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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계석. 경복궁
ⓒ 이정근
조광조와 중종 임금의 인연은 조광조의 나이 서른셋, 1515년에 치러진 알성시에서다. 임금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출제한 '공자의 3년 정국구상을 논하라'는 문제에 '춘부'라는 답안지로 장원 급제를 따면서부터다.

알성시가 있기 5년 전, 조광조는 이미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지서의 사지가 되었지만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행정직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중앙정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근무 중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임금의 마음을 흔들어버린 조광조의 답안지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 됨이 하나입니다. 하여,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고로 임금과 백성은 하나입니다. 상고하건데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춘부春賦)

이어지는 조광조의 답안지는 임금의 마음을 흔들었고 임금은 신선한 현기증을 느꼈다. 공자사상을 하늘과 사람으로 축약한 조광조의 논리는 가슴 뭉클한 충격이었다. 등극한지 10년차. 이제야 인재를 만난 기쁨으로 충만 되었다. 그랬던 임금으로부터 불과 4년 만에 사약을 받고 조광조가 죽어가고 있다. 누가 도리에 어긋났는지 따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환경이다.

"학문이 깊고 훌륭한 문장이로다."

조광조의 뇌리에 입력된 그때 그 임금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전적, 예조 좌랑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는 승자를 뛰어넘는 쾌속 승진을 밀어주고 끌어주던 임금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며 헤매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 정암 조선생 적려유허추모비(능주).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비문을 쓰고 민유증이 전서를 써 현종 8년(1667년)에 세워졌다.
ⓒ 이정근
"야, 조광조! 임마 정신 차려. 대낮에 뭐하는 짓이야? 너 술 마셨어?"
"예? 예. 술? 조금 마셨슴다. 술은 술인데 독을 탄 술을 마셨습니다. 상감마마께서 내리신 독배를 말입니다. 전하께서 죽어라고 내리셨으니 마시고 죽어야지요. 근데, 댁은 뉘시온지?"

금부도사가 한양에서 가지고 내려온 비상은 독약이었다. 비소에 부자와 게의 알을 으깨어 꿀에 뭉치고 제련하지 않은 황금가루와 독극물을 넣어 만든 환을 소주에 풀어 마시는 것이 사약이다.

"나야 나. 임금이라구."
"예? 상감마마라굽쇼?"

"그래, 니가 어버이 같다고 생각하는 왕이야."
"전하께옵서 어인 일 이시옵니까?"

"야, 야, 상감이고 나발이고 거치적거리니까 때려치우고 우리 말 놓자. 너 지금 몇 살이냐?"
"서른일곱 입니다."

"82년생이구나? 내가 88년생이니까 나보다 여섯 살이 많은 형뻘 되지만 객지 벗 10년이면 맞먹기도 한다는데 지금까지 군신관계도 있고 그러니 그냥 말 놓고 지내자. 너 언젠가 계급장 떼고 맞장 뜨자고 그랬잖아?"
"아니, 제가 언제 그런 불충의 말씀을?"

"네가 경연관으로 있을 때, 너를 따르는 시강관 한충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잖아. '경연에 나올 때는 교의에 앉지 말고 평좌하자구. 그게 뭐니? 맞장 뜨자는 게 아니고?"(중종실록 11년 11월16일)

아련히 기억이 난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지 말고 마루에 방석 깔고 앉아 치열하게 토론하자던 3년 전의 일이.

"내가 용상에 앉아있고 싶어서 앉아 있는 줄 아니? 백성들이 그런다며? 복도 많은 놈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왕 자리가 굴러들어 오고 여복이 터졌으니 그렇게 비웃을 만해, 인정한다, 인정해. 그렇지만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떠밀려 올라가 마지못해 그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려오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못 내려 온다구. 너 내 심정 알기나 해?

글구 날더러 여색을 삼가 하라고? 그래 좋다. 네 눈에는 내가 여색을 좋아하는 놈으로 보이나 본데 너도 알다시피 공신들 옵션에 걸려 후궁들 치마폭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잖냐?

