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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순씨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희생 당한 곡안리 주민들의 명단을 적은 화선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 윤성효

"이제는 눈물도 안 나네. 다 말라버린 거지. 낼 모레가 추석인데, 제삿상에 밥이나 올려야지."
"요즘은 길거리 가다 뺨을 한 대만 맞아도 수사니 뭐니 난리가 날 것이다. 그 때는 100여명이나 억울하게 죽었는데, 오히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숨 죽여 지내 왔다."

3일 낮 12시 경남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마을회관 옆 숲 속에 100여명이 모였다. 열린사회희망연대가 마련한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 신청을 위한 피해자·유족 한마당' 행사가 열린 것.

▲ 황점순 할머니가 당시 맞은 총알로 인해 흉터가 생긴 허벅지를 보여주고 있다.
ⓒ 윤성효
마을 주민 83명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지만, 아직까지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이 인근 양촌마을까지 진격해오자 마땅한 피난처를 찾지 못한 주민들은 1950년 8월 2일 마을에 있던 성주이씨 재실로 모여 들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8월 10일 오후 7시 30분경 미군 통역관이 재실을 찾아 피난민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군 통역관은 밤중이라 옮길 수 없다며 날이 밝는 대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주민들은 피난처를 옮기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아침식사를 했다. 그런데 8월 11일 오전 7시경, 재실에는 미군의 소총과 기관총이 난사되고, 하늘에는 전투기가 날아 기총소사를 해댔다.

일부 주민들은 재실 뒷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지만 사격은 계속되었고, 하루 종일 총소리가 울렸다. 이날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 등 83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이 마을에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해 15명이 불려 나갔다가 10명만 돌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영문도 모른 채 곡안리 주민 100여명이 희생당한 것이다. 곡안리 사건이 알려진 때는 불과 10여년 전이다.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1990년대 말부터 국회와 정부 등에 대한 진실규명을 촉구했지만, 이렇다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 송기인)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건을 신청받고 있지만, 최근 곡안리 사건은 아직 신청되지 않았던 것. 이에 희망연대가 추석을 앞두고 주민들을 위로하고, 11월 30일까지 진실화해위에 하기로 되어 있는 신청을 받기 위해 이날 행사를 연 것이다.

희망연대는 7년 전부터 곡안리 주민들을 만나 관련 활동을 벌여 왔다. 특히 이 단체는 재실에서 발생한 사건 당시 생존해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있는 황점순(80) 할머니한테 겨울난방비를 지급해 오고 있는데, 이날도 30만원을 전달했다.

이날 주민을 대표해 이만순(73)·황점순(80)·이상관(77)씨가 진실화해위에 제출한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다른 주민들의 서명을 받은 뒤, 희망연대 관계자와 함께 시청에 접수시킬 예정이다.

이날 희망연대는 음식을 마련해 주민들에게 대접했고, 농악대의 풍물공연에 이어 동요부르는 어른들의 모임인 '철부지'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김영만 전 희망연대 의장은 "7년 전부터 주민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왔는데 한꺼번에 모일 기회가 없었다"면서 "최근 곡안리사건이 진실화해위에 정식으로 신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접수마감(11월 30일) 이전에 신청하기 위해 오늘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백남해 신부와 김성대 민주노총 경남본부 사무총장, 전수일 진실화해위 대외협력팀장 등이 참석했다.

▲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추석을 앞두고 3일 오후 곡안리에서 주민위한행사를 마련했다.
ⓒ 윤성효

▲ 사진 왼쪽부터 유족대표인 이만순씨와 백남해 신부,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 윤성효

갖가지 증언 쏟아져

▲ 곡안리 마을회관 벽면에 진실화해위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 윤성효
이날 행사장에 나온 주민들은 갖가지 증언을 쏟아냈다.

황점순 할머니는 대표적인 유족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황 할머니는 24살의 새댁이었다. 당시 남편은 "지서에서 훈련받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황 할머니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주이씨 재실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10여일을 지냈다.

미군의 '소계명령' 뒤 피난을 가기 위해 모여 있다가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희생당한 것이다. 황 할머니는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아이를 안고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뒷산으로 향해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안고 있던 아이한테서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족을 모두 잃은 황 할머니는 지금까지 혼자 생활해 오고 있다.

마을 이장인 이일하(60)씨도 유족이면서도 직접 피해를 입었던 장본인이다. 이씨는 4살 때였는데, 재실에 있다가 할아버지를 포함해 가족 7명을 잃었다.

그도 총알이 엉덩이를 관통했는데, 당시 난 흉터가 지금도 있다. 이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루도 어깨를 펴지 못했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진상규명이 꼭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근 마을인 여양리에서 시집온 정봉수(79)씨는 친정 어머니와 남편을 잃었다. 정씨의 동생(69)도 오른쪽 허벅지에 총알을 맞아 지금도 절둑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정씨는 "당시 가난했는데,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더라면 나았을 지도 모르는데 작은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다보니 허벅지에 파편이 들어 있는 줄 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이상관(77)씨는 할어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이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꺼번에 죽는 바람에 가정이 완전히 파괴돼 공부도 더 할 수 없었다"면서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라 하소연할 때도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면 한다"고 하소연 했다.

김차순(75)씨는 시부모와 시동생을 당시 사건으로 잃었다. 김씨는 "당시 죽은 시댁 식구들도 신청을 해야할 것 같다"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 하려면 오늘 해 안에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현순(73)씨는 곡안리 사건과 관련한 자료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는 재실사건 때 할머니를 잃었다. 1990년대 말 곡안리 유족들이 대책위를 만들었는데, 대책위는 국회와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진정서를 넣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 희생 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화선지에 붓글씨로 적어 갖고 있었다.

곡안리는 음력 6월 27일 한꺼번에 제사를 지낸다. 후손이 없이 몰살된 3가구를 제외하고, 마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셈이다. 이만순씨는 "제사 지낼 때보면 추석이나 명절보다 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 이현순씨가 유족대책위에서 정부.국회 등과 주고받은 공문을 펼쳐보이고 있다.
ⓒ 윤성효

▲ '철부지' 노래 공연.
ⓒ 윤성효

▲ 풍물공연.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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