰아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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