너는 입버릇처럼 18세에 결혼한 조강지처 하나만을 사랑한다고 자랑하는데, 부럽고 존경한다. 나도 본처하고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연산군의 뭐 된다구 내 마누라를 궁에서 쫓아 낼 때 뒷모습만 쳐다봐야 하는 무기력한 지아비의 심정을 너는 알기나 하냐구!"(중종실록 13년 1월18일)

▲ 경복궁 경회루 뒤쪽에 있는 정자. 임금이 은밀한 밀회를 즐기던 곳이다.
ⓒ 이정근
당시 중종은 여인들에 파묻혀 살았다.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국공신들이 추천하는 여자를 받아들인다는 옵션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정비 단경왕후를 즉위 7일 만에 쫓아내고 새장가를 들었지만 계비 장경왕후마저 첫아들(훗날인종) 낳다 죽어 중전이 없는 틈새를 후궁들이 파고들었다. 이중에서 재색을 겸비한 사람이 창빈 안씨이고 육감적인 사람이 경빈 박씨였다.

중전을 비워둘 수 없다는 주청에 따라 왕비를 맞아들였는데 이분이 훗날 수렴청정(명종 대)의 대가가 된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다. 하지만 나이 열여섯인 어린 왕비는 세상 물정을 몰랐고 중종은 나이어린 왕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틈새에서 각축을 벌이던 여인이 몸짱 경빈 박씨와 얼짱 희빈 홍씨다.

"언젠가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 신하들은 용안을 봐야 한다구, 그래 지금 보니까 잘생겼니? 말해봐 임마, 잘생겼어? 못생겼어?"(중종실록 13년 1월18일)

"너희들 말로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봐야 성색을 살필 수 있다고 말했는데 내 건강을 챙겨줘 고맙다. 근데 말이야 백성이나 신하를 막론하고 임금을 쳐다보면 모가지가 뎅겅 달아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어진 외에는 그림에도 임금의 얼굴이 없잖아. 그런데 내 얼굴을 항상 보여 주라고야?

너희들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내 얼굴 살피며 니들 얘기하려고 하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알어? 선 왕대부터 임금의 표정을 봐가며 말하는 간신을 차단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을 너도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니? 너 아니었으면 벌써 보냈을 거야. 너니까 오늘까지 온 거지, 그 때부터 넌 불경이야 알았어? 임마!

소격서도 그래. 왕실의 안녕을 위해 일월성신에게 제사 드리던 곳인데 변질되어 무녀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푸닥거리나 하구 퇴폐스럽게 흘러가는 거, 니가 말 안 해도 나도 잘 알고 있었어. 조금 아까 말했듯이 내가 후궁이 하나 둘이냐? 지네 들이 잘났다고 서로 일러바치니 알 수밖에…."

▲ 선릉. 서울 삼성동. 중종임금의 어머니 정현왕후(자순대비)가 잠들어 있다.
ⓒ 이정근
"너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알지?"
"네, 자순대비 이옵니다."
"그래 맞아, 알고 있어 다행이구나. 너는 어떻게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 참 불쌍한 여자다. 어린 나이에 인수대비의 손에 이끌리어 궁에 들어와 아버지(성종)의 후궁으로 나를 낳고 형이 왕이 되었을 때 너도 알지?

나도 어렸지만 너도 12살밖에 안됐으니까 잘은 모르겠구나. 형(연산군)이 아버지(성종)의 후궁, 숙의 정씨와 엄씨를 자신의 생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지목하여 작살내고 동생들을 아작낼 때 우리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냐? 오죽하면 요부 장녹수를 찾아가 무릎 꿇고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돌아와 나를 끌어안고 통곡하던 일을 나는 잊지 못해.

너 화병이라고 아니? 여자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한이 되고 그 한이 병이되는 화병 말이야. 그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우리 엄마는 화병이 나도 열두 번은 났어. 화병은 500년 후 발달한 의학으로도 못 고치는 병인데 그 화병을 풀고자 무녀를 대궐에 불러들인 거 좀 이해해주면 안되니? 울 엄마 돌아가실 때가지 기다려주면 안되냐구.

그런데 넌 소격서를 폐지하라고 265회나 상소를 올리고 급기야는 밤늦은 자시(子時)가 될 때가지 퇴청하지 않고 농성할 때 난 정말 싫었어. 정나미가 떨어졌다구.

그리고 정말 니가 싫어 진 것은 어느 날 니가 입궐 할 때, 니 앞에 호조판서 고형산이 앞서가고 있었다며? 그 꼴을 보지 못한 니가 호판의 가마꾼을 불러다 조졌다며? 건 월권이고 자만이야. 겸손 좀 해라 겸손."(중종실록 14년 12월16일)

▲ 조광조 비문
ⓒ 이정근
"겸손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마디 더 하겠다. 내 마누라(장경왕후)가 애 낳다가 죽어 창경궁에 피어하는 걸 너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나를 몰아 부칠 때, 대사헌 최숙생이 엄청 따지고 들더라. '임금의 행적은 항상 알려야 한다'고, 그래 일리 있는 얘기야. 그때 너 뭐라고 얘기했어? 최숙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구?"(중종실록 12년 8월20일)

"아니 제가 그런 말씀을…."

"얘 좀 봐, 너 지금 오리발 까고 그러는 거냐? 기억 안 나면 중종실록 읽어봐, 12년 8월 20일자 말야. 그 때 넌 검토관이었고 최숙생은 대사헌이었어. 그런데 니가 최숙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야? 니가 왕이냐? 니가 임금이냐고? 니가 입버릇처럼 떠벌리는 어버이처럼 떠받드는 임금 앞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너 조금 아까 절명시를 지으면서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다'고 했는데 임금을 어린이처럼 사랑한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 가방 끈 긴 거 알어. 인정한다구, 니가 처음 알성시에 나와 '춘부(春賦)'라는 답을 내놨을 때 난 너의 학문에 꾸뻑 갔다구. 그뿐이 아냐. 경연에서 근사록과 소학과 성리학을 꿰뚫어 열변을 토할 때 공자님이 살아 돌아 오신 줄 알았어, 그렇지만 나두 한 학문 하는 사람이야.

날이면 날마다 사람 잡는 형(연산군) 등살에 살아남으려면 책을 읽는 거 밖에 없었어. 형 눈에 저놈은 권력에는 야심 없고 책만 좋아하는 백년서생으로 비쳐져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넌 날 학문도 모르고 여자만 좋아하는 무식한 놈으로 취급 했어 그것이 서운했다 이 말이야."

"그리고 또 '지당하십니다'라는 말은 누가 쓰는 어휘냐?"
"예, 임금님이 옳은 말씀을 하실 때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쓰는 공대의 말입니다."

"그래, 맞아. 맞는데 말이야 너희들은 그 말을 내가 쓰게 만들었어. 특히 너 조광조가 경연에서 논리 정연한 어투로 설파할 때, 자리를 같이했던 사관들이 내가 '지당하다고 했다'고 실록에 기록해놨어, 이게 말이나 되냐? 임금이 신하의 말에 지당하다는 것이…. 너희들은 그걸 즐긴 거야. 임금을 모욕주면서 너희들은 쾌재를 불렀겠지만 나는 수모를 당하는 심정이었어.

내가 뭐 용상에 앉아 있으니까 내 마음이 하해같이 넓은 놈인 줄 아는데, 나 속 좁은 놈이야, 벤댕이 속처럼 좁다구. 내가 왜 이렇게 좁아진 줄 아니? 허구한 날 칼춤을 추는 형(연산군) 앞에서 살아남으려니까 간댕이가 콩 알만해졌어. 그렇게 해서 속 좁은 놈이 됐다구…."

▲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광조 묘
ⓒ 이정근
찬바람이 스산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싸라기를 뿌리던 눈발이 거세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임금의 얼굴이 사라졌다. 피를 토하던 조광조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금부도사! 사약이 남아 있으면 더 주시오!"
금부도사 유엄으로부터 약사발을 받아든 조광조는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하지만 목 줄기를 다 넘기지 못하고 '쨍그랑' 약사발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쓰러졌다.

의지의 선비 조광조는 이렇게 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흐트러지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그래도 머리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하고 절명했다. 한이 맺혀서 일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양팽손이 떨리는 손으로 눈을 쓰다듬어 내리자 그때서야 눈을 감았다.

▲ 정암 조선생, 학포 양선생 추모비. 능주 죽수서원에 있다.
ⓒ 이정근
조광조가 죽었다. 그 후 소격서는 부활했고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위훈삭제는 취소되었다. 도덕을 바탕으로 세상을 평정하려 했던 젊은 개혁 사상가는 좌절했다.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펼치려 했던 개혁 정치가는 실패했다. 올곧은 마음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했던 선비는 한 사람을 경세하지 못하여 무너졌다.

죄인의 시신을 거두는 일은 동률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여 향리에 가매장 했다가 이듬 해 용인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 소쇄 양산보는 홍문관 관직을 벗어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흙 담을 쌓고 집을 지으며 스승을 기렸다. 그것이 오늘날의 소쇄원이다.

49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그의 사상이 우리의 가슴에 각인되어있는 것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그의 도(道)가 백성에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개혁(改革)은 문자 그대로 피부를 가르는 아픔을 동반한다. 혁명은 밭을 갈아엎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개혁은 판을 깨지 않고 가는 길이다.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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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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